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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오숙의 ‘가모장 퍼포먼스’가 통쾌한 이유
개그우먼 김숙에 대한 사심 가득한 팬레터
JTBC 예능 프로그램 <님과 함께2 - 최고의 사랑>은 연예인들의 가상 결혼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가상 결혼은 남녀 연예인들을 섭외해 ‘남편’, ‘아내’라고 이름 붙이고 신혼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포맷이다. 대표적으로 20, 30대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가 있다. <최고의 사랑>은 <우리 결혼했어요>의 중년 버전이다.
타인의 결혼 생활(심지어 가상 커플링)에 전혀 관심 없는 내가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된 건 순전히 개그우먼 김숙 때문이다. <최고의 사랑>에 김숙-윤정수 커플이 등장하고 나서 ‘김숙 캐릭터 장난 아니다’라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성실한 네티즌들이 캡처해서 올려둔 방송 장면들을 살펴봤다.
김숙은 가상 남편 윤정수를 향해 “남자가 조신하니 살림 좀 해야지”, “(톱은) 함부로 갖고 놀다 남자 다친다”, “에이 밥맛 떨어져. 집구석에 오기 싫어.” 같은 말들을 서슴없이 던졌다. 구미가 확 당겼다. 당장 <최고의 사랑>을 정주행(1회부터 보는 것)했다. 본방까지 따라잡는 건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본방 사수하지 않는다. 김숙-윤정수가 “시청률 7%가 되면 실제로 결혼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뱉은 말이겠지만 웬걸, 시청률이 계속 오르고 있다. 혹시라도 시청률 7% 찍을까 봐 다시보기로 지켜보는 이 마음, 김숙 언니는 알랑가 몰라.
퓨리오숙, 숙크러쉬, 갓숙… 김숙 캐릭터의 매력
▶ JTBC 예능 프로그램 <님과 함께2 - 최고의 사랑>
<최고의 사랑>에 등장하는 김숙의 모습은 어딘지 익숙하다. 남편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자기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해야 성미가 풀린다. 데이트 코스도 자기가 정한다. 남편과 의논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조수석에 앉은 남편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식당에 데려가 밥을 사주고, 쇼핑하라고 용돈도 챙겨주고, 이벤트도 선보인다. 대다수의 남녀 관계에서 남자가 수행하는 역할을 김숙은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디 남자가 집구석에서 인상을 구기고 있냐”, “남자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면 패가망신한다”는 말들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주어만 다를 뿐, 우리네 가부장이 일삼는 말들이니까. 그런데 김숙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말들을 서슴없이 뱉는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은? 요즘 말로 사이다!
이런 김숙의 모습에 속이 뻥 뚫리는 건 나만이 아니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에는 김숙에 대한 칭송이 줄을 잇는다. 이들 반응을 정리해보면 1)멋지다 2)속 시원하다 3)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정도가 되겠다.(사람에 따라 1, 2, 3을 모두 느끼는 경우도 있고 한두 개를 교차적으로 느끼기도 할 것이다.) 애정 어린 별명도 많이 생겼다. 영화 <매드맥스>의 여전사 ‘퓨리오사’를 본 따 ‘퓨리오숙’, 센 여자 캐릭터에 반하는 여성팬들을 뜻하는 걸크러쉬를 본 따 ‘숙크러쉬’, 나아가 ‘갓(god)숙’이란 표현도 등장했다.
헌데 윤정수는 <최고의 사랑> 출연 후 타 프로그램 섭외가 줄줄 이어지는 반면, 김숙에게는 러브콜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은 누가 세웠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언짢아하던 중,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숙이 <라디오스타>에 출연한다는 것. 순전히 김숙 때문에 모처럼 밤 11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방송 관계자님들 보시오. ‘퓨리오숙’이 출연하면 텔레비전 잘 안보는 나 같은 사람도 본방 사수를 하게 된다오.)
왜 여자는 그러면 안 돼? 내가 한 번 보여줘?
시청률과 영향력이 전보다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MBC의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이하 라스)는 영향력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출연한다는 건 ‘이슈’가 되고 있다는 증거. 특히나 ‘라스’는 인지도(혹은 인기) 순으로 게스트들의 자리를 배치하는데, 이날 김숙은 당당히 첫 번째 자리에 등극했다. (하필이면 최근 연애 사실을 밝힌 여자 아이돌과 함께 나오는 바람에 스포트라이트는 빼앗겼지만, 그래도 첫 번째 자리에 앉은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이야기는 뒤에 좀더 하겠다.)
김숙에게는 당연히 <최고의 사랑>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김숙은 가상 남편 윤정수를 두고 “그렇게 막 대할 수 있는 남자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만큼 윤정수가 잘 받아준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라스 진행자 중 한 명인 개그맨 김구라가 인상을 확 구기더니 “상대를 막 대하려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훈수를 두었다. 그러자 우리의 김숙, 이렇게 대응했다. “근데 왜 저를 이렇게 막 대하시죠?”
나는 그 순간 진심으로 탄복했다. 만약 김숙이 ‘아니,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내 남편 막 대하겠다는데 당신이 뭔 상관이야’라고 소리쳤다면, 그의 모습은 흔히 ‘호통 개그맨’이라 불리는 박명수나 우리네 가부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숙은 ‘남편을 막 대하지 말라고 하는 당신이 지금 나를 함부로 대하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근거가 무어냐’라고 반문한 것이다.
지금껏 내가 보아온 김구라 캐릭터는 항상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막 대해’ 왔다. 상대가 자기보다 인지도가 낮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여자일 때 그는 목소리를 높여 단정적으로 말하며 자기 위신을 세웠다. 대개 약자 캐릭터들은 김구라의 공격적 언행에 아무 말 못하고 진땀을 흘리거나 많이 배운다는 식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김숙은 달랐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김구라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나를 막 대하느냐고.
추측컨대 김숙의 이러한 통찰력(혹은 본능적 방어력)은 그가 오랜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막 대해진 경험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여자가 무슨 짓이냐’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라서 안 된다’라며 거절당했을 것이다. 그런 순간마다 김숙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왜 여자는 그러면 안 돼? 여자도 할 수 있어. 내가 한 번 보여줘?’
미러링, 남성 권력을 드러내는 수단
▶ JTBC 예능 프로그램 <님과 함께2 - 최고의 사랑>
<최고의 사랑>에서 보여주는 김숙의 ‘가모장 캐릭터’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전부터 “까짓 돈은 내가 벌면 되고 남자는 조신하게 살림하면 좋겠다”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이런 개인의 가치관이 때를 만나, 특정 예능 프로그램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그런데 김숙의 ‘가모장 퍼포먼스’는 본인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던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 지금까지 ‘남편/남성’만의 것으로 여겨졌던 그릇된 권위를 ‘아내/여성’이 꼭 닮은 방식으로 구현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 언어가 ‘남성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 하나는 그 권위가 참 우스꽝스럽고 폭력적이라는 깨달음이다.
최근 한 여성 커뮤니티는 페미니즘 운동의 방식으로 ‘미러링’을 활용하고 있다. 미러링이란 남성(혹은 여성을 비하하는 특정 커뮤니티)이 주로 쓰는 언행을 따라하며 그들의 행태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방식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남을 함부로 평가하고 비하하고 찍어 누르며 낄낄대는 그런 말들을 ‘너희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다. 남성의 전유물을 가지고 와 ‘도구’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미러링은 분명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지만 미러링의 궁극적 목표는 ‘원행위자의 언어가 가진 폭력성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고 나아가 그것을 개선시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김숙의 가모장적 언행을 ‘퍼포먼스’라고 부르는 것은 이 지점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 안에서는 (가상) 남편에 비해 경제적 능력이 있는 개그우먼이 반찬 투정을 하며 밥상을 엎는 시늉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엄연한 퍼포먼스일 뿐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혹은 다른 가족 구성원을 억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흔히 가부장제를 비판한다고 하면 현재 남성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여성이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누구도 억압받지 않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가부장제 안에서 억압받는 건 여성만이 아니다. 잘못된 권위를 짊어지고 있는 남성 또한 어깨가 빠질 지경이다. 그러니 그 권위를 그만 내려놓고 좀더 편안하게 평등하게 살아가자는 이야기다.(말이 쉽지,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흑흑.)
예능은 예능일 뿐 구린 다큐로 몰지 말길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최근 예능계는 그야말로 ‘남탕’이다. 대표 예능 프로그램인 MBC <무한도전>에서는 얼마 전 ‘예능 총회’가 열렸다. 영향력 있는 예능인들을 불러서 대한민국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다는 컨셉이었다. 그런데 이날 무한도전 멤버 다섯 명을 포함 17명의 출연진 중 여성은 김숙과 박나래, 단 두 명이었다. 이마저도 구색 갖추기였을 뿐, 이들에게는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이날 김숙은 “여성 예능인들이 설 자리가 정말 없다”면서 “송은이 씨는 최근 적성검사를 하더니 사무직이 나와서 엑셀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쉽게 웃지못할 개그를 선보였다.
앞서 ‘라스’에 출연한 김숙이 게스트 중 첫 번째 자리에 앉은 것이 ‘의미 있다’ 한 것도 이 지점이다. 김숙 본인도 “제 자리는 저기 끝 쪽이었는데 이 자리(첫 번째 자리)에 앉은 게 신기하다”고 할 만큼, 여성 예능인들이 자리 잡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결코 재능이 부족하거나, 게으르거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끼와 재능을 뽐낼 기회 자체가 많지 않고, 소위 ‘대세’로 등극하더라도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발판 역시 열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온 기회를 최대한 활용한다. 모든 창작자들이 그렇듯이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
<최고의 사랑>에 등장하는 김숙-윤정수 커플이 다른 커플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쇼윈도 부부’를 표방했다는 것이다. 철저히 프로그램을 위해 관계를 유지할 뿐 ‘다른 마음’은 전혀 없다는 걸 공표했다. 계약서도 썼다. 사랑에 빠지거나 바람을 피거나 임신을 할 경우, 상대방에게 1억천만 원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들 커플이 인기가 높아지자 슬슬 “진짜 결혼하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게스트로 출연한 박수홍은 내가 그 돈(1억천만 원) 줄 테니 확 덮쳐 버려”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만약 윤정수가 이 말을 했다면 김숙은 인상을 확 구기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더럽게.”)
기센 여자 캐릭터, 쇼윈도 부부, 계약서, 가모장 퍼포먼스까지 우리의 퓨리오숙은 철저하게 ‘예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촌스러운 사람들이 이 재미난 예능을 자꾸 ‘다큐’로 몬다. 그들이 원하는 내용은 대략 이런 걸 거다. 센 척 하는 김숙도 알고 보면 ‘천상 여자’라 파산남이라 기죽어 지내던 윤정수가 ‘상남자’로 돌변해 확 덮치면 그 박력에 반해 넘어가고, 하늘이 도우사 윤정수가 그토록 원하는 아이가 생기고(윤정수는 2016 새해 소원으로 아기를 적었다),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는 식상하고 구린 이야기.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확 기분이 상한다. 모처럼 흥미롭게 지켜보는 밥상에 누군가 시커먼 재를 확 뿌린 것 같달까. 시대가 어느 시댄데 자꾸 결혼 드립, 임신 드립 치는 사람들에게 가모장 버전으로 한마디 해주고 싶다. “에이, 퉤! 밥맛 떨어지게스리!” ▣ k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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