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와인도 나이가 든다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나이 듦에 관하여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여겼던, 이뻐서 꼭 끌어안으면 그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것이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감고 달라붙어서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 조카가 이젠 시커먼 사내가 되어 얼마 전 스물두 번째 생일을 맞았다. 생일에 주고받은 문자에 “22살이라니!” 라고 하는 조카에게 나는, “처음엔 그렇게 시작해. 이제 곧 서른도 오고 마흔도 온다, 나를 봐” 라고 답했다. 조카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했다. 즐기라고 짧게 대답을 보냈다.

 

처음엔 이 작은 생명이 잠들고 눈뜨고 먹는 것도 신기했는데, 이제는 몇 달 만에 만나도 여전히 귀엽긴 해도 덤덤하다. 다만 의미를 두고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어린이가 이렇게 컸지 새삼 놀랄 뿐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며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간다고 느끼는 이유는 똑같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처럼 매사가 신기하고 재미있을 순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100세 시대라 나이 들고 늙어서 살 미래도 잘 그려야 한다니, 앞으로가 더 큰일이다. 대체 누가 삶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 했나.


▶ 2012년 10월 어린 마당냥이. 두려움 가득(좌) 2015년 10월 이제 세 살 넘은 마당냥이. 기고만장(우)   ©여라

 

나이 들며 철드는 와인, 그렇지 않은 와인

 

와인도 나이가 든다. 시간이 더해지면 성격이 달라진다. 진하고 잘 익은 과일 맛이 전진 배치되어 있던 어릴 적에 비해, 나이가 들면 상큼하고 날카롭고 힘 좋은 신 맛이 약해지면서 과일은 생과일보다는 말린 과일의 오묘한 맛이 나고 그 외에 꽃, 허브, 향신료, 버섯이나 나무, 미네랄 같은 다양한 풍미가 깊이 있게 드러난다. 심장이 뿜어낸 것 같은 붉은 빛도 시간이 흐르면 부드러움을 품고, 눈부시게 빛나던 밝은 빛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따뜻함을 안는다.

 

시간이 지난다고, 나이가 든다고 무조건 더 좋은 와인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다 철이 드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그러길 기대하지만, 그 기대 때문에 실망했을 때 더 아프다. 다행히 와인은 나이가 들면 철들 와인과 아닌 와인으로 처음부터 나누어 만든다. 그러니깐 철들 와인이 아닌데 철들기를 기대할 필요가 없다.

 

나이 들면 훌륭해질 와인을 어떻게 알아보지? 숙성의 조건은 와인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맛(과일 맛, 단맛, 알콜, 탄닌, 신맛)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하고, 충분히 강해야 한다. 이탈리아 네비올로처럼 탄닌이 강하거나 독일 리슬링처럼 탄닌은 없어도 산도가 강해 포도 품종 자체가 오래 숙성시키기가 좋은가 하면, 그런 조건을 맞춰서 프랑스 보르도 와인처럼 여러 포도 품종을 블랜딩하는 방법도 있다.

 

어쨌든 탄닌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버텨줄 수 있을 만큼 과일 맛이 처음부터 진해야 한다. 신맛이 그 와중에 바닥으로 나뒹굴게 되면 꽝이다. 과일 맛과 탄닌과 신맛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서 와인이 장기 숙성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그런 와인은 나중에 제 전성기에 마시면 진가를 발휘한다.

 

와인의 맛은 숙성되면서 어떻게 달라질까

 

와인이 숙성하면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경험하고 싶다면 같은 와인을 오늘 마시고, 6개월 뒤에 마시고, 내년에 마시고, 2년 뒤에 마시는 식으로 그 차이를 기록하며 비교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보관을 적절히 잘했다는 전제가 있다.

 

모든 와인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다만 빨리 정점에 이르렀다가 추락하듯 금방 밋밋해지는 와인이 있는가 하면, 20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꿋꿋하게 자기를 지키며 정상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와인이 있다.

 

당연히 오랜 숙성 기간을 거친 와인이 비싸다. 그렇지만, 그런 와인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와인을 마시는 자리나 분위기, 또는 음식에 따라, 그리고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서도 ‘좋은 와인’이라는 잣대가 달라진다는 것이 와인의 매력 아닌가. 그윽한 과일 맛이 구미에 맞지 않는다면 아무리 평양감사라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시판되는 와인 대부분은 바로 소비하도록 만들어진 와인이다. 이것들을 10년, 20년 보관하겠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그럴 돈과 공간과 시간을 들일 만하지 않기도 하고, 꽤 여러 해 숙성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와인이라 하더라도 어지간히 많이 사두지 않으면 한 병, 두 병 꺼내 마시면서 계획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렇게 나이 들도록 아직도 자신을 잘 모르나.  여라

 

 여성주의 저널 일다      |     영문 사이트        |           일다 트위터     |           일다 페이스북




'문화감성 충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퓨리오숙, 숙크러쉬, 갓숙… 김숙 캐릭터의 매력  (0) 2016.01.31
엄마되기와 ‘수유전쟁’  (0) 2016.01.30
엄마와 보내는 겨울밤  (0) 2016.01.23
유기견 입양  (0) 2016.01.18
서른아홉, 새해  (0) 2016.01.06
새해 새 노트  (0) 2015.12.3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