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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 ‘신’의 권위에 대한 딸의 도전

자코 반 도마엘 감독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브뤼셀의 어딘가. 빌트인 싱크와 세탁기 그리고 천지창조가 이루어지는 커다란 사무실이 딸린 방 세 칸짜리 낡은 아파트에 신과, 신의 가족들이 함께 산다. 벨기에 출신의 감독 자코 반 도마엘의 연출작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는 신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소재를 통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신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 묘사되는 신은 시공간의 창조주이지만 가정 내에서는 자기 손으로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남편의 위치에서 아내에게 큰 소리를 치고, 아버지의 위치에서 딸에게 가정폭력을 가하는 신의 모습은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이다.


▶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일상 공간에서 드러나는 신의 폭력적인 면모는 인간 세계를 관장하는 법칙에도 반영된다. 딸 ‘에아’는 아버지가 자신의 재미와 만족을 위해 인간 세계에 고통을 가해왔음을 우연히 알게 된 후, 폭정과 부조리로부터 탈출을 결심한다.

 

“신의 아들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딸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영화 도입부에 신의 딸 ‘에아’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선전포고처럼 건네는 말은 그가 아버지(신)의 권위에 도전할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에아는 인간들의 사망일을 각자 인간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전송하는 것으로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생과 사를 관장하는 존재로 절대 지위를 얻었던 신에게 사망일이 유출되는 사건은 중대한 영업 비밀을 빼앗기는 위기 상황이기도 하다.

 

인간들에게 사망일이 전송된 이후, 삶의 의미는 모든 이들의 긴급한 화두가 된다. 에아의 행동은 생사를 관장하는 존재로서 신의 권위를 잃게 했지만, 인간들에게는 미뤄두었던 질문과 감춰두었던 욕망을 마주할 계기를 만들어준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약속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를 마주하고 그럼으로써 서로 마주보며, 그들 안의 슬픔과 공허가 맞닿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신의 역할. 이것이 ‘구원’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에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신약성서를 새로 쓸 여섯 명의 사도 목록을 랜덤으로 뽑은 후, 천지창조를 이루어낸 데스크탑을 먹통으로 만들어 버린다. 컴퓨터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은 자신의 무능을 마주하고 에아를 찾지만, 그것은 이미 에아가 입구도 출구도 없는 신의 세계에서 ‘대탈출’한 이후다.


▶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신약성서

 

인간 세계에 진입한 에아는 길에서 만난 노숙자 아저씨 빅터와 함께 여섯 사도들을 만나러 다닌다. 전지전능한 신이 말하고, 사도들이 그의 말을 쓴 기록이 기존의 신약성서였다면, 에아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사도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신약성서를 만들고자 한다.

 

지하철 사고로 한 쪽 팔을 잃은 후 무표정한 얼굴로 혼자 살아가는 오렐리, 모험을 꿈꾸던 삶이 워커홀릭의 일상으로 추락한 장 끌로드, 자신만의 웅덩이 안에서 헤엄쳐 온 ‘성도착자’ 마크, 죽음과 피를 사랑해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는 암살자 프랑소와, 부부 관계의 무관심과 결핍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마틴,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 윌리까지. 에아가 뽑은 여섯 사도들은 사회규범의 기준으로 볼 때 모두 어딘가 아프거나 이상한 사람들이다.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 나간다. 그들은 각자 내면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드러내고, 에아는 그들의 눈물을 소중히 모아 보관한다. 사과는 먹어보지도 못했고 바다는 본 적도 없다는 신의 딸 에아는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들과 거리를 두거나 경이로운 기적을 선보이는 대신,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며 사도들과 감정을 나누고 인간 세계에 개입하기를 선택한다.

 

교감의 과정을 통해 기록된 새로운 신약성서에는 “인생은 스케이트장 같은 것”, “공기가 없다면 새들은 떨어지겠지.” 같은 몇 개의 문장들과 함께 그림이 듬성듬성 그려있다. 낙서를 환영한다는 듯 넓게 남겨진 여백과 함께.


▶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변화의 카드를 쥔 여신, 유토피아의 도래?

 

에아의 뒤를 따라 인간 세계에 들어온 신은 자신이 설계한 법칙들에 의해 뒤통수를 맞고 결국 타국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신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한편, 남편의 권위에 눌려 야구 카드를 모으고 하루 종일 수를 놓던 여신은 신이 만든 시스템을 초기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남성 신에 의해서 구성되었던 기존의 세계는 여성 신의 의지로 인해 하늘에 꽃이 만발하고, 중력을 거스르며, 외눈박이 사람과 임신한 남자가 존재하는 세계로 변모한다. 변모한 세계가 이전보다 썩 괜찮은 다양성의 세계로 비치는 것도, 폭군인 남성 신을 도태시키고 여신이 앞에 나선 것도, 나름대로 속 시원해지는 결말이긴 하다. 하지만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모험의 주체로 그려졌던 에아가 아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신이 갑자기, 그것도 우연한 계기로 변화의 카드를 쥐게 된다는 결말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세계 변혁에 대한 상상력을 가시화한 장면들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변화에 대한 의지와 유토피아의 도래를 남성성에서 여성성으로의 단순한 이행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강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어쨌거나 잿빛 하늘 아래에서나 핑크빛 하늘 아래에서나 인간은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몸을 맞추며 살아가야 하는 미물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여성 신이 빚어낸 유토피아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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