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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민주주의를!” 일본 청년들의 움직임

특정비밀보호법, 안보법안 강행…‘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아베 정권이 국가주의와 우경화, 군사주의 노선을 강화함에 따라 이를 우려하고 저지하려는 일본 시민들의 결집도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외교, 방위, 간첩활동 방지, 테러 방지 등 주요 정보를 ‘특정 비밀’로 지정하고, 이를 누설한 공무원 공무원은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내용의 특정비밀보호법이 제정되어 2년의 유예 기간을 거치고 올해 12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국가가 지정한 ‘특정 비밀’은 최장 60년까지 비공개할 수 있고 게 되어 있고, 내각의 승인을 거치면 무기한 비밀로 남게 된다. 더구나 광범위한 영역에서 ‘특정 비밀’ 정보를 선정할 수 있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며 일본 정부에 불리한 정보를 은폐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부정적 여론이 다수다.

 

또한 아베 내각은 올해 7월 자위대의 해외 파견과, 동맹국이나 주변국이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무력행사를 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한 안보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2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일본 사회가 ‘전쟁을 하지 않는 나라’를 표방하며 지켜왔던 이른 바 ‘평화헌법’을 무력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군국주의와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를 보며, 일본의 시민들도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안보법안 폐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결집은 10만 규모를 넘어섰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청년들이다. ‘SEALDs’(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반정부 집회에 나선 젊은이들은 일본 시민사회에 새로운 목소리와 힘을 보여주고 있다. [편집자 주]

 

특정비밀보호법이라니 “말도 안 된다 생각했죠”


 ▲  7월 17일 국회 앞에서 안보법안 폐기 구호를 외치는 SEALDs 멤버들과 후쿠다 와카코 씨(21세)   ©사진: 오치아이 유리코


안보법안 처리를 놓고 갈등이 첨예했던 지난 6월 27일 토요일 오후, 도쿄 시부야 하치코 동상 앞 광장. 최신 유행 패션으로 치장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 거리에서 아베 정권의 군사주의와 우경화를 반대하는 선전전에 나선 SEALDs를 만났다. 클럽음악 풍의 음악에 맞춰 스마트폰에다 자신들이 전하고 싶은 구호를 적고, 이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 SEALDs 멤버들. 그 중에서도 눈에 띄게 강력한 발언을 하고 있는 사람이 후쿠다 와카코 씨(21세)였다. 다음은 와카코 씨의 이야기이다.

 

제가 거리에 나서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특정비밀보호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어요. 신문에서 기사를 보고,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꺼림칙했어요. 조사를 해보니, 뭔가 ‘좋지 않은’ 걸 찾아보거나 말하면 체포되는 법이더군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내친 김에 ‘특정비밀보호법 반대 집회’가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검색 순위가 제일 높은 집회에 그 다음 날 가봤어요. 중의원 의원회관이 어디야? 하면서.

 

그곳에 가면 저와 같은 대학생들과 만날 수 있겠거니 했는데, 대학생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주머니 아저씨들만 계시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잘 왔다”며 저에게 귤도 나눠주시고 원내 집회에도 데려가주셨죠.

 

그리고 한동안 국회 앞으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SEALDs 멤버들과 만나게 되었고, 트위터로 연결이 되기 시작했어요. 그 친구들과 SASPL(사스플, 특정비밀보호법에 반대하는 뜻있는 학생들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지금의 SEALDs(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로 이어진 거죠.

 

‘기미가요’ 거부해 징계받은 선생님의 기억

 

제가 중학교에 다닐 적에 ‘기미가요’ 기립 제창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정직 처분을 받은 네즈 기미코 선생님이 계셨어요. (기미가요는 일왕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긴 노래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성찰하고 평화를 원하는 시민들과 교사들은 이를 거부하지만, 일본 사회는 교육 현장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법제화하여 강요하고 있다.) 네즈 선생님은 정직 처분에 항의하며 교문에서 1인 시위를 했죠. 하지만 그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동아리 활동도 즐겁고, 학교에 불만도 없고, 남자친구도 있고, 친구도 있고, 선생님이 있는 평범한 학교생활을 보냈죠.

 

저는 저의 판단으로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고, 기립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왜 넌 안 일어나?” 물으면 “재미없어, 이런 거”라고 말할 뿐이었죠. 주변 사람들한테 이상한 아이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땐 제가 워낙 학교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축은 아니었으니, 다들 그냥 그런가보다 했어요.

 

네즈 선생님을 보고서, 이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면 저렇게 뭇매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아무 의견도 갖지 않는 게 당연하고,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분위기 파악 못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요. 특정비밀보호법이 이상하게 꺼림칙했던 것도 아마 중학생 때 그런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반대 집회에 나가면서 친구가 줄어들었어요.(웃음) 학교에서 그 이야기를 해도 “너 대체 왜 그래? 진심이야?” 그래요. 그때까지만 해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아침까지 술 먹어서 상태 메롱” 그런 거 적다가 “오늘은 집회에 갔다” 이런 걸 쓰니 다들 엄청 반응이 안 좋았어요. 친척들 중에는 “와카코, 그쪽이 된 거야?” “그거 하면 취직에 도움이 돼?” 그러는 분들도 있어요. 저는 다 그분들 세대 탓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같은 세대이면서 같은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SEALDs 멤버들과 함께 하면 편해요. 자기가 가진 진짜 생각을 감출 필요도 없고, 같은 안테나를 세우고 있고, 모두 이 사회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집회가 끝나면 뒤풀이를 하는데요. DJ도 있고, 음악도 있고, 술도 마시면서 균형을 잡고 있으니 집회를 한다고 해서 에너지가 소진 되는 일도 없어요.

 

또 한 가지, 우린 대표가 없어요. 한명 한명이 대표고 한명 한명이 독립적으로 생각을 해요. 사실은 다들 지쳐있고, 이름이나 얼굴이 노출될 위험도 있고, 시간도 뺏기고, 금전적으로도 힘들어서, 매번 다시는 안 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또 해요. (웃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시부야는 국회 앞과는 또 달리 재미있다, 이러면서.

 

“여자는 입 다물고 있어라” 이런 소리를 아직도…


▲ SEALD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의 후쿠다 와카코 씨.  ©사진: 오치아이 유리코


6월에 시부야 거리 선전전을 할 때는 2백명 이상의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어요. 그랬더니 초중고등학교 친구들 중 스무 명 이상의 친구들이 함께 참가해준 거예요. 게다가 “쫄지 말고 갈 걸 그랬다. 계속 혼자 무거운 짐지게 해서 미안해”, “이제야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알겠다”라고 여러 친구들이 답신도 해주고 국회 앞 집회에도 와주고 그랬어요. 지금까지 2년 간 이 일을 하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죠!

 

국회 앞에 10만 명이 모였을 때나 5만 명이 모였을 때보다도, 손바닥 뒤집듯 저를 떠나갔던 친구들이 돌아왔다는 게 저에게는 더 중요하게 느껴져요. 친구들의 긍정적 반응이요. 처음에는 “그런 거 몰라”했던 고3 동생도 “자위대 모집 우편물이 왔는데, 주변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건 진짜 심각한 일”이라며 지금은 국회 앞으로 출근을 해요.

 

이렇게까지 제 주위 사람들의 참여 폭이 넓어진 데는 제가 한갓 학생에 불과하다는 것이 오히려 큰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평범한 학생이자 한 젊은 여성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앞으로 나서지 않는 한, 평범한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죠.

 

솔직히 제 발언이 언론에 보도된 후, 인터넷에 저에 대한 악플, 폭언이 쇄도해서 엄청 기가 죽었어요. 같은 말을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여성이면, 훨씬 더 엄청난 악플이 달려요. 가부장제 같은 거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여자는 입 다물고 있어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여자로서 주목 받기 위해서 앞에 나설 일이 있을 때는 평소보다 큰 액세서리를 달고 나가요. (웃음) “죄송하지만, 이런 여자가 그런 얘기 안할 줄 알았죠?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시죠?” 하는 거죠. 여자의 지위를 거꾸로 이용하는 거예요.

 

오키나와에 가니,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어떤 악플이 달려도, 취직에 절대적으로 마이너스라는 얘길 듣는다 해도, 행동하지 않는 편을 택할 선택지는 제게 없어요. 가만히 있는 게 더 갑갑하거든요.

 

중위원에서 안보법안이 강행 채결되었을 때, 전철 안에서 저는 사람들 눈에 개의치 않고 울었어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더더욱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게 만들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어요.

 

저는 전쟁 세대가 이어온 ‘평화’라고 불리는 일상 속에서 살아왔지만, 지난 3월에 3주 동안 오키나와 헤노코에 가보니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더라고요. (미군 기지의 헤노코 이전으로,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다. 오키나와는 작은 섬이지만 이곳에 일본에 주둔한 미군 시설의 70% 이상이 몰려 있다. 역사적으로도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과 일본이 벌인 오키나와전쟁에서 주민의 4분의 1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때문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본토의 안전을 위한 희생양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미군 차량에 대고 소리 지르는 할머니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전쟁의 상흔이 그렇게나 깊은 거겠죠. 거리로 나서는 것이 이전 세계대전 희생자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의 추모라고 생각해요.

 

[후쿠다 와카코] 1994년생. 와코대 4학년. 취미는 춤. 도쿄 거주. 대학 졸업 후에는 해외에 나가 여성인권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얼마 전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공약이니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친구를 “(공약을) 지키게 만들 수 있는 건 우리”라며 4시간에 걸쳐 설득했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가시와라 토키코 기자가 작성하고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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