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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꾸네’ 스피릿은 위대하다
<이 언니의 귀촌> 해남 미세마을 공동체에서(상)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때는 7월 말, 찌는 여름이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는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하아 하아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뜨거운 숨을 내쉬며 괴로워했다. 그래도 우린 선풍기라도 틀지, 너무 더우면 카페로 도망가서 팥빙수라도 사먹지, 이 더운 날 밖에서 일하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더랬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밖에서 일하느라 고생하실 분들’ 중에는 농부도 있었다. 밀짚모자 아래로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그을린 얼굴 그런 이미지 말이다.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는 말 들어보셨는지? 해남에 내려와서 살다보니 한참 뙤약볕이 내리쬘 시간에 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 동네 어르신들은 시원한 나무그늘 정자에서 주무시거나 맛난 걸 나눠드시며 한담을 주고받고 계신다. 아니, 밖에서 고생하실 분들 다 어디 간 거야? 덥다고 쉬고 비 온다고 쉬고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건가, 엉?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 치자 
 

친구들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묻곤 했다. “요새 일하느라 힘들지?” “시골에서는 새벽부터 일한다던데?”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해?” 그 대목에서 왜 난 장기하의 노래가 생각나는 걸까. “나는 별일 없이 산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친구야, 미안하지만 나보다는 네가 더 걱정이다. 너는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고, 1시간씩 지옥철에 시달리고, 하루 8시간 근무에, 회식에 야근까지 하느라 시커먼 밤에 집에 들어가잖니. 나는 사실 ‘논다.’

 

오전에 밭일 좀 두어 시간 하다가, 점심 먹고 낮잠도 자고 하면서 서너 시간 쉬다가, 오후에 밭일 좀 또 두어 시간 하고, 해질 무렵 저녁상 차려서 먹고, 씻고 들어가서 놀다, 졸리면 자는 것이 내 하루다. 너에 비하면 나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와도 같은 일과를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하루 서너 시간 일하면서 일한다고 말하는 게 미안하니 차라리 논다고 말하는 거란다.

 

내가 논다는 것은 해남 군민들에게도 공인된 사실이다. 농사 좀 짓는다 하면 부부 둘이서 논과 밭을 몇 만평 단위로 경작하고 계신 분들이 대부분이라, 젊은 것들 여섯 명이서 삼사천 평 땅을 농사지어서 먹고 살아보겠다고 하는 건 참으로 얼척없는 일, 그분들 눈에도 우리는 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도시에서 우리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계실 부모님들 눈에도 당신의 아들딸들은 놀고 있는 상황이다. 한창 나이에 직장도 때려치우고, 결혼도 마다하고, 못생긴 감자나 호박 고구마를 이따금 부치며 “내가 농사지은 거야~” 으스대는 딸은 한심하다. 밭에 가보면 풀이 가득하고 정성으로 키우고 있다고 주장하는 작물들도 엄마 눈에는 시장에서 파는 것들보다 훨씬 못한데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 ‘왕년에 시골에서 자란 내가 지금 내려가서 농사지어도 너보다는 잘 하겠다’, ‘너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이 엄마들의 냉정한 평가다.

 

이렇듯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나는 ‘놀고’ 있다.

 

농사짓는 기쁨을 아는 몸?!

 

그러나 요래 저래 쉬는 시간이 많긴 하지만 나는 엄연히 노동을 하고 있다. 다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노동의 세계라 노는 것처럼 비춰질 뿐. 세상사람 다 몰라줘도 내 몸은 안다.

 

▲   내 몸은 백수에서 노동자의 몸으로, 다시 농민의 몸으로 전환을 겪었다.  © 치자 
  

백수 탈출 후 취직해서 사무실과 집을 오가는 복받은 생활을 한 지 한 달여. 몸이 너무 피곤하고 기운이 없었다. 퇴근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주말에는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약속이다 취미 생활이다 뭐다 해서 의욕에 넘치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백수에서 노동자의 몸으로 전환 중이라 부대끼고 있었던 거다. 아침 10시까지 자고 새벽 2시까지 놀던 몸이 하루 8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사무를 보는 몸이 되려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귀농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시간 쪼그리고 앉거나 허리를 숙여서 하는 일은 참 낯설었다. 호미질, 낫질, 삽질은 기본이요, 괭이질, 톱질, 도끼질, 칼질 같은 병기 수준의 도구를 쓰는 일까지… 시골에는 연장도 많고 일도 많다. 내가 그 모든 연장들을 언제 쥐어나 봤겠는가. 귀농할 무렵 내 수준이 호미와 낫을 분명히 구분할 수는 있는 정도였다고만 말해두자.

 

다뤄야 하는 연장들은 지금도 추가 중이다. 예취기, 트랙터도 있고 목공과 집짓기에 손을 대게 되었으니 망치, 대패, 끌, 전동드릴, 헤라, 붓, 쇠손… 끝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을 다루는 다양한 -질에 도전하고 심지어는 조금 익숙해지기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칼퇴근은 없다, 불금도 없다

 

해 떠서부터 해질 때까지가 시골의 ‘오피스 아워’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일한다는 것 또한 참 적응 안 되는 일이었다.

 

‘야리끼리’라는 말, 해남에 와서 처음 들어봤다.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일한다는 뜻인데, 이놈의 일이라는 것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가늠하겠는가. 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또 남은 걸 하면 안 된단 말인가. 칼퇴근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야리끼리가 몹시 불만스러웠지만, 농사일은 ‘때’가 몹시 중요하다는 것, 하루 이틀 미뤘다가 결말이 크게 달라진다는 걸 알고 나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  농사는 타이밍의 예술. 모든 때는 농사달력에, 할머니들 마음속에, 꽃과 새소리에 씌여있다.  © 치자 
 

올해만 해도 그랬다. 때를 놓쳐 2월에 파종한 밀은 어찌어찌 싹이 나고 자랐지만 원래 자라야 할 크기보다 한참 작았고 이삭도 쭉정이가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폭삭 망한 것. 심어야 할 때, 거두어야 할 때, 갈무리해야 할 때…. 그 모든 때는 농사달력에, 할머니들 마음속에, 꽃과 새소리에 씌어져 있지만 몇 월 며칠이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눈 있는 자는 보고 귀 있는 자는 듣겠지. 농사는 그래서 타이밍의 예술이다. (우리한테는 눈치 보기의 예술~)

 

때가 이토록 중요하다보니 바쁜 시기에는 며칠이고 일이 이어지기도 하고 장마 때는 밭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일주일을 넘기기도 한다. 이렇게 불금도, 주말도 없이 살다보면 오늘이 월요일인지 일요일인지 헷갈리다가 마침내는 별 관심도 없어지고, 비 오면 쉬고 해 나면 출근한다는 매우 심플한 룰만 남게 되는 것이다.

 

야근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서리 걱정에 한밤중에 감자밭 덮어주고, 빗소리에 잠자다 말고 일어나 배추 모종 보러 달려 나가고… 아휴, 아무튼 낮이고 밤이고 그놈의 ‘때’가 사람을 일하게 만든다.

 

마이 웨이는 어디인가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 있어서 핵심적인 건 뭘까. 두 가지만 꼽는다면 ‘자율’과 ‘협력’이다. 때는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우린 좀 뒤늦게 알게 되어서 문제지만) 어떻게 일하느냐는 순전히 자기 마음이다. 무엇을 얼마나 심을지, 어떻게 키울지 결정하는 사람은 농부 자신이다. 똑같은 고구마를 심어도 이 집에서 하는 식이 다르고 저 집에서 하는 식이 다르다.

 

이웃들의 잔소리와 간섭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는 이상 내 ‘곤조’를 굽히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농사일의 큰 특징이다. 유기농법, 태평농법, 생명역동농법같은 이제는 좀 알려진 그런 농법들 역시 처음은 고집 센 누군가의 끈질긴 노력으로 시작되지 않았겠는가.

 

귀농 첫 해, 나는 농사에 비닐을 쓰지 않으리라, 석유로 돌아가는 기계의 힘을 빌지 않으리라, 맨발로 흙을 밟으리라, 맨손으로 작물을 만지리라 등등. 엄숙하고도 좀 웃기기까지 한 결심을 많이 했다. 맨발은 밭에 돌이 너무 많아서 몇 시간 만에 바로 포기했고, 맨손도 풀에 난 가시에 몇 번 찔리고 나자 바로 장갑을 찾았다. 비닐, 기계 역시 나는 쓰지 않지만 남이 해주면 뭐라고 하지 않는다. 뭐 그런 유체이탈 스타일을 자꾸 구사하게 되었다.

 

피로 쓴 맹세도 아닌데 좀 수정되면 어떠하리, 당당하다가도 팔순이 넘은 나이에 호미와 괭이 달랑 두개로 혼자 밭을 척척 만들고 씨를 뿌리시는 이웃집 할머니를 보면서 좀 부끄러워지는 건 사실이다. 내가 세운 결심들은 다 어디로 향하고자 하는 것들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지켜나가며, 그래서 어떻게 나이들 것인지를 다시 물어봐야 할 것 같다.

 

‘힘든 일은 모다 같이 함께 하자’

 

‘협력’ 역시 할머니들에게서 배웠다. 동네 아저씨 마늘 심기를 도와드리러 갔을 때였다. 마늘밭이 꽤 넓어서 우리들 말고도 일하러 오신 할머니들이 서너 분 더 계셨다. 두둑 양 옆으로 한 사람씩,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한 줄씩을 잡고 나아간다. 나는 왼쪽, 할머니는 오른쪽. 손이 느린 나는 뒤처지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보면 할머니는 내가 심어야 할 부분까지 척척 마늘을 꽂아주고 계신다. 나 같으면 쌩하니 내 부분만 하고 앞으로 갈 텐데, 할머니는 이렇게 해야 일이 얼른 같이 끝난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전라도의 ‘항꾸네’ 스피릿. ‘힘든 일은 모다 같이 함께 하자’는 마음이다. 일손 부족, 기계화 때문에 들녘에서 여럿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갈수록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농사일도 집짓기도 항꾸네했다고 한다. 여럿이 모인다는 건 다양한 재능들이 모인다는 것이고, 그래서 일판이 놀이판이고 춤판도 되고 그랬단다.

 

▲ 전라도의 ‘항꾸네’ 스피릿. ‘힘든 일은 모다 같이 함께 하자’는 마음이다.  © 치자 
 

우리도 함께 놀면서 일하는 몇몇 기획을 해보곤 했다. 해마다 쌀을 나눠먹고 있는 분들과 함께하는 ‘밥두레 모내기’와 추수가 있고, 고구마밭에서 캠핑하면서 고구마를 캐는 ‘구마구마에오라’, ‘배추밭 음악회’, ‘언니집 프로젝트’… 또 뭐가 있었던가.

 

혼자서 일하는 게 더 효율적이고 이것저것 거칠 게 없어서 자유롭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농민가를 받고 매기며 다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줄씩 모를 심어나갈 때, 여럿이 둘러앉아 흙 묻은 손으로 새참을 먹을 때, 장독대에 매년 같이 담근 효소며 장항아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걸 보면, 어떤 설명하기 힘든 즐거움이 마음에 차오른다.

 

그러나 항꾸네 스피릿이 때로 굴레가 되기도 한다. 모처럼 방에서 꿀잠을 자고 있는데 “에말이요~”를 외치며 도움을 요청하는 할머니가 찾아오신다면 난감하다. 몇 시간이라도 도우면 그만큼 금방 끝날 테니, 그리고 이렇게 도와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연신 건네시는 그 선량한 얼굴 때문에 방구석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겨땀은 기본이지

 

그리고 땀. 내 평생 이렇게 땀 흘리며 일한 적이 있었을까. 도시에서 땀에 젖는다는 게 헬스장에서나 봐줄 만하지 직장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겨드랑이 땀만 조금 나도 눈치를 살피며 데오드란트를 뿌려야 하는 판에 말이다. 그러나 시골에서 일한다는 건 땀나게 몸을 움직인다는 것, 땀 흘리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

 

조금이라도 시원할 때 일하려고 새벽밥 먹고 서둘러서 밭에 나가지만 우린 늘 꼴등이다. 등허리를 비추던 해가 서서히 떠올라서 거의 머리 위까지 올 때면, 땀방울은 뚝뚝 떨어지다 못해 줄줄 흘러 등판을 다 적신다. 어중간하게 땀이 나면 짜증나지만 그 정도 땀을 흘리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뻘뻘 땀 흘리며 일하고 돌아와 찬물에 샤워하고 이부자리 위에서 수평이 되노라면 얼마나 행복한지. 문득 불어오는 한줄기 산들바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덥고 갈증이 날 때 들이켜는 시원한 맥주 한잔의 상쾌함도 빠질 수 없겠다. 그래서 시골에 살면 주량이 느는 걸까.

 

오늘 내가 몇 시간이나 일했는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뒤뜰의 키 큰 해바라기들은 넘어다 보았을까. 감나무를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 했다가 담장 위에서 낮잠 한번 곤하게 자는 새끼 고양이들은 알고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오늘 나는 일했다. 아니다 놀았나 보다. 땀깨나 흘리면서 신나게.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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