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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 지어 번 돈이 월 20만원이라니…
<이 언니의 귀촌> 전남 해남에서 3년차 농부가(하)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귀촌 후 나의 유일한 직업은 ‘농부’

 

아직 농사일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누군가 나에게 하는 일이 무어냐고 한다면 나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농부’라고 할 것이다. 스스로를 농부로 칭하려고 하는 이유는 농사를 짓는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누구 앞에서든 당당하고 싶기 때문이다. 농사라는 일은, 그리고 농부라는 직업은 지금 세상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부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 세상 모든 일의 근본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농사라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 티끌만한 씨앗이 커다란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과정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홀로 밭에 앉아 김을 매는 시간은 도시에선 느끼기 힘든 고독한 평화를 준다.

 

▲  동네 어르신과의 대화를 통해 양파에 대해 알아가는 중.   © 혤짱 
 
지난 이년 반 동안 오직 농사를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농부가 귀촌 후 나의 유일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귀촌을 결정하면서, 농사로만 필요한 돈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왕 완벽한 시골에 가는 바에는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고 오롯이 농사를 지어보고 싶었다. 또 직장생활 하면서 모아둔 돈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당장 몇 년간은 돈을 벌지 않아도 크게 궁핍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도시에서보다 씀씀이를 훨씬 줄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일단 올해까지는 농사일에만 집중하면서 살 예정이다. 하지만 지난 이년 반 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1차 농산물 판매만으로는 필요한 돈을 충족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주변에 크게 농사를 짓는 분들-해남은 아직까지 농지가 많고 임대료가 싼 편이기 때문에 몇 만평씩 경작하는 분들이 많다-중에는 많은 수익을 내면서 안정적으로 생활하시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정말 밤낮없이 일한다. 그리고 사람을 잘 부린다.

 

나는 밤낮없이 일하며 돈을 벌기 위해 귀촌한 것이 아니다. 적게 일하고 적게 벌고 더 적게 쓰기 위해서 시골에 왔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적게 벌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이 썼다.

 

공동으로 농사짓고 분배하는 방식, 그래서 수입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하면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공동체 운영 경비와 수익 배분에 관한 것이다. 농사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 벌고 그것을 어떻게 나누는지에 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솔직하게 답해 오긴 했지만 답할 때마다 참 거시기 했다. 농부라는 직업에는 당당할 수 있었지만, 너무 적은 벌이에는 안타깝게도 당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세마을에 온 첫 해는 수익형 작물(우리 기준으로는 나름 크게 농사지어서 돈벌이가 될 만한 작물-미니단호박, 고구마, 무, 배추 등)은 공동으로 농사짓고, 남은 수익을 똑같이 나누는 방식을 택했다. 기존에 살고 있던 세 친구와 합류한 우리 셋까지 여섯 명이 함께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  첫 해 수확한 기형 당근들(당근은 시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무조건 쭉쭉 뻗는 줄 알았는데)   © 혤짱 
 

농사라는 일의 특성상 파종 시기에 돈이 많이 들고, 수확해서 농산물을 판 이후에야 돈이 수중에 들어온다. 우리는 봄 농사에 필요한 돈을 계산해서 각자 가능한 만큼 자유롭게 돈을 내는 방식으로 농사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봄 농사를 통해 번 돈으로 가을 농사를 짓고 가을 농사까지 완전히 끝난 다음해 초에 남은 돈을 나누었다. 생산한 농산물 중 일부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에 출하하고 일부는 직거래로 판매했다.

 

농사에 들어간 경비와 생활에 필요한 경비(공과금 및 식비, 난방비 등)를 제하고 나니 각자에게 돌아간 돈은 백만 원 남짓, 한 달에 십만 원꼴이었다. 공동생활에 들어간 경비가 월 평균 육십만 원 정도였으니 이것도 일인당 십만 원꼴, 즉 우리는 한 달에 이십만 원 정도의 돈을 번 셈이었다.

 

도시에서보다 훨씬 적게 일했고, 야근도 없고, 여름과 겨울 휴가가 빵빵 했지만, 그래도 왠지 억울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밭에서 보낸 시간이 얼만데 한 달에 고작 이십 만원이라니…. 일년 일하고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이 남들 한달 급여보다 적은 백만 원이라니….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다음 해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음 해는 여덟 명이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역시 농사는 함께 지었지만 분배 방식은 바뀌었다. 일년 농사가 끝나고 한꺼번에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고정적으로 한 달에 십만 원씩 나누었다. 십만 원을 나누기 위해 필요한 초기 자금은 가능한 만큼 자유롭게 내었고 나중에 돌려받았다. 공동체가 축적해 둔 종자돈이 없으니 자기 돈을 일단 내고 분할해서 받는 셈이기도 했다.

 

농사에 필요한 자금은 지리산닷컴에서 시작한 “맨땅에 펀드” 방식으로 선불 꾸러미(꾸러미를 원하는 소비자에게 선불로 일정한 금액을 받고서 일년 간 제철 꾸러미를 발송해준다)를 통해 충당했다. 일년 농사를 정산하고 남는 수익이 있으면 더 나누기로 했지만, 다음 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는 남겨두어야 했다. 그러고 나니 더 나눌 돈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절임배추일을 해서 번 돈의 일부를 개인 수익으로 나누어 최종적으로 일년 수입은 백오십만 원 정도가 되었다.

 

돈벌이와 자존감 사이에서

 

이년 농사를 짓고 깨달았다. 이렇게 농사를 지어서는 그 이상의 돈을 벌 수는 없다는 것을. 그것은 자유로운 실험 공동체를 표방하는-지금까지 어떠한 목적이나 지향하는 가치가 따로 없는-미세마을이 지닌 한계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농사일이 우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농사 이외에도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누군가는 눈에 보이는 일이 중요하지만, 누군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에 더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보니 각자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  해남의 가을농사에서 빠질 수 없는 귀한 작물!  배추 수확 중   © 혤짱 
 

또 하나, 더 큰 규모가 더 큰 수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구성원이 늘어난 것과 더불어 더 큰 수익을 내기 위해 둘째 해는 첫 해보다 더 큰 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마을 주변에서는 빌릴 수 있는 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밭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관리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수확할 거리가 전혀 없는 밭도 많았다. ‘문전옥답’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뼈저리게 느낀 한 해였다.

 

농사 규모가 커짐에 따라 필요한 농사 자재도 늘어났지만, 우리에게는 수많은 농사 자재를 제대로 관리할 장소도, 여력도 없었다. 많은 것들이 일회성으로 소모되고 다시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수입은 늘어났지만 그에 비례해 지출도 늘어났다. 결국 남는 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삼 년 째인 올해는 지난 이 년보다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또 다른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수익형 농사를 한 명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한편, 나머지 구성원들은 각자 원하는 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돈을 받는 방식이다.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하고 진행하는 데에서 오는 피로감을 덜고 구성원의 사적인 시간과 영역을 좀더 보장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방식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 말했다. 농사로는 돈벌이를 하면 안 된다고. 농사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짓고 남는 것은 그냥 나누고 돈벌이는 다른 것으로 해야 한다고. 그래야 자존감을 지키며 살 수 있다고. 농부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며 살기 위해 앞으로는 ‘반농반X’의 길을 모색해야 할까. 어찌되었든 ‘전업농’으로 계속 살기는 힘들 것 같다.

 

우리에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사실 공동체살이에서 가장 힘든 문제는 돈이 아니다. 매우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생기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지난 이년 반 동안 함께 살면서 생겨났던 이런저런 어긋남은 결국 구성원들 사이에서 풀기 힘든 숙제로 남아 앙금이 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거의 알지 못했던 사람이든 혹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든 간에-과 매일같이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일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이 나를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할 지, 이곳에 오기 전에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수많은 고민의 밤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이상, 아니 가족이라고 해도 사람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아가기에 우리는 너무 미성숙한 존재들이다. 서로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유지한 채 살아가려면, 각자가 최소한의 신비로운 영역은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  시골살이에서 누리는 최고의 호사. 찻주전자가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는 시간   © 혤짱 
 

물론 공동체이기 때문에 다행스러운 일, 좋은 일들도 있다. 보통의 시골 마을이라면 젊은 여자들의 등장은 엄청난 관심을 끌 일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은 공동체라는 울타리가 있기에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아무래도 자유로운 편이다. 또한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마을에서 요구되는 많은 품일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농사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늘어나는 편이고 거절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농사는 혼자 짓는 것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쳐 짓는 것이 낫다. 서로의 다른 성향이 부딪힐 때도 많지만, 일에 있어서는 보완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잘 살피고, 누군가는 삽질을 잘 하고, 누군가는 기계를 잘 고치고, 누군가는 힘이 세고, 누군가는 잘 갈무리한다. 농부를 이르는 말로 ‘백성백작’이라는 말이 있다. 백 가지 일을 하고 백 가지 작물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러기가 어디 쉬운가.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보완해 주고 남이 모자란 것을 내가 채워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미세마을과 미세마을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의 시골살이를 지탱하는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다.

 

따로 또 같이, 좀더 넓은 공생체를 꿈꾼다

 

나와 치자는 올해 초 미세마을 이웃에 있는 빈집을 어렵사리 구했다. 현재는 그 집에 살면서 집을 고치고 있는 중이다. 지난 이년 간은 정착을 할 것인지 또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인지 사이에서 고민했다면, 이제는 이곳에 어떻게 잘 정착할 것인가를 고민할 단계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미세마을에 속해 있지만, 미세마을을 포함해 좀더 넓은 단위의 공생체가 이뤄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각자 다른 삶의 형태를 존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생체 말이다.

 

미세마을이 위치한 만안리 웃마을에는 젊은 귀촌인 가구가 네다섯 가구 정도 있고, 원주민이 열 가구 남짓 살고 있다. 이 관계들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따로 또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필요에 따라 일을 돕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마음을 나누는 사이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분명 쉽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계속 농사를 지으며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귀농 삼 년 차,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길을 꿈꾸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려 한다.  혤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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