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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텃밭처럼’ 자급자족 농업을
<이 언니의 귀촌> 올해 2월 충남 부여에 온 신지연(하)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비를 기다리다
계속되는 가뭄에 땅에 호미질을 해도 호미가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 김장 채소, 배추, 무, 당근, 갓 등 여러 가지를 심어야 하는데 비는 안 오고 땅은 푸석거려 호미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있다.
올해 참 가뭄이 극성이다. 봄에 토종 생강을 심고 한 달이 넘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생강농사는 마음을 비워야 하는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심은 만큼이나 거둘 수 있을까? 토종 생강인데 씨앗 할 거라도 받아야 하는데, 그저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스마트폰에 날씨 관련한 어플을 세 개나 다운받아 놓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검색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 병해충 예방을 위해 돼지감자 우린 물을 주는 중. 토종 조선배추로 김장할 날을 꿈꾸며. ©신지연
딱딱한 땅에 호미질을 하다 안 되겠다 싶어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트랙터로 밭을 갈아달라는 부탁의 전화였다. 다들 바쁜 줄 알면서도 기계 하나 없는(기계는커녕 삽과 호미, 낫이 내 농기구의 전부다) 나는 염치없이 전화를 걸어 부탁을 했다.
다행히 농민회원 한 분이 오셔서 5분 만에 밭을 갈아 주셨다. 이제 하늘의 비를 기다리며 김장채소 심을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밭을 갈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온 고마우신 비님이라니… 어찌나 반갑던지, 비를 맞으며 가을채소를 모두 파종하니 너무 뿌듯했다.
지금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내 힘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전통농법, 생태농업을 잘 공부하고 실천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 기계나 외부의 투입이 필요한 농사가 아닌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그런 농사 말이다. 기계가 없으니 밭을 갈지 않고 농사짓고, 전통농사 방식대로 이것저것 섞어짓고 이어지으며 자급자족하는 농사야 말로 여성농민들이 가장 잘 지을 수 있는 농사가 아닐까?
땅을 일단 보고 나니 농사짓고픈 욕구에 압도돼
부여로 내려와 나의 농사는 정말 우연으로 시작되었다. 원래는 올 한해는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고 지역에 적응도 하고 그러면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성농민회 회원인 언니로부터 좋은 땅이 임대 나왔으니 농사를 지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근데 땅이 무려 천 평이란다.(혼자 농사짓기엔, 그리고 첫해 규모로는 너무 큰 땅이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땅을 보고 결정하자 마음을 먹고 가보았다. 산속 깊숙이 자리 잡은 땅을 보니 큰 규모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땅이 흔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덜컥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막상 땅을 보고 나니 농사를 짓고 싶다는 마음이 다른 어느 걱정보다 더 크고 강렬했다고나 할까?
▲ 고추, 토종물고구마 줄기, 토종옥수수, 토종수세미. 약을 치지 않았는데도 수확의 기쁨 가득히. © 신지연
천 평 규모의 땅에 농사를 짓는다 했더니 주위에서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서 어떻게 농사를 짓냐, 집에서 너무 거리가 멀다, 혼자서 하기엔 규모가 크다 등등. 걱정과 애정 어린 염려를 많이 해주셨지만, 농사짓기로 마음먹은 이상 주저하지 않고 우선 땅을 밭으로 만드는 일부터 돌입했다.
귀농인들에게 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집만큼이나 아니 집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게 땅일 거라고 생각한다. 돈이 많으면 땅을 구입하겠지만(실제론 시중가보다 훨씬 더 비싸게 구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농사지을 땅을 임대해서 쓰려고 하니 내가 원하는 규모, 내가 원하는 지역, 내가 원하는 용도의 땅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그래서 살면서 차차 알아보고 주위에서 적당한 땅이 나오면 농사를 지어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땅이 내 눈앞에 보이니 규모가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이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조건 탓하지 않는 나의 특성이 자랑스러울 때도 무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일단은 내려가자, 내려가서 알아보자! 라는 내 귀농의 첫걸음처럼 농사의 시작도 그와 똑같았다. 일단은 농사를 지어보자, 지으면서 알아보자!
그런데 막상 농사를 지으려니 막막했다. 그전에 농사지으시던 할머니가 어깨가 편찮으셔서 작년에 농사를 짓다 중간에 포기한 밭이었다. 비닐과 풀이 가득 차있는 천 평의 밭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원래 땅을 빌려줄 땐 작년 농사지은 것들을 정리해서 빌려주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질환 사정도 있고, 땅이 그저 필요한 귀농인 ‘을’이 되어버린 나는 작년 농사가 정리되지 않은 밭을 임대했고, 자연히 내 농사의 출발은 작년 농사 뒷정리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풀과의 사투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여성농민들의 새로운 실험, 농생태학 실습소
그렇게 얻은 천 평의 밭 중에서 3백 평은 전국여성농민회의 ‘농생태학 실습소’로 사용하고, 7백 평에 내 농사를 짓고 있다.
▲ 나의 지지자이자 후원자이자 친구이며 가족인 부여군 여성농민회 © 신지연
‘농생태학 실습소’는 식량주권을 실현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말 그대로 농생태학을 실천하는 농장이다. 요즘은 한 가지 작물만 심는 단작화(수박농사를 짓는 사람은 수박만 심고 다른 작물은 소비자들처럼 사 먹는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관행농이 농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유기농업조차 농약과 화학비료를 안 쓴다 뿐이지 친환경 자재, 비닐하우스 등 워낙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크고 들어가는 노동이 엄청나다. 일 년 동안 농사지어 종자회사와 농자재회사, 일꾼 품삯 등에 이것저것 떼이고 나면 결국 빈털터리가 되는 게 우리 농민들의 모습이다.
농생태학이란, 농민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첫 시작이다. 3백 평의 농생태학 실습소는 종자회사와 같은 다국적기업의 배를 불리는 농사가 아니라 내 먹을 것, 내 가족이 먹을 것을 자급자족했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의 텃밭 그대로, 전통적인 농사방법으로 농사짓는 곳이다.
농생태학 실습소는 첫째도 땅, 둘째도 땅, 땅을 살리는 농장이다. 동물들의 퇴비보다는 유기질 퇴비를 통해 땅을 살린다. 순환적인 농사 방법을 통해서 갈지 않아도, 고투입을 하지 않아도, 땅의 본연의 모습을 찾도록 하는 농사를 하려 한다.
땅을 갈지 않고 농사지을 수 있다면, 기계가 없는 나도 농사를 짓는데 있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립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태농업은 특히 혼자 농사짓는 여성들에게는 자립의 의미로 봐서도 더 절박하고 중요한 것 같다.
할머니들의 텃밭처럼 이것저것 없는 게 없으면서, 땅과 토종씨앗과 물과 햇빛으로 농사지으며 결국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그런 농사를 미약하지만 짓고 있다. 3백 평의 땅에 서른 가지가 넘는 토종작물을 심고, 땅을 살리기 위해 비닐을 씌우지 않고, 이어짓기와 사이짓기 등을 실천하고 있다.
▲ 농생태학 실습소의 지도위원이자 농사일, 전통음식 등을 내가 많이 배우고 있는 어머니. © 신지연
그러다보니 제일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은 풀 속에 작물이 파묻히지 않도록 하는 것, 즉 풀매는 것이 가장 큰 일이자 중요한 일이다. 풀이 자라나는 속도를 이길 수는 없다. 단, 풀로 인해 뭘 심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면 안 되니까 오늘도 밭을 박박 기어 다녔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제 점점 찬 바람이 불고 있고, 내가 이기던 지던 이제 풀이 자라는 속도는 여름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밭에서 일하고 있으면, 이 밭의 주인인 부녀회장님이 오셔서 “각시, 청승떨지 말고 이제 밭에서 나와, 그러지 말고 약을 쳐. 풀매다 젊은 각시 죽겄네, 이제 그만하고 나와” 하며 한낮 더위 때, 비올 때, 나의 생사를 확인할 겸 소리를 하신다.
“나도 처음부터 약친 거 아녀, 근데 70넘으니 안 아픈 데가 없고, 어깨도 고장 나고, 그래서 이제 약 쳐. 약을 쳐야 내가 살어, 긍께 각시도 그만 풀매고 약 쳐, 안 그러면 몸 버린다니까.” 이렇게 말씀을 하시지만 간간이 오셔서 농사 지도도 해주시고, 나의 말벗도 되어주시는 부녀회장님, 가장 든든한 농사후원자로, 어쩌면 미래의 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라니와 밀당하며…생활도 농사도 자급자족
7백 평의 내 밭엔 무농약 농사를 짓지만 비닐을 씌웠다. 천 평을 다 비닐 없이 농사짓는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콩을 심은 이유는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작물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어느 작물이 맞는지, 나한테 어떤 작물이 맞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사실 콩 농사를 7백 평 지어가지고는 소득이 2백만 원이 조금 넘으면 다행이라 할 정도로 돈이 많이 되는 작물은 아니다. 하지만 첫농사라서 무엇보다 땅을 살리는 게 우선이라 생각되어 콩을 심었다.
▲ 콩이 이렇게 주렁주렁 열렸건만, 고라니야 제발 우리밭에 그만 와! ©신지연
산속에 있는 밭이라 고라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쳤는데, 배고픈 고라니는 보란 듯이 내 콩밭을 드나들었다.(게다가 고라니는 콩을 매우 좋아한다.) 이들이 내 콩잎을 마구 따 먹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나는 2중망을 치고, 황토유황 찌꺼기를 밭에 뿌리는 정도로 예방하고 있다. 그런데 고라니는 2중망까지 뚫고 들어와 가끔 밭에서 조우하기도 한다. 고라니와 밀당이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제발 고라니가 내 콩을 다 먹지만 말기를 기도할 수밖에.
“뭘 먹고 살래?”
정작 나는 태평한데 주위 분들은 걱정이 한 가득이다. “아이들 둘이나 혼자 키우면서 뭐 먹고 살겨?”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촌에서 굶어죽기야 하겠어요?” 말하며 배시시 웃는다.
실업급여 생활이 끝났고, 콩이 수확되려면 한 달이 넘게 남았다. 신기하게도 별다른 벌이가 없는 상태에서 한 달을 살았다. 고정 수입이라곤 군에서 나오는 아동양육비 10만원과 농생태학 실습소 관리비로 받는 15만원, 아동급식비 6만원이 전부인데 말이다. 물론 내 콩밭에서 일을 하고 남는 시간 짬짬이 남의 집 농사일을 다니며 일당 벌이를 하고 있지만 금액이 크진 않다.
서울 생활을 할 때에도 한 달에 140만 원 정도만 쓰며 살았으니, 농촌에서는 1백만 원으로 살아보자고 계획을 세웠다. 되도록 안 쓰고 나머지는 자급자족하자는 것이 나의 신조다. 우리 세 가족 살림을 줄이고 줄여도 아직까진 1백만 원을 약간 초과하고 있다. 더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는지 매일 궁리한다.
그러다보니 몸이 고달프다. 밭에서 가지고 온 채소들을 다듬고,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해먹고, 햇볕에 말리고, 보통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낮에 밭에서 일하고 몸이 노곤해 딱 눕고 싶은데 밤새 고구마 줄기를 다듬고 깻잎김치를 담그고…. 돈 없이 농사를 지으려니 해충 약도 돼지감자즙을 우린다던지, 자연에서 나는 재료로 쓰고 있다. 그야말로 사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살기로 작정했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혼자서 농사짓는 여성농민으로서 나의 실험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주위 분들의 응원 속에, 아직은 많이 서툴지만 나의 경험과 실천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계속 실험중이고 실천중인 나의 삶. 나 스스로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 신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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