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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귀농이야기
<이 언니의 귀촌> 올해 2월 충남 부여에 온 신지연(상)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근데 왜?”

다시 농촌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겠다 했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농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농사가 어려운 것도 알고, 농사 지어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농촌 지역이 어느 곳보다 보수적이라는 것도 알면서 왜, 그것도 아이 둘을 데리고 여자 혼자서 농촌에, 농사를 지으러 가려고 해?

 

시간을 거슬러 16년전 농사를 지으러 가겠다고 했을 때는 이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 모두들 내가 농민운동을 하러 농촌에 내려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려니 했다. 대학 시절 봄여름가을겨울 빠지지 않고 농활을 다녔다. 대학 2학년 때 일찌감치 나는 농사를 지으러 농촌에 갈 거라고 결정하고, 농촌이 고향인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그렇게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시 16년이 지난 지금, 남편과 사별 후 1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돌싱(돌아온 싱글)의 몸으로 아이들까지 데리고 농촌에 가냐고.

 

가진 거라곤 없지만, 내겐 삶의 결정권이 있어!

  

▲ 아이들과 함께 토종콩 심기. 든든한 일꾼이자 동반자인 아이들.  © 신지연 
 

스물다섯 살, 농촌에 내려가 농민회 간사 활동을 1년 정도 하고 바로 결혼을 했다. 남편은 그 지역 토박이였으며, 부모님께 물려받은 축사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었고, 집도 있었고, 농사를 지을 땅도 있었고,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결혼하자마자 나는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처럼 적응도 빨랐고, 현지인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새댁이 마을에 들어왔다며 전폭적인 사랑을 주셨다. 그 힘으로 마을이장까지 하는 영광(?)을 누렸으니 나름 꽤 성공한 농촌 생활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내가 다시 농촌에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당장 어느 지역으로 가야 할지, 집은 어떻게 구해야 할지, 땅은 어떻게 구하며 농사는 무얼 지어야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정해진 것 없는, 안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나는 땅도 없고, 농가주택이 아닌 연립주택에 살고 있으며, 아는 사람도 여성농민회 사람들 외에는 별로 없다. 16년 전에 비하면 정말 가진 거라곤 내 몸과 두 아이들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여성농민회에서 일을 했으니 갈 곳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겠다 했지만, 막상 내려갈 준비를 하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막막했다. (물론 다른 분들보다는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없고 지금은 있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농사짓고 싶은 대로, 내가 무엇을 심을지, 어떤 농사를 지을지, 어떻게 살지 모든 걸 내가 오롯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삶에 대한 결정권, 내 농사에 대한 결정권! 생각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벅차 오른다.

 

그랬다. 그 시절엔 내가 무엇을 심고, 어떻게 농사지어야 할지 고민하기보단 어머님이 심어놓은 콩밭에 풀을 매라고 하면 풀을 매고, 어머님이 심어놓은 고추밭에 탄저병 농약을 치라고 하면 농약을 치고, 여성농민으로 내 농사를 내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님이 농사지은 밭에 어머님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자 임무였다. 제초제를 안 쳤으면 좋겠다는 며느리의 의견에, 어머님은 치기 싫으면 당신이 치겠다 하며 농약통을 들고 나가셨다. 난 그저 ‘보조자’, 그게 8년차 여성농민의 삶의 이름이었다.

 

큰애가 초등학교 졸업하는 2015년을 기약하다

 

8년 여성농민의 생활을 접고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9년이 흘렀다. 서울로 올라왔을 땐 다시 농사를 지으러 내려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남편과 사별 후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파있었다. 전국여성농민회에서의 활동은 그런 나에게 새로운 활력과 살아가는 힘을 주었다.

 

사무국장이라는 이름으로 만 8년의 시간을 여성농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생활하며 보람도 많았고, 삶의 주인이자 생산의 주인, 실천하는 여성농민에 대한 애정은 깊어만 갔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한 가지, 그건 바로 내가 ‘여성농민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마음은 커져만 갔다.

  

▲  전국여성농민회 활동은 나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었다.   © 신지연 
  

마음먹은 것은 미적거리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냥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할 수 있도록 움직이자’ 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실행에 옮기려면, 먼저 아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급한 문제였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세 살, 다섯 살부터 서울생활을 했던 아이들. 둘째는 흔쾌히 오케이 했지만, 큰 애는 조건을 붙였다.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졸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난 큰애의 바람을 약속하겠노라 했다. 그럼 내가 귀농하는 시기는 2015년이라고 못박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준비는 쉽지 않았다. 귀농을 하려면 시간을 가지고 지역을 결정하고, 살 지역의 집과 땅 등 여러 가지를 알아보아야 하는데, 일을 병행하면서 귀농을 준비하기란 만만치 않았다. 올해 1월까지 일을 하고 2월에 이사를 왔으니 본격적인 준비는 두 달이 채 못 미쳤다.

 

충남 부여, 마당이 있는 연립주택으로

 

내려갈 지역을 결정하는데 크게 세 가지를 중요하게 고려했다. 첫째, 여성농민회가 있는 곳(또는 여성농민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둘째, 내가 내려가 지역 사람들과 함께 여러 가지를 도모할 수 있는 곳, 셋째, 도농복합 지역보다는 농업이 주된 지역이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충남 부여는 여성농민회도 있고, 농촌 지역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인 나와 함께 고민하고 미래에 대한 그림을 함께 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처럼, 많은 문화유적지가 있어서 다른 곳보다 난개발이나 농공단지가 적은 곳이다.

 

몇 번을 내려와 살 집을 알아보았지만 생각만큼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결국 읍에 아주 오래된 연립주택을 얻었다. 많이 아쉽긴 했지만, 처음부터 완벽히 준비하는 것보다 먼저 내려와 살면서 이것저것 차근차근 준비해야 제대로 정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올 2월말 이사를 했다.

 

마당이 있고,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 게 소원이었던 아이들은 빨리 마당 있는 집을 알아보는 걸 조건으로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아무리 봐도 착한 아이들이다.

 

내려오면서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우선 서울생활로 망가진 몸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미리 준비를 못했던 만큼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차근차근 준비할 것, 아이들과 저녁이 있는 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

 

하지만 다섯 달이 지난 지금, 망가진 몸은 고된 농사일로 회복이 되는 건지 단단해 지는 건지 잘 모르겠다. 차근차근 준비하려던 계획은 농사를 빨리 짓고 싶다는 마음에 천 평짜리 밭을 덜컥 임대하는 용감무쌍한 행동을 벌였으며,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저녁이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은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나의 만족도도, 아이들의 만족도도 가장 높은 것이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  농사지을 밭에 비닐을 벗기고 트랙터로 두둑을 만드니 제법 밭 모양 같아졌다.   © 신지연 
  

‘기승전 연애’ 얘기는 좀 부담스럽지만…

 

이사를 하고, 지역 여성농민회와 농민회 분들에게 인사 드리고, 실업급여로 당분간의 생계는 가능하니 몸의 회복을 위해 요가학원을 등록하고, 당분간 주변 분들의 하우스나 밭에서 일하며 농사일도 배우고 생계도 꾸리고 하는 것이 이사 후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다시 예전의 내 과거, 나의 처지 등을 소개하는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워낙 새로운 사람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처음부터 많은 것들을 물어보시고 많은 것들을 얘기하신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한 가지, “좋은 사람 만나야지~”를 인사처럼 하신다. 그럴 때마다 멋쩍은 웃음으로 때우거나 아니면 “좋은 사람이 없네요” 라고 말하거나, 상황에 따라 그 대응 방법은 조금씩 달라지는데 언제까지 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지 심각한 걱정은 아니지만 고민이 살짝 든다.

 

나는 어떤 농사를 지을 건지, 어떻게 살 건지, 뭐 이런 류의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이야기의 끝이 ‘기승전 연애’라 고민이 들지만, 또 한편으론 나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리라 생각도 해본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나를 드러내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은 부대끼긴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게 마음 먹는다.

 

꾸준히 하기로 맘먹은 요가학원은 3개월이 되던 달이 농번기로 접어들면서 거의 나가지 못했고, 주위 여성농민회 회원들의 하우스나 밭에서 일당을 받으며 일을 몇 번 했는데 같이 일하는 어머님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속도에 기가 죽기도 하고 동일임금을 받기가 민망키도 하고…. 그러다 내 콩밭이 풀들로 난리가 나면서, 일을 나가는 것도 접고 내 콩밭의 고랑 풀을 매며 기어 다니는데 전념하게 되었다.

 

이제 실업급여의 생활은 끝이 났다. 아직 농사의 수확물이 나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데 하루하루 어찌 살아야 될지 생계의 문제가 돌덩이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조바심이 생기지 않는 건, 여기선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지, 라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신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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