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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시골마을 담배가게 아가씨가 되다
<이 언니의 귀촌> “너 같은 애가 더 오래 살게 될걸”(상)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동경도, 계획도 없이 제주에 온 지 어언 2년

 

“너 같은 애가 더 오래 살게 될걸.”

 

한 석 달만 제주에 있어야지, 하고 내려온 나는 언제나 ‘곧 돌아갈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는 그저 휴가를 지내러 온 것뿐이었고, 이곳에서 지내는 석 달 동안 시골살이의 불편함을 토로하며 필요한 모든 것이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도시의 편리함을 내내 그리워했다.

 

나의 행태를 본 ‘이주 선배’들은 곧잘 저런 말을 내게 하곤 했다. 그때마다 득달같이 소리 높여 얘기했다.

“곧 돌아갈 거야!”
 

           ▲  여름 제주 바다   © 쇼코 
  

그렇게 2년이 흘렀다. 내려오기 전까지 제주도는 그저 부모님의 빛 바랜 사진 속 신혼여행지였을 뿐이고, ‘제주도 여행갈 바엔 돈 좀더 보태서 해외로 가는 게 낫지’라고 주창하던 내가, 이곳 제주에서.

 

어쩌면 저 말 속의 ‘너 같은 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포부도, 계획도 없이, 더군다나 제주에 대한 특별한 환상이나 기대가 없던 ‘너 같은 애’였기 때문에.

 

저렴한 방에 혹해 시작된 제주살이

 

시작은 그랬다.

 

퇴직금을 털어 여행을 잔뜩 하고선, 이제 회사에 다시 복귀해야 하나 싶은 때. 그래도 얼마 간이라도 그 시기를 늦추고 싶어 수중에 남은 넉넉지 않은 돈으로 택할 수 있는, 직장과 가장 멀고 돈이 적게 드는 여행지가 제주였다.

 

이곳에서 지내며 삼일만 더, 일주일만 더…. 자꾸 날짜를 연장하는 내게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어느 날 언질을 주었다.

 

“제주는 연세라는 개념이 있어서 아주 방을 싸게 얻을 수 있어. 더군다나 이런 시골은 그 금액이 더 저렴하단다.”

 

그때만 해도 이주민이나 관광객의 유입이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였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어차피 게스트하우스 날짜를 계속 연장하는 것도 부담이었는데, 싼 방을 구할 수 있다니! 이왕 있을 거 방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어 그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으로부터 할머니 혼자 사시는 슈퍼에 딸린 작은 방을 소개받게 되었다.

 

           ▲   시골에 안어울리는 옷차림.  © 쇼코  

 

그저 일상으로 복귀 시점을 늦추고자 하는 마음, 지금 거기만 아니면 어디든! 하는 말도 안 되는 심정으로 덜컥 그렇게 제주에 방을 얻게 된 것이다.

 

만약 그때 제일 싼 방이 부산에, 혹은 통영에 있단다 라고 했으면 지금 나는 부산이나 통영에서 ‘아, 내가 벌써 이곳에서 2년을 맞았구나’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이유가 없는 나의 제주살이는 그렇게 그저 저렴한 방에 혹해 시작되었다. 작은 쪽방이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몇 달 후 곧 돌아갈 거니까. ‘너 같은 애가 더 오래 살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결혼했다고 얘기해라”

 

제주의 시골마을은 섬의 폐쇄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주민들이 조금씩 유입되고는 있었으나 원주민들은 이들을 ‘육지 것’들이라 부르며 선을 긋고 있었기에 생판 모르는 제주 할머니와 나의 처음은 그리 쉽지 않았다.

 

방을 얻기로 하고 나서 짐도 다 들였건만 ‘외지인은 절대 들일 수 없다’는 자식들의 성화에 할머니는 얼마 안돼 다시 방을 비워달라 하셨다.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기 때문에 자식들의 성화가 이해는 되었지만, 왜 내가 못 믿을 사람 취급을 당하며 오밤중에 쫓겨나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야 하는가 서러워서 그 밤, 바다를 향해 눈물을 쏟아냈다.

 

다행히 며칠을 같이 지내며 정이 들었는지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자식분들을 설득하셨고, 덕분에 오밤중에 쫓겨나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  슈퍼집 할머니와 나.  이 슈퍼는 동네에서 하나뿐인 담배가게다.  © 쇼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할머니의 슈퍼 일을 종종 돕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그곳이 동네의 유일한 담배가게였기 때문에 나는 졸지에 ‘담배가게 아가씨’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몰래 내방 문틈으로 속삭이시는 거다. “너 어디 가서 여기 산다고 하지 말고 잠깐 놀러 온 내 조카라고 해라. 내가 너 결혼했다고 얘기했으니 누가 물어보면 꼭 그렇게 얘기해라.”

 

작은 동네에 여든 넘은 할머니가 45년째 담배를 파셨는데, 어느 날 등장한 젊은(할머니보다 훨씬!) 아가씨에게 동네 어르신들의 관심이 집중 포화되었던 것.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가 혼자 내려와 산다는 것이 어떤 이야기 거리들을 생산해내는지 몰랐기에, 나는 그저 쫓겨나지 않기 위해 “네” 하고선 결혼한 후 잠시 내려와 이모 일을 도와주는 조카로 포장되었다.

 

전투적인 관계형성 방정식이 통하지 않는 곳

 

그런 할머니에게는 내가 도시에서 살면서 무장하고 날을 세웠던 ‘나한테 뭘 원해서 이러시나’ 하고 재고 가르던 ‘전투적인 관계형성 방정식’이 통용되지 않았다.

 

내 선을 넘어오면 정확히 짚어내 ‘여기까지입니다’라고 선을 긋고 정색하던 나인데, 할머니는 도배를 끝낸 내 방을 온 동네 어르신들을 불러 구경시켜 나를 뜨악하게 했고, 밤중 아무 때나 내 이름을 불러대 한숨 쉬게 만드셨다. 낯설고 불편했다.

  

            ▲ 시골의 삶은 동물과의 관계도 밀착시켰다.   © 쇼코  

 

그러나, 그때 얼굴을 비춘 할머니 친구분들은 양파나 마늘을 무심히 던져주고 가셨고, 밤중에 나를 부르는 할머니는 이웃이 주고 간 낙지를 삶았다며 내 입에 기어이 넣어주셨다. 나 또한 할머니가 시내로 목욕 가신 날은 슈퍼를 대신 봐드리게 됐고, 셈이 힘든 할머니에게 계산기 사용법을 가르쳐 드리게 됐다.

 

그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탁을 받는 일이 아무렇지 않았고, 나의 부탁 역시 폐가 되지 않는 삶. 제주에 있다는 이야기에 주변에서는 좋은 바다 맨날 보고, 공기 좋은데 사니 얼마나 좋으니? 라는 말들을 해온다. 그러나 직업적으로 출장이 잦았던 나에게 자연이 새로울 것은 별로 없었다. 나에게 새로운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 태도였다.  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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