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친환경 딸기잼, 단순하고 정직한 성취
<이 언니의 귀촌> 정읍에서 딸기잼과 토종생강차를 만드는 황미경②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시골서 아이와 뭘 해서 먹고 살까

 

▲  내 체력은 바닥 급, 시골은 육체노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오는 곳이라는 선입견은 버려도 좋다.   © 황미경 
 

이곳에서 내 별명은 자칭타칭 ‘망사’다. 구멍이 너무 많아서 존재 자체가 구멍의 연속이라고… 그리고 도시에서 내 체력은 완전 바닥 급이어서, 몇 걸음 걷다가 헥헥 거리거나 토하기 일쑤였다. 일 머리 좋고, 손 야무지고, 힘차고, 잽싸고, 뭐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다. 일하는 걸 보면 느릿느릿하고 어리숙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서 마을 친한 할머니는 날 보며 “아고 폭폭혀(깝깝혀), 아고 폭폭혀!”를 연발하신다. 그러나! 어쨌든! 결과적으로다가! 뭔가를 끝내는 걸 보고는 “아이고 거 참”하며 웃어넘기신다.

 

그러니 내 말은! 시골은 육체노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오는 곳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셔도 좋다는 뜻. 그 산 증인이 바로 나라는 말씀을, 용기를 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내 경험이 그러해서겠지만, 사람들이 시골 가려면 뭘 준비해야 하냐고 물을 때면 난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만 없으면 돼요” 라고 답한다.

 

이혼 절차를 마치고 맘속에만 그리던 시골생활을 하려고 무작정 도시를 떠나온 것이니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사전 준비나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다만 내려오면서 몇 가지 삶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세우게 되었다.

 

1.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니 일에 압도되지 말자. 적당한 수입에, 적당한 규모의 노동을 하자.

2. 시골일로 먹고 살자. 자연에 살고 싶었으니, 컴퓨터 앞에서 씨름하거나 사람들 속에 부대끼는 일을 업으로 삼지는 말자.

3. 최대한 자연의 흐름에 맞게 생활하자. 해가 뜨면 일하고 지면 하지 않고. 겨울철에는 쉰다.

 

그리고 수입을 마련하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방향을 잡았다.  

 

1. 여자 혼자 해나갈 수 있어야 하니까 일의 규모에 비해 부가가치가 높은 농산물 가공을 하자.

2. 우선 기초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니까 하고 싶은 일을 우선으로 하기 보다, 판매망을 염두에 두고 판매가능성 높은 것을 먼저 안정화 시키자. 후에 하고 싶은 것을 안정화하자. (내게 수제 딸기잼은 기초생활비를 위한 것이었다. 하고 싶은 것은 처음 야생차에서 훗날 토종생강차로 정리되었다.)

3. 삼 년을 내다본다. 일 년은 제품 계발을 하고, 이 년째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을 가늠하며 판매망을 늘리고, 삼 년째엔 기초생활비 수준으로 만든다! 이 년 동안 부족한 생활비는 시골일로 아르바이트하거나, 도시에서 가져온 전세비를 조금씩 쓴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니 전망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호자로서 아이가 제대로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오해는 마시길, 시골생활 3년 만에 이루자고 처음 다짐했던 월 목표액은 100만원이었다. 지출이 도시보다 적었으니까 아이와 함께 살기로 이 정도면 된다고 보았다.

 

일을 해나가다 보니 3년차에 100만원보다 조금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젠 토종생강차도 함께 만들고 있고, 6년차인 지금은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앞으로 아이 공부시키며 나도 민폐 없이 살 수 있겠다 싶은 정도로 번다. 바라던 바대로 도시에서처럼 일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또 시골 일만 하면서 말이다.

 

딸기 100kg으로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다

 

그리하여! 시작하게 된 일이 친환경 수제 딸기잼이다. 도시에서 아이를 공동육아에서 키웠다. 전국에 50여개의 공동육아 어린이집 홈페이지가 있는데 그곳을 통해서 딸기잼을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어느 어린이집 졸업조합원이라는 것만 밝히면 신원이 확인되는 거니까 믿고 사 줄 것 같았다.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늘 새로이 모이는 곳이므로,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으로 맛만 있다면 지속적으로 판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어린이집에서 재정 사업으로 하던 딸기잼이 생각났다. 친환경 딸기는 인근 하우스에서 사오면 됐고, 큰 시설 없이 냄비와 불, 주걱만 있으면 만들 수 있었다.

  

            ▲  친환경 수제 딸기잼 만들기에 도전하다.   © 황미경 
 

문제는 차별성이었다. 내가 대량 생산할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통망이 빵빵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슈퍼에서 손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인데 계절을 기다리고 택배를 시켜 사먹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므로, 그만큼 재료도 좋고 맛도 무조건 좋아야 했다.

 

근데 난 한 번도 딸기잼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냥 무조건 만들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 뿌려진 정보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이때 알았다. 사진들은 그럴 듯한데 말이다. 고급정보는 딸기밭 주인들에게서 나왔다. 딸기잼을 많이 만들어보셨으니까. 만들고 묻고, 만들고 묻고를 반복했다. 일정한 수준이 지나서는 일반 농가에서 만드는 것과도 차별성이 있어야 하니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그렇게 첫 해 실험용으로 쓴 딸기가 100kg이었다.

 

이 과정이 이곳 귀농자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웬 아줌마가 무식하게 저게 뭐 하는 짓이다냐 했을 것이다. 하루는 마당에서 딸기꼭지 따기만 꼬박 4시간을 하고 있으니, 보다 못한 한 언니가 새벽에 밭에서 딸기를 가져올 때 자기 집에 들러 같이 따자고 했다. 그래서 꼭지 따는 일이 2시간으로 줄었다. 시간이 될 때면 사람들이 찾아왔다. 뭐 도울 일 없냐면서. 그리고 이 문젠 어떻게 해결할지, 또 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같이 의논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갑론을박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최종 결정한 당시 레시피의 결론을 간추리면, ‘딸기는 잼용이나 냉동딸기를 쓰지 않고 바로 수확한 먹기에 싱싱한 생딸기만 쓰고, 딸기함량은 71.7%로 하고, 2-3병 정도만 나오게 작은 냄비에 조금씩 만든다’ 이다.

 

내 결정을 말하는 날, 사람들이 난리였다. '제 정신이냐, 예술하냐, 그래서 먹고 살겠냐?' 하지만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먹어보면서 이렇게 해야 맛있다는 걸 직접 봤으니까.

 

다음 문제는 현실성이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가격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 논쟁은 더욱 뜨거웠는데 '최소 얼마 이상은 받아야 한다. 아니다 그건 너무 비싸다. 아니다 그건 넘 싸다' 등등. 난 이런저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공장재 친환경 딸기잼들과 비슷한 값을 받길 원했다. 그건 직거래니까 가능했는데, 내가 생각한 가격 정도면 왠지 먹고 살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집에 놀러 온 도시 사는 친구가 한 병 들고 가서 직장 동료들에게 맛 보이고 물어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동료들이 자기라면 그 가격에 사겠다고, 훌륭하다고 했다고….

 

그 전화를 받고 기뻐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 됐다. 시골에서 먹고 살 수 있겠구나! 이곳을 떠나지 않겠구나!

 

그렇게 해서 3년이 되는 해에 안정적으로 목표를 이루었다. 시설이 없으니 수제로 접근하고, 물량이 적더라도 품질로 차별성을 갖고, 직거래라면 비싼 가격이 아니라도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통했다.

 

등허리 휘는 시작에서 안정적인 단계로

  

▲  딸기잼은 입소문을 통해 전화 판매만 하고 있다.   © 황미경 
 

보통 4,5월 딸기잼을 만들고 냉장보관하며 가을까지 판매했다. 실제 판매해보니 염두한 판매망이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지인들의 도움이 훨씬 컸다. 난 지금도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운영해 판매를 하지 않고 입소문 들은 분들에게 전화 판매만 한다. 지인들이 맛을 보고 나서 동료와 이웃에게 적극 홍보해주고 공동 구매도 해주었다. 지금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 지인의 지인으로 그의 지인으로 넓혀가서 많은 부분 내가 모르는 분들이 구입해준다. 그야말로 덕/분/에 살았다! 만들 때도 그랬고 판매하는 것도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이 일을 하면서 등골이 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처음엔 요령을 몰라 힘들게 일했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차츰차츰 경험이 쌓이면서 일 요령도 생기고 시행착오도 줄어들었다. 시골생활 하면서 몸도 재탄생에 가깝게 건강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젠 동네 할머님 두 분이 딸기꼭지를 따주시고 작업동지 언니와 함께 씻고 끓인다. 그래서 지금도 딸기잼 만드는 철엔 몸과 맘 집중해서 일하고, 몸이 고되긴 하지만 초기처럼 힘들지는 않다. 그리고 시골 일은 일이 집중되는 철이 있는 것이지 늘 그런 것은 아니어서 흔쾌히 감수할 만했다.

 

딸기잼 일을 하면서 몸으로 하는 일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단순하고 정직한 성취가 좋았다. 불교에서 수행의 기초 중 하나로 ‘몸을 조복 받는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몸을 이겨내고 몸으로 하는 일에 단단해지니 막연한 두려움이 줄고 그만큼 자유로워졌다.

 

첫 해, 몸은 힘들었지만. 초록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면서, 새소리를 들으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었다. 딸기라는 자연물을 상대로 일하는 것도, 높은 집중을 요하는 불 일도 참 매력적이었다.

 

소규모 밭농사로도 생활에 보탬이 된 토종생강차

 

▲   토종생강은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 황미경 
 

두 번째 품목은 친환경 토종생강차였다. 이사를 오며 처음 해보고 싶었던 건 야생차나 야생효소였지만, 막상 이 산 저 산 채집을 다녀보니 멧돼지가 무서웠다. 뱀은 대비를 해보겠는데 돌진하는 멧돼지는 대비가 안 되겠더라…. 그러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농사와 토종생강이다.

 

토종생강은 귀농 초기에 했던 공동 농사 중심작물이었는데, 우리 밭 토질에도 잘 맞아서 계속 짓고 있다. 2년 전부터 전량 차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생강은 연작피해가 있어서 한 해씩 자리를 바꿔줘야 한다. 그래서 작업동지 언니와 700평 땅 반에는 토종생강을, 나머지 반에는 들깨나 콩처럼 편한 작물을 농사지으며 한 해씩 자리를 바꿔준다.

 

매일 따먹는 오이, 고추, 가지 등은 마당에 조금씩 심는다. 봄에 밭 가는 건 이웃마을 아저씨가 기계로 해주시고, 밭 만들고, 덮개하고, 거름 주고, 풀 메는 일 등은 언니와 나 둘의 손으로 한다. 생강을 심거나 거두는 날에만 일손이 많이 필요해서 친구들이 오거나 하루 정도 할머님 2-4분을 모신다. (시골에서는 할머니들이 베테랑 일꾼들이다.)

 

생강은 농사짓기 어려운 작물이 아니다. 물 빼기를 잘 해주고, 풀 메기와 거름주기를 때 놓치지 않고 열심히 해주면 되는 작물이다. 토종생강은 개량종에 비해 은은한 맛이나 효능이 뛰어나지만 수확량이 적고 다듬기가 어려워 시장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한살림이나 생협 등 친환경 유통망에서는 찾기 어렵다. 그래서 농사를 지어 차로 만들면 일찌감치 모두 판매된다. 직접 농사지은 수확물을 가공하니 적은 규모 농사도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양을 늘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지금이 우리에겐 적당하다.

 

적은 규모라 농사라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토종생강은 내가 꾸준하게 밭농사를 짓게 해준 고마운 작물이다. 이 적은 걸 하는데도 몸 익숙해지는데 3년이 걸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할머니들 보시기에 여전히 폭폭하고 웃음 짓게 하지만 말이다.

 

시골에서 노후걱정을 안 하게 되는 이유

 

언젠가 동생이 “언니는 언제가 제일 행복해?” 라고 물었다. 난 “가을에 밭에서 들깨 털 때”라고 답했다. 게으르기 이를 데 없는 농부가 이렇게 말하기 참 미안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나에게 농사가 주는 기쁨은 자연 속에 있다는 것. 새벽아침 하늘, 이슬 맺힌 초록잎들, 봄 가을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들꽃들, 이름 모를 새소리… 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주 바쁜 철이 아니면 대체로 밭일 하는 시간은 내면이 고요해지고 평안을 얻는 시간이 된다.
 

           ▲  수확철. 나에게 농사가 주는 기쁨은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이다.   © 황미경  

 

시골에서 젊은이가 먹고 살 일은 사실 많다. 처음 와보니 시골에 흔치 않은 ‘대학을 나온 여자 젊은이’를 만나는 순간(시골에서는 보통 50대까지 젊은이이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제의들이 들어왔다. 방과후나 아동센터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 작은 도서관 관리하는 일, 마을 다니며 어르신들 컴퓨터 가르쳐 드리는 일, 사무실이나 단체 상근자 등. 내가 방향을 시골일로 잡아서 그렇지 큰 수입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도시보다 쉽게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참 역설적이었다.

 

그리고 시골에 와서 할머니들을 보고 있자니 노후 걱정은 잘 안 하게 되었다. 대다수 할머니들이 혼자 사시면서 70-80대에도 건재하게 농사일을 하시고, 집값 걱정 같은 거 없이 사시고, 마을회관에 모여 같이 밥지어 드시고 화투치고 소주 마시며 노시는 걸 보니까 말이다.  황미경 
 

여성주의 저널 일다      |     영문 사이트        |           일다 트위터     |           일다 페이스북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