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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맘의 선택, 시골집을 구하다
<이 언니의 귀촌> 정읍에서 딸기잼과 토종생강차를 만드는 황미경①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  밭일 중. 정신 없이 흐르지 않고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느낌이 좋다.    © 황미경 

 

정읍과 첫만남 ‘눈과 함께’

 

하얬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이었다. 하늘도 산도 벌판도 모두 눈으로 덮여있었다. 길엔 차 한대도 다니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마저 눈이 덮은 세계…. 처음 경험하는 세계였다.

 

그런 시골길 위에서 40분째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딸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이따금씩 기다리기 힘들어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손썰매를 태워주고, 다시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버스가 올 방향을 바라봤다.

 

여기에 정말 버스가 올까? 마음 한편으로 불안하면서도 맑디 맑은 공기와 낯선 세상에 매료되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기대감에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정읍과 첫 만남은 그렇게 눈과 함께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전 인천에 00엄마 누구라고 해요. 혹시 산촌 유학하시는 분이시죠? 인터넷에서 찾아봤어요. 카페보고 전화 드려요. 아이를 산촌유학 보내려는 건 아니고요. 제가 딸이랑 둘이 그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은데… 혹시 집구하는데 도움을 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

 

느닷없는 전화에 상대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 이렇게 답했다. 

 

“우리 집은 눈이 많이 오면 차가 못 다녀서 그냥 며칠씩 집에 있어야 해요. 지금은 눈이 너무 많이 오니까 며칠 뒤에 오세요.”

 

난 이 첫 통화부터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눈이 많이 와서 나갈 수조차 없데! 우와우!!

  

           ▲   눈 오는 겨울, 집 앞 풍경.   © 황미경 
  

도시생활에 미련을 버리다

 

난 시골에 연고가 없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울산에 몇 년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 때 30분 거리면 바다와 계곡, 깊은 산이 있는 지방도시를 경험하면서 수도권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수도권에서 30여년을 살았던 나로서는 참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 전까지 지방은 놀러 가는 곳이지 사람 사는 곳이 아닌 줄 알았는데 말이다.

 

울산에서 운 좋게 산마을에 들어가 야생차를 만들며 사는 언니들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자연 안에서 사는 삶이 있음을, 그 삶의 평안함과 윤택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도시에서 왜 시골로 갔나? 자연 안에서 살고 싶었다.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 조건에서는 오히려 시골이 대안으로 보였다.

 

인천 귀퉁이 가난한 동네 반지하에 간신히 살고 있는데 전세 값이 폭등했다. 대책이 없었다. 육아도 문제였다. 이혼녀로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데, 이제 아이는 초등학생이 된다. 그럼 학교 돌봄교실에 맡기거나 학원 뺑뺑이를 돌려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오후 7시는커녕 8시까지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는 일자리는 없었다. 공무원/교사이거나 공기업 직원이 아닌 다음에는 말이다. 그럼 파트타임을 뛰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면 온전한 생활비를 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자신에게 가만히 물어보았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시험에 합격해서 언젠가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와 남들 보기 좋은 차와 집을 갖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발견했다. 아!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위한 삶을 위해 살고 있었구나! 이걸 인정하게 되는 순간 툭! 하고 내려놔졌다.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다. ‘언젠가 시험에 합격하면! 시골에 가서 살고 여성모임도 가입하고 그래야지!’ 이렇게 삶을 유보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원하는 것을 지금 해야지! 지금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야지! 그러고 나니 참 가벼워졌다.

 

▲  황토방이 있어 에어컨 없는 여름 나기에도 도움이 된다. 여름 한낮 딸과 작업동지 언니.    © 황미경 
 

산마을 야생차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나처럼 돈 없고, 기술 없고, 빽 없는 여자가 1학년이 될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언니는 마을에서 산촌유학도 하고 있어서 전국적인 정보에 밝았다.

 

“정읍 XX초등학교로 가. 그 학교에서 9시까지 돌봄교실을 해줘. 학교 교육도 여러모로 잘 되어있어.”

 

기준이 간단하니 선택이 편안했다. 이왕 시골에 사는 거, 아이 교육과 육아가 해결되는 곳으로 가자! 한편, 시골 일을 하게 되면 내가 시간을 조정해나갈 수 있을테니, 초기엔 돌봄교실 도움을 받겠지만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점차 늘어갈 것이라 예상했다.

 

돌이켜보면 참 느닷없는 전화였지만 먼저 귀농한 그 분은 학교와 나를 연결시켜주었다. 처음 왔을 때 그 분과 교감선생님이 같이 다니며 학교 주변의 빈집 두 곳을 소개해주었다. 교감선생님이 그렇게 집을 알아봐주시다니! 신선했다.

 

황토방이 있는 빈집을 구하다

 

삼 년쯤 사람이 살지 않은 집. 허리까지 오는 마른 수풀 가득한 마당에는 동네 쓰레기가 들어와있었고, 먼저 살던 사람의 짐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언뜻 보기에 폐가였다. 황토방 두 개, 아궁이와 부뚜막이 있는 옛날 부엌이 딸린 아담한 흙집 한 채가 남향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 황토집 옆으로 방 하나, 주방 하나, 화장실이 딸린 작은 별채가 동향으로 나있었다. 아마 돌아가신 할머니가 흙집에서 사셨는데, 편안하게 사시라고 자식들이 나중에 지어준 듯 했다.

 

더 알아보지 않고 이 집으로 결정했다. 무너져 가기는 했으나 소박한 돌담에 나도 모르게 끌렸고 아궁이가 있는 흙방이 있어 좋았기 때문이다. 별채는 도배와 전기만 손보면 당장 살아도 될 듯했다. 흙집은 벽채의 흙이 떨어져 나가고 거의 쓰러져가고 있었지만 지붕과 기둥이 멀쩡해서 고칠 수 있어 보였다.

 

가격은 일년에 15만원!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었다. 알아서 고치며 살라는 것. 모든 걸 떠나서 난 이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일 년에 15만원이라니! 그것도 햇살 가득한 마당이 있는 집인데 말이야!

 

사람들은 우리 집을 영화 <집으로>에 나오는 할머니 집 같다고도 했고, 자기 어릴 적 외할머니네 집 같다고도 했다. 많이 버리고 왔는데도 이사 날, 도시에서 들고 온 옷장과 몇 가지 가구는 집으로 들이지 못하고 이웃들에 나눠줘야 했다. 천장이 낮고 방이 작았으니까.

 

시골집 구하기 팁!
 

▲  외풍 많은 시골집 단열 공사와 도배 작업, 많이 따뜻해졌다. 시골 와서 직접 하는 일이 늘어가니 힘들기도 하지만 시선 닿는 곳마다 뿌듯하다.    © 황미경 
 

시골집을 구할 때는 처음부터 집을 짓겠다거나 집을 사겠다는 생각보다는 경제적 부담이 적은 빈집을 고치며 살거나 세를 얻는 게 좋다.

 

동네 사람 거의 모두가 서로 친척이거나 오랜 지인이어서 좋은 집과 터는 알음알음으로 사고 팔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외지인에게 오는 집과 땅은 대부분 불편한 이유가 있거나, 시세보다 비싸거나, 덩이가 큰 것이다. 부담 없는 비용을 들이는 집에서 일, 이년 정도 살면서 마을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고 자연스럽게 연고가 생기면, 살만한 땅 정보나 집 정보도 들어온다.

 

첫 집을 구하기 전에 귀농운동본부 웹사이트를 볼 것을 권해본다. 집과 땅을 구하는 코너가 있다. 전국 각지에서 집을 구하는 사람, 내놓는 사람들의 정보가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시골집과 땅을 구하는지를 볼 수 있어 좋은 참고가 된다. 난 그곳에서 농사짓는 땅은 들어가는 진입로가 안정적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궁이가 있는 황토방이 있는 집을 구하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시골집이 내 집이 아니라면 너무 멋지게 고치지 말 것을 권한다. 집주인들이 처음에는 “알아서 고치면서 살고 싶은 만큼 계속 살라”고 하지만, 살만큼 고쳐놓으면 나가달라고 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시골의 순박한 분들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람 욕심이야 어딜 가나 같으니까….

 

시골의 세는 계약서가 없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런 경우였다. 그래서 나는 밖은 허름하게 그대로 두고 안만 살기 불편함 없이 정갈하게만 고치기로 결정했다. 재료를 최대한 소박하게 하고 말이다. 동향의 별채는 친구들과 같이 도배를 하고 마을에 먼저 귀농하신 분들이 전기와 보일러 수리를 도와주셨다.

 

기술이 없어도, 손수 집을 고쳐 쓸 수 있구나

 

흙집은 같은 면에서 만난 귀농인 부부와 함께 고쳤다. 그분들이 이사갈 집을 못 구해서 몇 달동안 우리와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황토 한 트럭, 시멘트와 모래, 전선과 전구 등 총 15만원의 재료비로 두 달 동안 아주 천천히 흙칠과 미장을 하면서 고쳤다. 충분히 과정을 즐기며 일하는 것 또한 처음 하는 경험이어서 참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분이나 나나 아무런 사전 지식과 기술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손수 집을 고쳐 쓰는 경험을 하면서, 이게 부딪히면 다 되는 일이고 그리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도배, 흙집 고치기, 미장, 자질구레한 집 손질하기 등은 여자 둘이서도 거뜬히 할 수 있다.  

▲ 맘 편한 작물로 적게 짓고, 몇 년 흐르니 농사도 어렵거나 고되지만은 않다. 자연 속에 있는 시간이 좋다. ©황미경  

 

농사짓는 땅은 처음엔 집에서 좀 먼 곳에 세를 주고 지었다가, 살면서 집 가까이 조건에 맞는 땅을 구하게 되었다.

 

첫해엔 집에서 차를 타고 7분 정도 가야 하는 좀 먼 곳에 세를 내서 텃밭을 시작했다. 그땐 시골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딸기잼 만드는 일을 시작하고 집도 고치느라 밭을 잘 가꾸지 못했다. 이듬해에는 지역에 귀농한 몇 집이 함께 자체 농사학교처럼 공동 농사를 지어보았다. 역시 집에서 좀 먼 거리였다.

 

쌀, 토종생강, 옥수수, 콩, 토란, 파. 매일 출근하듯이 논밭 일을 나가고 아주 어설프면서도 살뜰하게 수확물을 챙기는 걸 보고서, 동네 할머니들이 (약 올리듯 놀렸지만) 마음이 놓이셨나 보다. 그 해 겨울부터 거짓말처럼 할머니들이 내 땅에 농사를 지어볼 테냐며 찾아오셨다. 가장 친하고 맘 편안한 할머니의 땅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집 근처700여평을 1년에 10만원의 세를 주고, 작업동지 언니와 토종생강을 주 작물로 친환경으로 짓고 있다. 경관마저 아름다워 내가 사랑하는 밭이다.

 

연고가 있어 소개로 들어가거나 집과 농토가 같이 나와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조건에 딱 맞는 땅을 구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일, 이년 정도 살다 보면 기회가 생긴다. 그 사람 하는 걸 보고 나서 주변사람들이 자기 땅을 권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는 시내와 먼 마을이라 땅값이 평당 5만원 정도로 싸고, 대다수 할머니들이 혼자 농사지으시고 나이 들수록 일을 줄이고 싶어하는 분들이 계시니까 땅 구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황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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