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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여자, 서울 찍고 땅끝마을로
<이 언니의 귀촌> 전남 해남에서 3년차 농부 혤짱(상)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나는 농부입니다”

 

2013년 2월 서울 생활을 접고 흔히 ‘땅끝’이라고 불리는 해남, 그 중에서도 미세마을이라고 하는 공동체에 왔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씨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뒹굴거리다 보니 어느덧 3년차 농부가 되어있다.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하는 일이 무어냐’고 물어본다면 조금은 수줍지만 담담하게 ‘농부’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쉽게도 이곳에서는 그렇게 물어보는 이가 없다. 도시에서는 이상하게도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설명해야 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대신 이곳에서는 내가 어떻게, 왜 여기에 왔으며, 함께 온 이들과는 어떻게 만났는지, 생계는 어떻게 꾸리는지, 공동체 생활은 어떤지에 관해 정말 잦은 질문을 들었다.

 

오늘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언젠가, 이곳에서 함께할 지도 모를 나와 당신을 위해.

  

▲  두물머리에서 '공사 대신 농사'를 외치며 불복종 텃밭을 일구던 때의 모습.   ©<두물머리의 친구들> 카페 
  

나를 새로 눈뜨게 한 곳, 체화당

 

7년 전 봄, 나의 몸과 마음 상태는 황폐함 그 자체였다.

 

쉽지 않게 들어간 두 번째 직장을 반 년 만에 그만둔 데다가 좋아하는 이와 그 당시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유일한 친구를 함께 잃은 후였다.

 

꽤 늦은 나이에 새로운 기술을 배워 들어가게 된 두 번째 회사는 우리 나라의 많은 작은 회사들이 그렇듯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일상적인 야근과 당연시되던 ‘열정노동’보다 나를 견디기 힘들게 한 것은 결국 나의 ‘재능 없음’이었다. 어렵게 배운 기술이 아까워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버텼지만, 내가 그 쪽으로 능력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할 여력도 없던 그 때, 지인을 통해 서울 신촌의 구석에 위치한 대안 카페 ‘체화당’에서 매니저를 구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카페에서 알바를 해 본 적도 없고, 카페 일에 관심도 별로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구인 공고에 나온 소로의 문구가 나를 끌었던 것 같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삶을 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오직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만을 마주하면서, 삶이 가르쳐 주는 것들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마주했을 때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깨닫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토록 소중한 일이기에 나는 진정한 삶이 아닌 다른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월든> 중에서)
 

▲  체화당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한 때   © 혤짱 
 

나는 삶을 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기 위해서 체화당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곳에 함께 내려온 친구들-치자와 혜성-을 만났다.

 

체화당을 알게 된 것이 내 삶의 첫 번째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곳에서의 여러 만남들이 결국 나를 지금의 삶으로 이끌었다.

 

글자를 알고 신문을 읽게 된 이후 ‘ㅈㅅ일보’만 읽으며 세상을 한쪽 시각으로만 보아온 내가, 다른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가지 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입장,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같은 것도 달리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른쪽에서 보는 것과 왼쪽에서 보는 것, 위에서 보는 것과 아래에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한 쪽에서만 보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른 채.

 

두물머리에서 농사를 생각하다

 

한창 귀촌을 생각하고 결의(!)를 다지던 시기에 두물머리 밭전위원회와 ‘불복종 텃밭’ 활동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전까지 제대로 된 텃밭농사도 지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과연 농사라는 것이 나에게 맞는지를 알아보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에 두물머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두물머리는 흔히 양수리라고 불리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지역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곳이라고 해서 두물머리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강물의 퇴적 작용으로 인해 매우 양질의 흙이 쌓여 있어 유기농업이 일찍부터 발달한 곳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추진된 4대강 사업으로 농지는 사라지고 농부들은 그곳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빛의 속도로 추진된 4대강 사업의 마지막 저항지가 바로 두물머리이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땀과 눈물을 나누며 함께 농사짓던 많은 농부들이 떠났고 결국 네 명의 농부만이 남았다. ‘외부세력’들은 마지막 남은 농지를 지키기 위해 “공사 말고 농사”를 외치며 그곳에서 매주 만나 텃밭을 일구고 밥을 나누었다. 우리 셋은 우연치 않게 저항의 마지막 시기를 함께하게 되었다.

  

▲  양평군청 앞,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모를 심기 위해 모여든 일명 '외부세력들'  ©<두물머리의 친구들> 카페 
  

집을 나서서 두물머리 텃밭에 도착하기까지는 2시간 정도가 걸렸다. 왔다갔다하는 데만 왕복 4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나는 텃밭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냥 밭에 앉아 조용히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세상과 단절되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침 일찍 준비해 온 도시락을 함께 나누어 먹는 시간은 왜 그리 맛있고 즐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땅심이 좋은 덕분인지 특별히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작물들은 쑥쑥 자라 주었다. 다른 일이 생겨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 때 농사라는 것을 진지한 마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농사일을 접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당연히 막연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쩌면 나에게 농사일이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두물머리에서 만난 친구들을 통해, 시위와 저항이 자유롭고 유연하며 창의적인 활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땅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아스팔트 위에 가지런히 심은 분필 모. 두물머리에서 만난 친구들을 통해, 시위와 저항이 자유롭고 유연하며 창의적인 활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물머리의 친구들> 카페 
  

해남 미세마을에 오게 된 몇 가지 이유

 

치자와 혜성과는 몇 년간 만남을 이어오면서 함께하는 독서모임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좀 더 생태적인 삶, 소박한 삶, 귀촌귀농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꼭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대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했다. 고향인 부산에서 25년 정도, 서울에서 10년 남짓 살다 보니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이 너무 싫었다. 차와 사람이 적은, 좀 더 한적한 곳에 가서 살고 싶었다.

 

텃밭 정도만 가꿀 수 있다면 소도시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고, 이왕이면 전라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경상도 출신인 나는 안타깝게도 전라도에 관한 안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나에게 전라도는 미지의 세상이자 한번쯤 살면서 속살을 느껴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도 너무 멀고 부산에서도 완전 먼 한반도의 끝, 해남에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우리 셋 다 도시 출신(서울, 부산, 광주)이라 특별히 시골에 연고도 없고, 소개해 줄 만한 이도 거의 없었다. 적극적으로 이곳 저곳을 알아볼 만한 성격들도 아니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미세마을을 알게 되었고, 3년 전 5월 가벼운 마음으로 첫 방문을 했다. 첫 방문에서 특별한 끌림은 없었으나 귀촌지로 해남 미세마을을 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 때문이다.

 

첫째,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큰 영항력을 지닌 어른이 없다. (우린 그동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왔다!) 둘째, 당장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이 있다. (시골에서 고치지 않고 연세를 내지도 않고 살 수 있는 집을 만나기는 로또를 맞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셋째, 유기농으로 계속 농사를 지은 땅이 있고 그 땅에서 함께 농사지을 수 있다. (2011년 조사에 의하면, 유기농지는 전체 농지의 0.8%에 불과하다!)

  

▲ 귀촌지를 찾아나선 여행 중 장흥에서(왼쪽부터 치자, 나, 혜성)   © 혤짱 
 

개인적으로는 이왕에 도시를 떠날 거면 완전한 변방으로 한 번 가보자는 마음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일 년 정도 살아보고 맞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혼자가 아닌 셋이었기에 큰 두려움이나 오랜 고민 없이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후회스러운 점도 있다. 모든 것은 결국 처음이 중요하지 않던가. 첫 마음, 첫사랑, 첫 직장 등. 아무래도 첫 귀촌지는 신중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역시 쉽게 적응하는 동물인지라 한 번 적응하고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그 익숙함을 떨쳐내기가 힘들다. 새로운 곳에서 알게 된 인연들 또한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처음 간 곳에 정착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귀촌할 곳을 선택할 때는 오랜 시간 정 붙여 살 각오를 먼저 해야 한다.

 

나에겐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나에게 귀촌을 선택하는 것, 해남에서 살기를 결정하는 것보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부모님에게 직장 생활을 접고 도시를 떠나 귀촌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가 무슨 용기로 그런 얘기를 꺼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두 번은 못 할 것이다. 나는 집을 떠나 서울로 간 이후 아주 가끔 이 메일이나 편지를 통해 부모님에게 나의 심정을 고백하곤 하였지만(물론 그 때는 부모님 마음에 절대 안 드는 일을 할 때이다) 귀촌은 얼굴을 맞대고 직접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입술을 꽉 다문 채 먼 곳을 응시하던 아버지의 눈과 엄마의 긴 한숨…. 그것은 마치 내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떠서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1분이 한 시간 같았다. 어찌 어찌하여 어렵사리 얘기는 마무리되고 나는 무사히 서울을 떠날 수 있었지만, 내가 부모라 해도 쉽사리 나의 선택을 지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공지영씨의 책 제목처럼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의 삶을 응원할 것”이라고 쿨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내 자식 얘기가 되면 그럴 수 없는 것이 부모라는 존재인 것이다.

 

내가 해남에 온 이후 부모님은 언니네 가족과 한 번 이곳에 오셨다. 엄마는 너무 멀어서 두 번은 오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치셨고, 아버지는 역시나 별 말씀이 없으셨다. 엄마는 이제 내가 시골에 살아도 결혼만 하면 좋겠다고 하시고, 아버지는 신문이나 TV에서 귀농 이야기가 나오면 메모해서 보여주시거나 나한테도 한 번 보라고 말씀해 주신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이 곳을 떠나 사회에서 인정받는 좀 더 평범한 삶을 살길 원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부모님과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곳에 온 첫 마음을 기억하며 열심히 농사짓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혤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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