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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서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불안한 사회
어린이집 CCTV는 그래서 답이 아니다

 

[인천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을 비롯해 연이어 어린이집 폭력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정부와 국회가 어린이집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의 대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보에 우려를 표하며 “딸 둘 키우는 페미니스트” 김홍미리 씨가 기고한 글입니다. –편집자 주]

 

 

돌봄의 고단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아이는 6년을, 한 아이는 7년을 어린이집에 보낸 나에게 어린이집 교사에 의한 아동 학대 뉴스는 늘 곤혹스러웠다. 그런 뉴스가 나오는 날이면 식구들의 걱정스러운, 동시에 (무슨 영화를 누려보겠다고 그 어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느냐 라는) 원망서린 말과 눈빛을 감내해야 했다. 가까운 친척부터 먼 친척까지 그런 관심은 인사말처럼 이어졌다.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 뉴스는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모든 어린이집 교사들을 매도하고, 절대 다수의 어린이집 교사들을 의심받게 만들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엄마들에게 원망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모든 엄마들의 죄책감을 조장하면서 말이다.

 

아이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거나, 잘못을 반성하라며 발가벗겨 문밖으로 내쫓는 원장을 옹호할 마음은 전혀 없다. 아이의 속도를 알지 못하는 교사, 아이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 관심이 없는 교사, 아이의 리듬을 무리하게 성인의 리듬에 맞추려 하는 바람에 아이에게 윽박지르고 심지어 폭행하는 교사를 옹호할 마음도 물론 없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입장,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아이를 향해 지르는 고함, 심지어 괴성, 짜증, 분노, 미칠 것 같은 갑갑함을 이해한다. 어쩌면 엄마들은 이런 돌봄의 고단함을 알고, 그런 고단함으로 인해서 어린이집 교사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더 불안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 돌봄,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일 따위?!

 

자기 아이 한두 명 돌보는 일도 이렇게 버거운데, 아이들 수십 명을 하루 종일 돌보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더군다나 어린이집 교사들은 아파도 쉽게 조퇴나 결근을 할 수 없고 연차를 쓸 수도 없지 않던가. 법적으로 보장이 되어 있다고 해도 자신이 맡은 반 아이들의 하루를 책임져야 하는 교사는 아파도 ‘아프면 안 되는’ 보살핌의 달인 ‘엄마’처럼, 당장 돌봐야 할 아이들 앞에서 법적인 권리를 내세우기 어렵다. 생리통이 심하면 어린이집 교사는 못한다는 얘기는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닌 거다.

 

때문에 소위 ‘어린이집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이유를 찾을 땐 무엇보다도 먼저 보육 교사의 열악한 노동 환경부터 돌아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건 아이를 돌보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알 수도 없었던 ‘돌봄 감수성 부재’의 사회를 문제 삼아야 할 일인 거다.

 

돌봄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어린이집 교사의 전문성 따위는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가볍게 생략되어 왔다. 이건 누구나에게 처음이었을 어머니 역할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고 ‘과도하게’ 부과된 엄마들의 역사와도 닮아있다. 아이 돌봄의 버거움을 호소하는 초보 엄마들에게 ‘남들 다하는 거 유난 떨지 말라’고 하는 비공감의 정서들은, 이들의 어떤 노력도 헛되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고단하고 힘들어도 ‘남들 다하는 일’일 뿐인 아이 돌봄의 영역에서 평균적인 엄마, 무탈한 교사가 되는 일은 그래서 쉽지가 않다. 아이를 학대한 교사는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관련 기사의 댓글에서 ‘어떻게 아이에게 그럴 수 있나’라는 식의 당위를 내세운 비난에 내가 가볍게 동조할 수 없는 건, 돌봄의 무게를 고려하지 않는 앞뒤 없는 비난에 억울한 적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돌봄을 나누지 않으면서, 아이 돌봄에 필요한 공력을 채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해대는 요란한 비판들이 결국 이런 ‘CCTV설치 의무화’ 따위의 정책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CCTV가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  1월 29일 여성단체 긴급 기자회견 “믿고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 정말 불가능한가?”  © 일다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을 볼 생각도 없고 볼 시간도 없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심시키지 못하는 CCTV를 설치한다고 한다거나 전업주부가 ‘불필요하게’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수요를 줄이겠다는 식의 대책 안이 나오는 것이다. (전업주부에게 어린이집 이용이 불필요하다고 단언하는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의 확신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린이집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방안이 기대 받는 역할은 대체 무엇일까. 설마 정부는 어린이집 CCTV가 교사의 강도 높은 노동을 ‘좋은 돌봄’이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는 일에 기여한다거나, 혹은 아이들이 CCTV를 보고 겁먹고 조금은 조용해질 거라고 (설마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CCTV라는 감시 도구가 교사와 아이들이 서로의 눈빛과 몸짓을 정겹게 나누는 일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교사를 감시한다는 분명한 의도로 설치한 CCTV가 교사와 학부모간의 신뢰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부모와 아이, 아이와 교사, 교사와 학부모 사이를 CCTV라는 감시 도구를 통해서 바라보게 하고, 아는 듯 모르는 듯 보았을까 보였을까를 가늠하며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이 관계들이 매우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가장 궁금한 건 'CCTV가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말 그대로 ‘아이-사람’과 마주하는 일이다. 아이는 매 순간 자라고, 교사는 그런 매 순간, 제각각 새로운 아이들과 더불어 사이 공간들을 만들고 채워가는 사람이다. 끊임없는 부딪침과 소용돌이, 어른의 입장에서는 소음일 수도 있는 그 재잘거림 속에서 아이들의 리듬에 음표를 얹거나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교사인 거다.

 

어른과 아이들의 다른 호흡, 다른 언어, 다른 위치, 다른 힘이라는 차이들이 어떻게 조절되고 어우러질 지, 그 공간의 외부인인 나는 알지 못한다. 나와 만날 때와는 또 다른 아이의 세계가 그곳에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내가 눈치 채지 못했던 아이의 모습을 선생님과의 대화에서나 우연히 목격한 아이의 어린이집 생활에서 발견할 때의 그 낯설고도 묘한 뿌듯함이란!

 

그렇다면 CCTV가 이런 공간의 숨소리와 그 어우러짐의 과정들을 ‘보여줄 수’ 있나, 이런 뿌듯함의 기회들을 열어줄 수 있나?

 

선생님 저게 뭐에요? 라고 묻는다면

 

CCTV가 어린이집 아동 학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건, 논리적 설득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게 되는 상식의 문제다.

 

CCTV는 사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상호불신이라는 토대를 어린이집에 심는다. 아이들이 교사에게 “선생님 저게 뭐에요?” 라고 묻는다면 대체 교사는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답해야 할까. “(너희) 부모님들이 (교사인 나를) 믿지 못해서 설치해 놓은 감시 카메라”라고 설명해야 하느냐는 얘기다.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해할 수 없고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것)은 교실에 있어서는 안 된다. 서로 믿지 못하는 불안한 세계임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불신이 지배하는 교실임을 자인하는 이 카메라는, 교사가 아이를 밀쳐 넘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아이들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 세상에 나와 아이들이 처음 맺는 ‘관계’의 모델은 그래도 신뢰와 따뜻함을 담은 빛깔이어야 하지 않을까.

 

CCTV의 보다 적극적인 기능은 가능성의 삭제다. 신뢰받지 못하는 교사는 아이들과 같이 만들어갈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보다 모든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경직된 8시간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통제하고 가능성을 차단하며, 아이들 속에서 성장하는 교사의 시간은 아예 허락되지 않는 더없이 꽉 막힌 시간이 채워지는 것이다.

 

아이들의 자람은 CCTV가 정해놓은 길이와 폭만큼 딱 그만큼만이다.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그 자리에서 모험도, 상상력도, 가능성도, 도전도, 실패도, 교차하는 숱한 감정들도, 이 모든 것들 속에서의 성장도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신뢰’가 필요한 때다

 

학부모로서 나는 최소한의 것들만 하는 어린이집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사가 어떤 모험을 감행하기로 할 때 그것을 믿고 지지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더욱이 불안이 지배하는 시대에 아이가 잘못되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부모(엄마)에게 떠넘기는 게 상례인 이 나라에서 말이다.

 

불과 몇 주 전,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일곱 살 아이들의 일박이일 원내 캠프를 진행하면서 동네 목욕탕에 가겠다고 했을 때, 과연 교사들을 믿고 이 아이들을 보내도 될 것인지가 행사 당일까지도 어린이집의 ‘핫’한 이슈였다. “부모님들은 걱정하시지만 아이들은 안전하게 잘 다녀올 것이고, 다녀와서 또 한 뼘 자라있을 것”이라는 원장 선생님의 일관된 설명은 우려 깊은 학부모들의 원성을 샀지만, 결국 그 말씀대로 아이들은 한 뼘 더 자랐다.

 

내 딸들은 어린이집에서 자랐고, 나도 어린이집에 보내는 엄마 노릇을 하면서 더불어 자랐다. 늘 불안했고 그건 내 의지와 상관이 없었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원장님을 신뢰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그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불안감은 걱정으로, 의심으로, 그 의심은 불신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불안한 사회에서 불신이 만연한 건 그래서 필연적일 수도 있겠다.

 

이 불안함이 잦아들고 신뢰라는 감각을 되찾기 시작한 건, CCTV 때문이 아니라 어린이집 입구에 있는 10분 느린 시계 덕분이었다. 행여 너무 늦진 않았을까 하는 불안함과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늘 뛰어 들어갔던 어린이집 입구에 걸려있던 시계는 항상 내가 예상했던 도착 시간보다 10분이 빨랐다. 그 시계를 보며 ‘아 늦지 않았구나’ 라며 안도했다. 그런데 10분 느린 그 시계가 ‘미안함이 아니라 기쁘고 반갑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이를 만나게 하기’ 위한 원장님의 기막힌 조치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어린이집 네 곳을 옮겨 다니며 교사를 신뢰한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 없던 나는 이때부터 신뢰의 감각을 복원해갔던 것 같다. 담임교사가 내 딸들을 잘 돌보지 않는 것 같다고 문제 제기했을 때 내 이야기를 듣고서도 ‘교사를 믿고 기다려달라’는 불충분한 답변을 들은 후, 너무 이상적이고 고집 세다며 툴툴거렸던 바로 그 이 원장님 덕분에 말이다.

 

되짚어 생각해도 CCTV나 교사 처벌, 전업주부 자녀의 등원 제한은 어린이집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결코 아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서로 ‘믿는다’는 것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이해여야 한다. 감시와 처벌, 그리고 나 아닌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그런 연결감과 신뢰. 그런 마음들이 참 고픈 시절이다. ▣ 김홍미리 (딸 둘 키우는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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