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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새지평

주민번호 없는 나라는 어떻게 돌아갈까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5.02.03 09:30

국민식별번호가 없는 나라도 있다
개인정보 대량유출 사태 1년② 주민번호 체제 어떻게 바꿀까 

 

개인정보 대량유출 사태 이후 1년, 정부가 내놓은 대책과 사회적 논의들을 검토하며 주민번호 시스템의 현 주소를 짚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사를 3회 보도합니다. 주민번호 체제의 대안을 제시하는 두 번째 기사의 필자는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주민번호 없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갈까’

 

주민번호. 문제가 많은 건 알겠는데, 막상 어떻게 바꾸어야 할 지를 생각하면 막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 전 국민의 주민번호가 유출되었으니 새 번호로 바꾸어주면 되는 것일까? 아예 주민번호를 쓰지 않으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는 하는 것일까?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해서 주민번호를 부여 받은 후, 학교에 들어갈 때, 대입 시험을 볼 때, 취직을 하고 세금을 낼 때, 은행 계좌를 개설할 때, 여권을 만들고 운전면허를 딸 때, 4대 보험에 가입할 때, 계약을 할 때, 심지어 핸드폰 서비스에 가입할 때 등 주민번호가 이용되지 않는 곳이 없다. 범죄 기록도 주민번호를 기반으로 기록이 된다.

 

여러 사회 영역에서 주민번호가 수집될 뿐만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가 되어야 하니 금융기관과 국세청이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주민번호를 통해 내 자격을 확인해야 한다. 교사나 공무원이 될 때 주민번호를 통해 범죄 경력을 조회하기도 한다.

 

한 영역에서 주민번호를 쓰지 않으면 다른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주민번호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촘촘히 뿌리내리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이쯤 되면 주민번호를 바꾸는 것이 ‘주민등록법’ 하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대 개조하는 엄청난 일로 느껴진다. 주민번호 없이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갈까 싶다.

 

‘국민식별번호’가 없는 나라에서는…
 

▲ “주민번호가 없는 나라도 있다.”   © 진보네트워크센터 제공 
 

도대체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국의 주민번호와 같은 제도는 없다고 하는데, 그 나라들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주민번호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잃어버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되살리기 위해서 다른 나라의 사례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주요 나라의 ‘국민식별번호’(national identification number)를 다룬 논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논문들은 다른 나라의 국민식별번호의 역사나 현황만을 다루고 있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도 교육과 조세와 복지와 금융과 통신 서비스 등을 위해 국민식별번호를 사용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것이었다. 그래서 해외의 정보인권 단체 활동가들과 개인정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보냈다.

 

조사를 하면서 놀라웠던 점은, 한국의 주민번호와 같은 국민식별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도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호주가 그렇다. 호주에는 보편적인 국민식별번호가 없다. 의료카드를 거의 전 국민이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의료 서비스를 위해서만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신원 확인을 위해서는 운전면허증을 사용한다. 그럼 운전면허증 발급을 위한 신원 확인은 어떻게 하나? 여권, 요금고지서, 신용카드, 사회보장 문서 등 다양한 증명서가 활용된다고 한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출생증명서와 거주증명(요금고지서와 같은)이 필요하다. 조세를 위해서는 개인 및 기업을 위한 별개의 세금납부번호가 활용된다.

 

사회보장을 위한 고유의 번호가 존재하며, 역시 신원 확인을 위해서는 요금고지서, 운전면허증, 여권, 의료카드 등 다양한 수단이 이용될 수 있다. 나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 다른 증명서들이 활용될 수 있다. 신원 확인 후 부여되는 번호는 그 목적(예를 들어 여권이나 의료카드번호 등)을 위해 사용된다.

 

물론, 신원 확인이 필요한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호주에서도 몇 년 전에 국민식별번호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전 국민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국민식별번호가 존재했다기보다는 특정 목적을 위해 도입된 번호가 그 용도가 확장되어 일종의 국민식별번호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 캐나다의 사회보험번호(Social Insurance Number), 영국의 국가보험번호(National Insurance Number) 등이다. 물론 국민식별번호로 간주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주민번호처럼 사용 범위가 광범위한 것은 아니며, 그 수집 및 이용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조세번호, 사회보장번호 등 ‘목적별 번호’ 사용

 

  여러 국가들이 프라이버시 침해를 막기 위해 ‘목적별’ 식별번호를 사용한다.    © 진보넷 제공 
 

해외 사례를 분석한 결과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식별번호 자체에 생년월일이나 성별과 같은 개인 정보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또한 국민식별번호의 수집과 이용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국민식별번호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세번호, 사회복지번호와 같이 사회 영역별로 ‘목적별 번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국민식별번호이자 신분증인 ID카드(번호)의 이용 범위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또 납세자번호, 공공건강보험번호, 법정연금보험번호 등 목적별 번호 체계가 잘 정착되어 있다. ID 카드번호가 신원 확인에 이용되지만, 별도로 저장되거나 다른 목적별 번호와 연동되어 있지 않다.

 

헝가리에서는 1991년 헌법재판소가 보편적 국민식별번호를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현재 개인식별자, 사회보장 식별코드, 조세 식별코드 등 3개 주요 식별자가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과 수집 범위가 법에 규정되어 있다.

 

물론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말레이시아 등 주로 제3세계 국가에서는 한국과 같이 국민식별번호가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우간다와 같이 국민식별번호 체계를 이제 도입하고 있는 국가들도 있다.

 

주로 선진국들에서 국민식별번호 체계가 잘 정립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주뿐만이 아니라 영국, 독일, 캐나다 등 국가들에서도 국민식별번호의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논란이 이미 벌어졌었다. 현재의 체제는 그러한 투쟁의 결과인 셈이다.

 

※ 진보넷 <국민식별번호와 목적별 식별번호에 대한 해외사례 보고서> http://bit.ly/1BOGUz5

 

신원 확인에 대한 강박을 버려야 한다

 

한국만큼 주민번호와 같은 국민식별번호를 사회 여러 영역에서 광범하게 이용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주민번호는 여러 사회 영역에서 사용되는 서로 다른 개인 정보를 통합하는 만능 열쇠인 셈이다. 개인 정보 유출에서 주민번호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혹은 해커의 입장에서 주민번호가 아주 매력적인 공격 대상인 이유는, 주민번호를 매개로 서로 다른 개인 정보를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주민번호의 수집 범위가 조금씩 축소되어 가는 것은 다행스러운 경향이다. 2013년 2월부터 인터넷에서, 2014년 8월 7일부터 사회 전 영역에서 법에 근거가 없이는 주민번호를 수집할 수 없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조금씩 개선되고는 있으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여전히 주민번호를 수집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법률이 자그마치 1천개가 넘는다. 이쯤 되면 주민번호 수집을 제한한다는 목적은 사라지고, 법에 근거만 있으면 주민번호를 수집할 수 있다고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꼴이다. 과연 그 모든 영역에서 주민번호 수집이 정말로 필요한 것일까?

  

▲  2011년 11월 8일, 인권단체들이 네이트 및 싸이월드 개인 정보 유출 피해자들의 주민등록번호 재발급을 요청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 진보네트워크센터 제공  

 

주민번호 수집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종종 모호하다. 한때 비디오 대여점에서도, 대형마트 할인 행사에 응모할 때에도 주민번호를 수집한 적이 있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은 있어도 주민번호가 같은 사람은 없으니, 100% 식별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주민번호 수집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디오 대여점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이름과 생년월일, 혹은 휴대폰 번호 뒷자리만으로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대다수의 프라이버시 권리를 희생시키기보다 영점 몇 퍼센트 가능성의 오류로 인한 손실을 사업자가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100% 정확한 신원 확인이나 개인 식별에 대한 강박을 버려야 한다.

 

한국의 광범위한 주민번호 수집은 ‘관행’일 뿐

 

현재 주민번호 수집을 허용하고 있는 법률들도 이런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정보 공개를 청구하는데 왜 굳이 신원을 확인해야 하고, 주민번호를 요구해야 할까? 정보 공개 청구자의 연락처가 필요하다면 연락처를 수집하면 그만이다.

 

법정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주민번호를 수집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 이름이나 소속, 생년월일, 연락처 등의 조합으로도 충분히 식별 가능할 것이다. 이미 서식에는 생년월일을 수집하고 있으면서도 법에는 주민번호 수집을 허용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별도의 번호를 사용하면 되는데 주민번호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수많은 공제조합에서 주민번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공제조합이면 나름의 고유번호로 조합원들을 관리해야 한다. 건축사 자격증, 의사 면허증 등 수많은 자격증도 별도의 고유번호로 관리하면 된다. 주민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저 익숙한 관행일 뿐이다.

 

‘주민번호 수집 법정주의’는 완료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정부는 현재 1천여 개에 이르는 법령들이 정말 주민번호를 수집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다른 방법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인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주민번호는 주민의 거주를 관리한다는 애초의 용도로 제한적으로 이용될 필요가 있다. 다른 영역에서 식별번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면 민간이든, 공공 영역이든 별도의 필요한 번호, 즉 목적별 번호를 쓰도록 해야 한다.

 

※ 진보넷 <현행 주민등록번호 수집 법령에 대한 검토보고서> http://bit.ly/1ypuXfC

 

주민번호 시스템, 어떻게 개편하면 좋을까

 

▲  주민번호 체계를 개인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임의의 일련 번호로 바꾸어야 한다.   © 진보넷 제공 
 

지난 2005년 개인 정보 유출 사고 이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필자는 안전행정부 공무원에게 ‘이미 주민번호가 유출된 사람들에게 미래 발생할 피해를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지’ 물은 바 있다. 이미 당시에 한국의 주민번호가 중국 등지에서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있음이 드러난 터였다. 한국 정부의 대책은 고작 ‘주민번호 도용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 10년이 흘렀다. 개인 정보 유출 사고는 갈수록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해 초 발생한 금융 개인 정보의 대량 유출 사고 이후에, 안전행정부는 주민번호 체제 개편 방안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근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주민번호 개편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입장을 밝히고 사회적 평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민번호 이슈가 잠잠해졌으니 ‘그냥 가만히 있자’는 것은 공무원의 전형적인 나쁜 관행이다. 사실 안전행정부 자체가 전 국민의 데이터베이스를 보유, 관리하고 있는 부처이다. 그러니 안전행정부 입장에서는 비용도 많이 들고 국민들을 통제하는데 불편해지는데 굳이 주민번호 체제를 개편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주민번호 체제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 이미 큰 틀의 방향은 나와 있다. 첫째, 주민번호의 수집과 이용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현재 주민번호 수집을 허용하고 있는 1천여 개의 법령을 검토하여, 주민번호 고유 목적에 맞는 용도로만 그 수집과 이용을 제한해야 한다.

 

둘째, 주민번호 체계를 개인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임의의 일련 번호로 바꾸어야 한다. 셋째, 각 사회 영역에서는 고유의 목적별 번호를 이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조세 목적으로는 납세자 번호를, 의료 목적으로는 건강보험번호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진보네트워크의 제안이 아니다. 지난 해 8월,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국회의장과 국무총리에 이와 같은 내용의 권고를 한 바 있다.

 

앞으로 정보화는 더욱 진척이 될 것이고,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개인 정보들이 데이터베이스에 누적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 매일의 심장 박동수나 우리 집의 난방 온도나 내 차의 주행 거리 같은 것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주민번호를 매개로 엮어질 것이라 생각하면 끔찍하다. 주민번호는 우리 사회의 인프라와 같은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바꾸어나가더라도 방향은 올바르게 설정해야 한다. ▣ 오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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