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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에서 책읽기> 마이 리틀 레드북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 칼럼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www.ildaro.com 
 
‘첫 월경’ 하면 푸른 하늘에 펄럭이는 만국기가 먼저 떠오른다. 시골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날이었고, 나는 그때 5학년이었다. 운동장에는 하얀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이 몰려다녔고 난 대낮에 달리기경주를 했다. 이상했다. 그날따라 아랫도리가 몹시 따가웠다. 아침에 모처럼 받은 용돈으로 교문 앞에서 백 원짜리 뽑기를 할 때도, 풍선이며 바람개비를 구경하며 다닐 때도 그 불편한 느낌이 그치지 않았다. 결승점에 다다라 그 통증이 커진데다 속옷이 축축해진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서 보니 팬티 밑이 고약처럼 꺼멓고 끈끈하게 물들어 있었다.
 
‘죽는구나’ 하고 바로 생각했다. 놀랄 만치 기분이 담담했다. 엄마에게 가서 말을 해야겠다고 집으로 걸어갔다. ‘엄마가 충격을 받으면 위로해주어야지, 난 어차피 죽을 거니까’ 하고 비장하게. 내 말에 엄마는 그다지 놀라지 않고 무덤덤하게 바로 장롱에서 두꺼운 기저귀를 꺼내주었다. 기저귀를 차고 나니 영 불편했다. 큰 다음 찬 기저귀는 어쩐지 부끄럽기도 했다.
 
“다른 건 없어?”
 
내 물음에 엄마는 잠시 망설이더니 “가게에서 생리대를 팔긴 하는데 써본 적은 없어. 가서 사오렴.” 하고 돈을 꺼내주었다. 빨아서 다시 쓰는 기저귀를 평생 쓴 엄마는, 한번 쓰고 버리는 생리대를 산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그때는 텔레비전 광고를 시작한 후리덤 생리대가 있었다. 생리대를 텔레비전에서 광고한다고 신문에 날 때였다. 가게 주인 아줌마가 권해준 건 후리덤보다 더 비싼, 낱개 포장된 생리대였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준 그 분홍 생리대를 들고 집에 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엄마, 이제 어떻게 해?”
 
포장된 손바닥만 한 정사각형 생리대 하나를 꺼내 물었는데 엄마 얼굴도 난감하다. 이런 생리대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것이다.
 
“글쎄, 그냥 밑에 넣는 거겠지?”
 
엄마 말을 따라 나는 포장을 다 풀지 않은 생리대를 그대로 팬티에 넣었다. 생리대는 왔다 갔다 움직였다.
 
“엄마, 이건 아닌 것 같아.”
 
다시 꺼냈다. 엄마는 생리대에 대해선 나보다 더 아는 것이 없었다. 난처해하는 엄마 앞에서 포장된 생리대를 이리저리 뒤적여보다 뜯은 건 나였다. 접착 면에도 띠지가 붙어 있었다.
 
“엄마, 뒤쪽에 스티커가 따로 붙어 있는 걸 보니 이것도 뜯는 건가 봐.”
“그래, 그 다음엔… 어디다 붙일까?”
 
이번엔 엄마가 자신 없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움직이지 말라고 아마 접착 면을 몸에다 붙이는 거겠지?”
 
엄마의 말에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생리대를 뒤집어 몸에 붙이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한 것 같았다. 둘이서 끙끙대다가 마침내 내가 제대로 붙이는 방법을 알아냈다.
 
팬티에 붙은 생리대를 같이 내려보다가 엄마는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천 기저귀를 쓰는 게 나아. 굳이 네가 그걸 쓰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 후로도 기저귀를 권하는 엄마 덕분에 나는 생리 때 기저귀천을 차야 했다. 걸음도 불편하고 칠판 앞에 나가 문제라도 풀라치면 다른 아이들이 내 두툼한 엉덩이를 쳐다보는 것 같아 몹시 신경이 쓰였다. 그날부터 좋아하는 짧은 흰 바지와 러닝 바람으로 동네골목을 다녀서는 안 되었다.
 
“남자들과 한 방에 있으면 안 된다. 임신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엄마의 성교육은 그것으로 다였다. 어떻게 임신이 된다는 걸까? 엄마가 보고 처박아둔 여성잡지를 뒤적이면 알 듯 말 듯 야릇한 이야기가 있는데 자꾸 보게 되었다. “그런 책 보면 안 돼!” 아버지가 나무란 다음엔 다락방 계단에 숨어서 잡지를 봤다. 딸이 생리를 한다는 게 부모에게는 책임감을 증폭시켰나 보다. 생리 날짜가 늦어질라치면 “너 혹시 무슨 일 있었니?” 엄마는 지레 성급한 불안으로 에둘러 물으며 기분 나쁜 닦달을 했다. 나는 차츰 생리하는 게 싫어졌다.
 
학교에서 단체로 운동장에 ‘엎드려 뻗쳐’ 기합을 받을 땐, 몸이 힘든 것보다 생리가 앞으로 새어 나올까 봐 더 걱정이 되었다. 이 아이들 중에 생리를 하는 여자애도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하는 무지한 선생들이 원망스러웠다.
 
1980년대의 시골 학교 풍경은 때로 그랬다. 신체검사를 한다고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아이들 보고 팬티만 입고 옷을 모두 벗으라고 하거나, 벗은 몸을 보고 남자아이들이 “너 브래지어 했구나!” 하고 대놓고 놀리는 것. 그렇게 벗고 건물과 건물 사이 땡볕 아래서 줄지어 신체검사를 기다릴 때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여자애들을 지목하며 키득대는 미숙한 동급생 남자아이들의 짓궂음과 맞닥뜨릴 때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게 나는 내 몸과 멀어지고 있었다. 

 

▲ <마이 리틀 레드북> 레이첼 카우더 네일버프 엮음, 부키출판사   
 
여기에 100명의 솔직한 초경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다. ‘여자는 누구나 그날을 기억한다’는 부제가 붙어 있는 빨간 책, <마이 리틀 레드북>이다. 책을 엮은 레이첼은 나처럼 초경 때 기저귀를 찼다. 그녀는 할아버지 댁에서 수상스키를 타다가 초경을 맞는 바람에 생리대를 못 구해 기저귀를 찼던 경험이 있다. 그 다음 수많은 여성들의 첫 월경 이야기를 묻고 모아나갔다. 생생한 첫 생리의 기억을 왜 화제에 올리지 못하는지 질문을 던지면서.
 
여러 세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성들의 첫 생리 이야기가 이 책에 가득 담겨 있다. 미국 뉴욕에서 중국 난징의 여성, 나치의 수색 때 생리를 시작한 유대인 여성까지, 1916년의 첫 생리와 2007년의 첫 생리까지, 생리를 했다고 얼굴을 찰싹 맞은 여성, 엄마한테 이해 받지 못했다고 서운한 여성부터 초경 파티를 받은 여성까지 다양한 첫 생리 이야기가 있다.
 
한 페이지씩 넘기며 100명이나 되는 다양한 여성들의 솔직한 생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파격적인 독서 경험이다. 이것은 아주 멋진 일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런 책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게 마련이고, 우리는 101번째 여성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뒤에 덧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활기찬 파티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리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가족과 학교와 사회와 문화와 역사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의 말로 고스란히 드러내는 즐거운 작업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신기하게도, 남성이 월경을 하고 여성은 하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답은 자명하다. 월경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자랑할 가치가 있는 남성들의 행사가 될 것이다. 남성들은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하는지 자랑할 것이다. 소년들은 남성이 되었다는 상징인 초경을 종교 의식과 파티로 축하할 것이다. 의회는 매달 남자들이 불편한 일을 겪지 않도록 ‘국립 생리불순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할 것이다. (…) 인터넷에는 달 채팅방과 생리통 블로그가 넘치고, 자신과 월경 주기가 같은 유명 스타를 검색해보는 남자들도 많을 것이다. 밤거리의 남성들은 자랑을 늘어놓거나(“나는 패드를 세 개 차는 남자예요”) 다른 남자에게 칭찬을 들으면(“우와, 너 오늘 좋아 보이는데!”)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응, 당근이지, 생리 중이거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 남성이 월경을 한다면, 권력의 정당화는 이런 식으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글로리아 스타이넘, <마이 리틀 레드북>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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