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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에서 책읽기> 김미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 칼럼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www.ildaro.com
같은 세대 작가가 들려주는 낯익은 이야기
▲ 김미월 소설집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표지
내가 가지고 있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김미월 소설집, 2011년, 창비) 속표지에는 김미월 작가가 또박또박 쓴 사인과 ‘부당 해고 없는 세상을 꿈꾸며’라는 글귀가 있다. 작가가 기증한 도서로, 나는 이 책을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행사에서 샀다. 작가는 내 또래이다. 같은 세대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쩐지 낯익고 친숙하다.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단편소설 <현기증>을 인상 깊게 읽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달리’다. ‘달리 할 말도 없었다’는 문장을 읽고 주인공은 자기 이름을 달리로 바꾸었다. 그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늙수그레한 남자선생들밖에 없던 중학교에 젊은 여교사가 첫 발령을 받아 부임했다.’ 그는 달리의 반 담임선생이었다. 달리는 ‘이 세상의 보편적 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그녀를 좋아했다.
“여러분, 그런데 평화통일이란 게 뭐죠?”
교실 뒤에서 회의를 지켜보던 그녀가 교단 쪽으로 걸어나왔다.
“여러분 말대로 북한 정부를 없애고 통일국가에 남한 정부 하나만 세우는 거? 그게 진짜 평화통일일까요?”
달리는 샤프심을 급히 갈아 끼웠다. 선생님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다. 몇 줄 남지 않은 칠판의 내용을 회의일지에 옮겨 적는 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리고 이튿날, 그녀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조례시간에는 옆 반 담임선생이 들어왔다. 수학시간에는 자율학습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종례시간에는 옆 반 선생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경찰서에서 아침 일찍 그녀를 연행해갔다는 소문이 교무실에서부터 복도를 타고 교실로 들어왔다. 어제 어떤 아이가 집에 가서 회의시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전부터 알고 지내던 경찰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경찰이 상부에 사건을 정식으로 보고했다…… 소문의 요지는 그러했다. (76p)
교장선생이 증거로 내민 공책 한 권은 언제 입수한 건지 모를 학급회의 일지였다. 그곳에는 달리의 글씨체로 여선생의 말이 적혀 있었다. ‘북한 정부를 무조건 없애는 게 아니라…… 진정한 평화통일은…… 북한 정부를 인정하면서……’ 달리가 기록한 기억이 없는데도 그렇게 씌어 있었다.
여선생은 학교에서 다시 볼 수 없었고, 달리는 수업시간에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정신을 잃는다. ‘빨리 어른이 되기를, 그래서 빨리 이 마을을 떠날 수 있기를 그는 빌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여선생을 만나지 못한다.
1989년 봄, 불길에 휩싸인 교실 낙서판
1989년 봄에 나는 열다섯 살, 2학년 중학생이었다. 좋아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국어선생님이었는데, 그 선생님이 복도를 지나칠 때는 학생들끼리 목을 빼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안달이었다.
우리 교실에 낙서판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거기에 아무 얘기나 맘껏 쓰고 꾸며 보라고 했다. 우리는 어릴 적 사진도 붙이고 좋아하는 꽃말도 쓰고 우스갯소리도 끼적여 놓았다. 5월 16일, 학교에 “국어 선생님이 잘렸다!”는 말이 퍼졌다. 국어선생님이 맡은 3학년 반의 낙서판에 “북한에 가보고 싶다” 같은 말이 한두 줄 쓰여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이 뭔지도 몰랐다.
우리 담임이 허둥거리며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에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보고 교실 뒤에 있던 낙서판을 떼어 따라오라고 했다. 교실 뒤 공터 쓰레기장에 가서 담임은 서둘러 라이터를 꺼내 낙서판에 불을 붙였다. 우리가 살갑게 쓰고 그린 글씨와 그림이 불길에 휩싸였다. “우리 반에는 낙서판이 없었던 거다.” “예.” “너는 이걸 보지도 못한 거다.” “예.” 불길은 낙서판을 활활 태우고 있다. “이건 처음부터 없었고 누가 물으면 모른다고 해야 한다!” “예.” 나는 타 들어가는 낙서판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교장이 전교 반장과 부반장들을 불러 자기 반에 낙서판이 있는지 적어 내라고 위압적으로 굴었다. 없다고 써냈다. 국어선생님은 단식을 하고 유서를 품고 출근하다가 5월 26일 밤 11시에 학교에서 경찰서로 끌려가 구속되었다. 이틀 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되었다. 전교조 창립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여론 몰이한 공안 사건이었다.
‘간첩’ 선생님으로 의심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 흉흉하던 때, 누구나 한 번쯤은 선생을, 친구를 의심했을 것이다. 저 선생이 빨갱이인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저 애가 첩자인지, 어떤 애가 교장실을 들락거리지 않는지. ‘선생 중에 간첩이 있다’고 했다. 정권이 필요로 해서 간첩 이야기를 지어내었다고 해도, 간첩이 아닌지 서로 의심하며 부대껴야 했던 그 시간은 어린 우리에게 지옥이었다.
절판된 책인 <서준식의 생각>(2003, 야간비행)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해 읽게 되었을 때, 나는 다음 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으로 비롯된 (스파이 행위 이외의) 행동이 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는 사람을 ‘정치범’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나라 감옥에 정치범이나 조작된 간첩은 있을지언정 진짜 간첩은 없다. ‘간첩’이란 냉전과 분단이라는 조건을 등에 업은 지배세력이 만들어낸 지극히 한국적인 허상일 뿐이다. ‘간첩’이라는 말이 실제로 한국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스파이’가 아니라 ‘포악한 붉은 살인자’나 ‘우리의 행복을 하루아침에 망칠 음흉한 악마’ 같은 의미일 터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랜 세월을 ‘무서운 간첩’의 이미지에 떨며 살아왔고 동시에 멋대로의 불법과 부정을 일삼으면서도 언제나 ‘간첩카드’를 들이대며 우리를 침묵케 했던 정치권력의 폭력에 떨며 살아왔다.
어쨌든 ‘간첩’은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군사독재를 (존재하지도 않는)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다는 ‘간첩’보다 좀 더 나은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언제나 필요한 것이었다. 국가안보를 위해 철저히 뿌리를 뽑고 씨를 말려야 할 ‘간첩’이 정권안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으며 없으면 만들어 내기까지 해야 했다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다. (중략) 이런 ‘간첩’을 누군가가 함부로 분석하거나 검증하기 시작하면 ‘북으로부터의 위협’이라는 신화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공포정치도 분단체제도 덩달아 흔들리기 시작할 것은 분명하다. (중략) 분단체제에 마지막 남은 이 금기에 우리가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될 까닭은 바로 우리 자신이 오랜 불안과 공포와 불신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이제 간첩을 이야기하자’ <서준식의 생각>(187p~189p)에서
그 부분을 그토록 열심히 읽은 것은 내가 ‘간첩’이라고 의심한 적 있는 국어선생님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일러주는 대로 ‘좌경용공’으로 선생님을 의심한 것이 평생 미안했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달리’들에게 보내는 인사
근래에 길을 걷다가 작은나무 카페에 붙은 대자보와 마주쳤다. 성미산학교의 한 학생이 쓴 것이었다.
“성미산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성미산 마을에 살고 있는 우리를 종북좌파라고 말합니다. 사실 저는 이 단어들이 매우 어색합니다. 저희들 중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생각하는 것들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가요? (…)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하면 종북이 되고 소리질러 목소리를 내는데 들어주지 않습니다.”
아직 불타는 낙서판 앞에 내가 있었다. 아, 나도 인사하고 싶다. 열다섯 살 적 그때의 친구들에게. 가끔 안부가 궁금하던 그들에게. 그 많은 ‘달리’들에게.
안녕들 하십니까?
중학교를 함께 다니던 친구들, 안녕하십니까? 수업 중에 책상이 새까맣게 되도록 낙서를 하던 친구들, 안녕하십니까? 책상을 검게 덧칠해도 그 위에 다시 낙서하던 친구들, 안녕하십니까?
우린 엉거주춤 공부하면서 고향을 떠나기만 바랐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서울에만 가면 성공할 것 같았습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어도 우리는 자랄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이젠 아무도 고향에 없겠지요.
그때 청소시간에 빗자루를 들고 고개를 숙이며 몇몇이서 말했지요.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리에겐 힘이 없잖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꺼낸 용기들이 제각기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나서 다시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게 뒤늦게 후회가 됩니다. 운동장에서 ‘스승의 은혜’를 부르고 나서 헤어진 당신들이 서로 앞뒤로 경쟁자가 되어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 이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세상에는 ‘간첩’이 있고 ‘종북좌파’가 횡행하고, 교사와 노동자들이 잡혀 들어가고 학생들이 자살을 합니다. 지난 일이라고 치부했는데, 다시 선생이 된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겪어야 하는 일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곧 마흔입니다. 에누리 없고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인생이 이제 슬슬 두려워집니다. 만나지 않고 떠나온 것이 있어 같은 걸림돌에 넘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 글귀들을 기억하시나요? ‘북한에 가보고 싶다’고 쓰자 선생님이 경찰에 잡혀 들어가고, ‘우리는 어른이다’고 쓰자 경멸을 받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자 매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남모를 자책과 후회로 움츠러들어 사라진 손들.
말한다는 것은 손해를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국가는 무섭고 법은 두렵고 우리는 힘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교육이란 것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친구들, 안녕하십니까? 저는 좋아했던 선생님을 의심하는 법을 배워버린 후,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있는 것을 없다 하고, 본 것을 보지 못했다 하겠다고 약속한 그날 이후 저는 언제나 떳떳치 못했습니다.
당신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때 우리는 친구가 될 필요가 없었지요. 그때도, 지금도,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한 당신들을 이제 동무로 만난다면 저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여긴 우리의 낙서를 가슴에서 불러내고 싶습니다. 어느 문턱에서부터인가 우리가 다시는 꿈꾸지도, 바라지도 않은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떠듬거리며 말하고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싶습니다. ▣ 안미선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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