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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에서 책읽기>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 칼럼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www.ildaro.com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알게 된 건, 십 년 전쯤 회사에서 만난 한 아르바이트생 언니를 통해서였다. 회사의 고만고만한 일상에서 즐거운 거리가 없을까 궁리하던 우리들은 점심 시간에 벼룩시장을 우리끼리 열기로 했다. 각자 자기 책을 가져와 사연을 설명하고 서로 마음에 드는 책은 맞바꾸어 갖기로 했다. 언니가 소개한 책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너무 소중한 책이다. 사람들에게 늘 이 책을 선물했고 항상 나는 이 책과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그 책을 언니에게서 건네 받았다. 그러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은 건, 책의 내용이 고만고만할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언니의 상처를 책을 통해 전해 받을 것 같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책을 볼 때면 항상 그 언니가 떠오른다.
 
사랑에 주린, 고통 받는 어린 영혼 

▲ 에밀 아자르(Emile Ajar 본명: 로맹 가리, 1914-1980, 러시아 태생 유태인) 
 
에밀 아자르(Emile Ajar)의 본명은 로맹 가리(Roman Kacew)다.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콩쿠르 상을 유례없이 두 번 수상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숨겼다. 그는 61세 때 이 작품을 썼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이혼한 엄마를 따라 프랑스에 온 그는 유태인이었다. 그러니까 에밀 아자르는 이주노동자의 자식이자 가난한 한부모의 아이였다.
 
나는 그런 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위대한 작가가 된 다음에는 그런 정체성이 쉬 잊히지만, 예컨대 남한 최대의 문학적 성과를 이뤘다는 <토지>의 박경리 작가가 ‘전쟁미망인’이었다거나, 박완서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끝없는 가사노동의 불행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작가들이 여성이고 사회의 모순을 느끼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작품에 어떻게든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에밀 아자르의 어머니는 실제로 하숙집 관리인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녀는 통풍이 되지 않는 지붕 밑 작은 다락방에서 지내면서 아들을 프랑스인으로 키웠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뿌리를 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고 설명에 나와있다.
 
2차 세계대전에 복무하고 전쟁 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외교관이 되어 세계를 누볐고 정계와 예술계의 총아가 되었던 로맹 가리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로 이름이 알려진 다음 늘그막에 ‘정말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려고’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썼다. 이 작품을 읽으면 외면의 화려한 성공에 상관없이 허기지고 사랑에 주린 고통 받는 어린 영혼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프랑스어 판  
 
아랍인인 모하메드는 유태인 로자 아줌마와 산다. 게슈타포에게 쫓긴 적 있는 로자 아줌마는 먹고 살기 위해 성매매를 했던 여성이다. 그리고 지금은 성매매 여성들의 아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돈을 받고 키운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돈을 받기 때문에 아줌마가 자신을 키워준다는 것이 모하메드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느낀 슬픔이었다.
 
모하메드는 이 세상에서 오직 로자 아줌마에게만 애착을 느끼며 아줌마에게만 사랑을 준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잠깐이라도 받는 것이 좋아서 상점에서 달걀을 훔치고 차들이 자기를 보고 의식한다는 기쁨 때문에 무단횡단을 한다. 버려진 아이, 세상과 아무 연고 없는 아이라는 아픔 때문에 그는 눈길을 끌려고 아무 데나 똥을 싸고, 로자 아줌마는 그 똥을 치우며 절망해서 소리소리 지른다.
 
모하메드의 유일한 친구는 하밀 할아버지다. 눈이 먼 그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책을 들고 있다. “나도 앞으로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거예요.” 모하메드는 그 앞에서 말한다. 할아버지의 유일한 삶의 끈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는 그 처녀에게 평생 잊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어.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단다.”
모하메드는 묻는다.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지나 로자 아줌마는 아팠다. 아이들을 더 돌볼 수 없었다. 모하메드는 그런 로자 아줌마를 지키기 위해 곁에 남아 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찾아왔지만 로자 아줌마와 모하메드는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그를 내쫓는다. 아버지란 사람이 죽었지만 모하메드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로자 아줌마는 지하실에 비밀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유태인 피난처’였다. 평생 게슈타포에게 마음으로 쫓긴 로자 아줌마가 전쟁 후에도 가져야 했던 완벽한 은신처, 그 속에서 로자 아줌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안전함을 느꼈다.
 
아줌마가 병들고 아프고 정신을 잃어갈 때, 모하메드는 ‘암은 아니라고’ 하면서 아줌마를 안심시키며 머무른다. 모하메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인 나딘, 남의 엄마 앞에서 자기 얘기를 한다.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할 말, 논리도 안 맞고 뒤죽박죽이지만 자신에게 진실인 말, 남들에게 하찮게 취급될 수 있는 아픈 말.
 
‘세상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바캉스 장소를 산과 바다 중에서 선택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 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듯이,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치나 베트남 전쟁 같은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을 선택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에 사는, 과거에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유태인 노파 같은 건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몇 백만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돈이 적게 드는 일일수록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
 
로자 아줌마는 죽어간다. 아줌마를 병원이나 기관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모하메드는 아줌마가 이스라엘로 돌아갈 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둘이서 지하실로 내려온다. 캄캄한 지하실에서 아주머니는 죽어가고 그녀 옆에서 모하메드는 함께 매트 위에 누워 있다. 죽음을 홀로 지키면서 다시 모하메드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모하메드는 죽어가는 아줌마의 곁에서 화장품을 들고 루즈를 발라주고 눈썹을 그려준다. 촛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붙여준다. 아줌마 눈앞에 히틀러 사진도 보여주고 얼굴에 뽀뽀도 해준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러 병 산 향수를 아줌마의 몸에 다 부어준다. 그리고 울긋불긋한 얼굴에 다시 화장을 해주었다.
 
그렇게 시체 옆에서 삼 주일을 지낸 다음 사람들이 진동하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그곳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들은 그녀가 아무리 아파도 그녀가 살아 있을 때에는 비명을 지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는 냄새가 나지 않으니까.’
 
이제 모하메드에게 남은 것은 전부터 애착을 가졌던 낡은 우산 하나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산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한 우산이었다.’ 그 우산을 안고 모하메드는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는다. ‘사랑해야 한다.’
 
이 책은 세상에 탯줄을 잇는 ‘사랑’에 대한 책이다. 상실에 대한 기록이고, 자기 앞의 삶을 주목 없이 묵묵히 외롭게 견뎌야 했던 쓰라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흔적 없는 사람들, 궁핍과 불행의 기억  

▲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이 책을 건네 받고 나서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는 맞고 자랐다. 엄마는 첫아이였던 언니를 때렸다. 왜 맞는지도 모르고 날마다 맞았다. 아침부터 맞기 시작해 쓰러져 눈을 떠보니 저녁인 때도 있었다. ‘넌 못생기고 쓸모 없는 아이’라는 욕설을 들었다. 언니는 맞기 전의 조마조마한 평화보다 맞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언제 맞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어른이 된 지금 ‘엄마는 왜 날 때렸어?’ 묻고 싶다고 했다. 평생 사과를 받고 싶었다고 했다. 가난하고 노동해야 했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엄마는 생활의 고됨과 분노를 유독 첫아이에게 풀어댔다. 그래서 그 언니는 항상 얼굴을 책으로 가리고 있었다고 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고. 또 자신이 끔찍한 아이고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랐다고 했다. 어른이 된 다음에도 누군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두리번거리면 ‘매를 찾는구나’ 싶어서 대거리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팔목을 엇갈려 몸부터 가렸다고 했다.
 
언니는 이 얘기를 밤을 새워 술잔을 앞에 두고 십 년 전 나에게 들려주었다. 세상에서 남에게 처음 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엄마한테 그 이야기를 말로 할 수 있을지, 기억도 못 한다는 엄마에게, 어릴 적 일로 뭘 예민하게 구느냐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을지, 말하면서 울었다.
 
나는 벨 훅스의 책에서 다음 구절을 읽을 때도 언니 생각이 났다.
 
“집안에서의 가부장제적 폭력이란, 보다 힘센 개인은 다양한 형태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힘이 약한 자를 지배해도 무방하다는 신념에 기반 한다. 광의의 가정폭력 개념은 여자에 대한 남자의 폭력, 동성 간의 폭력, 어린이에 대한 성인의 폭력을 포괄한다. 성차별주의자 남녀에 의해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가부장제적인 폭력의 현실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그들이 얼마다 자주 여자의 폭행 대상이 되었는지 실상을 말해줄 조직화된 집단적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지배자들은 남성․여성 관계이건 부모․자식 관계이건 간에 기존 위계 구조가 위협받을 때에는 언제라도 물리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폭력적 처벌이 가해질 것이라는 협박을 가지고 지배력을 유지한다.”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 “폭력을 종식시키기” 중에서
 
책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어떤 점이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언니를 울게 했을까? 웃게 했을까? 버려진 사람들. 목소리도 없고 사라져도 세상에 흔적 없는 사람들.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고통. 그 속에서 우산이든 타인이든 그 무엇이라도 끈으로 삼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애착을 가지고 싶었던 간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상에서 받지 못한 사랑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거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고, 또 그 사랑의 힘이 자신 안에 있고 그것이 자신을 의미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어 이 책을 끌어안았던 것이 아닐까?
 
세상의 화려함을 누렸던 서구의 한 작가가 끝내 떨칠 수 없었던 이주민의 궁핍과 불행의 기억, 그러나 ‘사랑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읊조리는 주문 속에서, 자신에게도 축복처럼 ‘사랑’이라는 주문을 걸고 싶지 않았을까? 삶이 아무리 풍요롭고 화려해도 고개 돌릴 수 없는 정직한 황폐함과 폭력은 있는 법이니까.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의지 앞에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던 작가와 독자는 그렇게 변방의 기억과 목소리들을 함께 만나게 하고, 계속 이 세상에서 지속해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더불어 되었을 것이다. ▣안미선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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