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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에서 책읽기> 김해자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 칼럼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www.ildaro.com 

 

그곳에는 해녀들이 살고 있었다

 

제주도가 고향인 친구가 말했다.

“육지 사람들은 바다를 그리워하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를 동경하지.”

 

대학에 입학해 처음 기차를 타 보고 강이란 것이 신기했다던 그 친구는 늘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 어머니는 해녀였다. 잔치에서 한번 뵌 친구의 어머니는 구릿빛 얼굴에 바위처럼 단단하고 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기록해야 하는데…”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친구였다.

 

작년 연말에 혼자 제주도 여행을 하다가 버스에서 무작정 내린 곳이 김녕 바닷가였다. 옥빛의 바다가 고와서 내렸는데 그곳에서 마침 돗제 축제가 있어서 김녕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이들은 두어 시간 남짓 마을을 안내하고 설명해주었다. 올레 20코스가 지나가는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해녀들이 살고 있었다. 스쿠터를 타고 바다로 가며 인사하는 늙은 해녀가 있었고 바닷가에 쪼그리고 앉아 생선의 허옇게 갈라진 배를 씻는 노구의 해녀도 있었다. 12월 말이었는데 바닷가에는 해녀들이 작업을 하느라 피워놓은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이곳은 제주에서 위치상 가장 북쪽이라 바람이 세고 척박하여 오로지 바다에 의지하고 산 곳이라 했다. 돈 되는 것은 바다밖에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 바닷가에 떠 내려온 미역을 가져다 팔고 와서 아침밥을 먹었다”고 했다.

 

지금 이곳에는 해녀가 200여 명 살고 있는데 거의 노인이다. 해녀가 혼자 살다 죽으면 외지인이 그 자리를 사서 낡은 집을 헐고 카페나 양옥을 짓는다. 그래서 마을에 군데군데 새 건물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50년을 살았다는 토박이 부녀회장은 “저긴 ○○ 할망이 살던 데고, 여긴 ○○ 할망이 살았는데…” 하면서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마을의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할망이 간 자리가 그렇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고장 나지 않는 것은 세월밖에 없어. 시간의 흐름에 다 변해가고… 요즘은 조왕도 부뚜막이 아니라 싱크대 위에 앉는다니까.” 하고 부녀회장이 농을 하자 모두 웃었다.

 

▲  김해자 <당신을 사랑합니다> (삶이보이는창)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김해자 지음, 삶이 보이는 창)라는 책을 떠올렸다. 민초들의 입말이 담긴 그 책에 한 제주도 해녀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잠녀라게. 좀녀, 좀네라고도 불렀시니. 일본 놈 시대에는 잠녀를 천시해서 해녀라고 막 불렀다게. 조무질 하는 사람들은 이녁이 천하니까 자식들한티 한 자라도 더 가르쳐서 뭍에서 벌어먹고 살게 하지 자식들 안 시키거덩. 어떡하든 내가 돈 벌어서 대학 시키고 공부시킨다. 고생스러우난 자식들한테 물려줄 일이 아니주게. 살림은 힘들고 자식을 키우다 보단 이 나이 되두룩 물질허게 됐주게. 물질한 지 60년이 넘었주.

 

내 고향은 제주 모슬포 바닷가라게. 예닐곱부터 물장구치고 놀다 열두세 살 되난 두렁박 차고 물질 시작했다게. 제주서 물질하는 잠녀들 다 그렇게 한다게. 풍덩풍덩 놀던 것이 평생 업이 된 거라. 어머니가 자식 열두 남매 낳았신디, 내가 막냉이라, 일할 중도 모르고 밥 헐 중도 몰랐다게. 조무질이야 갯가에서 살았시니, 날 더우면 바닷가서 놀당 그냥 배워졌주 뭐. 쪼맨헐 때부터 해나난(해봤으니) 늘었주게.]

         -“내 물깊이를 안다” 해녀 김석봉 전 <민중열전-당신을 사랑합니다>(192~193p)

 

당신의 물깊이를 알고 싶습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와 보는 검은 현무암 너머의 바다는 검푸르렀다.

 

“여긴 뗏목 타고 노 젓고 바다에 고기 잡으러 다니던 이들이 드나들던 항구라. 우리 어릴 때 시체가 많이 내려왔수다. 요 맞은편에 남자시체, 여자시체 나눠서 묻었는데…”

 

주위는 어둑하고 한기가 느껴진다. 뗏목 하나에 맨몸뚱이를 싣고 바다에 나가 이내 죽음을 당하더라도 살기 위해 풍파를 온몸으로 무릅쓰며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해녀의 노래도 그랬다. ‘너른 바다 앞을 재어/ 한길 두길 들어가니/ 저승길이 오락가락’(너른 바당 앞을 재연/한질 두질 들어가난/ 저승길이 왓닥갓닥)

 

부녀회장은 한쪽 마을길을 걷다가 말해준다.

“4․3 때 이곳에 대낮에 길에서 총질하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래서 친정에서 절대 이 동네로는 시집가지 마라 했주.”

 

그냥 미신이라고 웃고 마는 그이를 보며 제주도 친구를 다시 떠올린다. 친구는 4.3 사건의 유족이기도 했다. 4월이 되면 대학교 교문 앞에서 4.3 사건에 대한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자기 할아버지가 어떻게 학살당했는지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잔인하고 공개적인 성고문도 증언해주었다.

 

친구가 집에서도 쉬쉬하던 그 얘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고등학생 때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을 읽고 나서였다.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 몰랐지만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이야기,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고 했다.

 

이곳 또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마을의 길은, 바다풍경을 펼쳐놓아 외지인의 눈을 즐겁게 하는 올레 길과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깨어진 사기조각, 이름 없는 산, 한 그루 나무에도 이야기가 있었다. 아이를 둔 부모들이 자식의 무병장수를 바라며 깨뜨리고 간 영등물당 아래의 그릇조각, 어머니들이 짚을 이어다 초가지붕을 엮던 산, 먹을 것이 없어 꽃이 피기 전에 먹던 단맛 나던 삥 밭, 이곳에서 그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연 ‘해녀’였다.

 

큰당을 보게 되었는데 아직도 해녀들이 가서 기도한다는 그곳에는, 관목에 둘러싸인 컴컴하고 좁은 돌담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깊숙이 당산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해녀들의 나무는 경건한 침묵에 싸여 있었다.

 

[나는 늘 기도한다게. 성경 보고 혼자 중얼거리며 물질할 때나 잠들 때나 늘 자식허곡 손자들 죽은 자식들 위해 한다게. 축산항이 바람이 센 곳이라 높은 산도 없고 바람막이도 없져. 바람 불고 파도가 치면 지붕이 퍼덕퍼덕 울어대는 밤이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기나긴 겨울밤이도 나는 두 손 모으고 기도한다게. 하느님한테 다 편케 해달라고 기도한다게.] (201p)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바닷 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해녀의 가슴에 붙어 있는 전복 같고, 성게 같은 이야기들을, 헐리는 집처럼 쉬이 사라질 말들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를 키워주고 살과 피가 된 것들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 낮은 자리에서 톺아 되돌아보고 기억할 수 있다면. 잘 살고 싶다는 ‘동경’이 미처 뒤돌아보지 않은 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빛나고 있는지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아직 채 다 말하지 못한 비밀과 인내와 슬픔과 기쁨을, 그 일렁이는 바다 빛 같은 목소리를 우리가 깜냥껏 거둬들이고 갈무리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 딸들의 보잘 것 없는 기도가 오래된 어미들의 기도 앞에 서성이며 그이들 삶 앞에 오롯이 드리는 푸짐한 성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바람에 허리 굽은 오래된 나무 아래서 나는 서성였다.  ▣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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