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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레이시의 뉴욕 프로젝트 “문과 거리 사이” 

필자 가수정은 뉴욕에서 거주하며, 새로운 세대의 여성주의에 관해 뉴욕과 한국에서 작은 세미나를 하고 있다. 1월 헌터컬리지 컴바이드 미디어 석사과정을 마치고, 공공미술을 지원하는 단체 ‘크리에이티브 타임’에서 일하며 수잔 레이시의 뉴욕 프로젝트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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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9일 뉴욕 브룩클린 파크 플레이스의 “문과 거리 사이” 이벤트 현장   © 가수정 
 
10월 19일 뉴욕 브룩클린의 파크 플레이스 거리의 블럭 브라운스톤(계단식 입구의 미국 전형적인 주거형태) 계단 현관 앞에는 노란 스카프를 맨 수백 명의 뉴욕여성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이 여성들의 목소리가 오후 4시 30분부터 서서히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과연 이들은 무엇을 위해, 왜 모인 것일까?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이야기를 이토록 열심히 나누는 것일까?
 
공공미술 “문과 거리 사이”(Between the door and the street)
 
2010년에 안양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우리들의 방-안양여성들의 수다”라는 작업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수잔 레이시는, 미국 L.A.를 기반으로 사회참여 공공미술을 약 40년간 지속해 온 현대미술가이다.
 
레이시는 성범죄와 차별, 정체성, 빈곤과 불평등 문제, 노동과 나이와 관련한 다양한 사회 문제를 설치, 비디오, 퍼포먼스 등의 방식을 통해 다루어왔다. 또한 지역사회 조직이나 기관들과 긴밀하게 협업(Collaboration)하며 시민과 대화의 창을 만드는 새로운 공공미술을 제안하는데 집중해왔다.
 
“문과 거리 사이”(Between the door and the street)는 뉴욕의 78개 여성기관, 또 이 기관들과 관계를 가진 390명의 여성들이 주도한 프로젝트로, 뉴욕에서는 첫 번째로 이루어진 레이시의 이벤트이다.
 
지난 5월부터 준비해 온 이 프로젝트는 페미니스트 화가 주디 시카고(Judy Chicago)의 “디너파티”(1979)를 소장하고 있는 브룩클린 미술관의 엘리자베스 새클러 여성미술센터(Elizabeth A. Sackler Center for Feminist Art)와, 공공미술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크리에이티브 타임’(Creative Time) 공동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이번 뉴욕 이벤트는 작가의 개인의 프로젝트라기보다, 수잔 레이시가 시발점이 되어 뉴욕의 여성주의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여성들은 어떻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걸까
 
레이시의 작업은 우리가 기존에 경험해왔던 공공미술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공공미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 조각이나 페인팅 같은 ‘장르 미술’(Genre Art)에 속한 것들일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레이시는 눈앞에 보이는 조형적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람’을 매개체(Medium)로 대화와 토론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공공미술로서 제안한다.

▲ 브룩클린 미술관 계단식 현관 앞에 설치된 텍스트.  인권, 여성, 인종 차별 등의 사회 문제에 대해 작가 수잔 레이시가 시민들-관객들에게 던지는 공개 질문이다.    © 가수정 
 
수잔 레이시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작가는 ‘대화를 위한 무대’(Stage)를 만들고 참여자(Participants)들 간의 ‘대화’로 그 무대를 채워나가는 것이다. ‘연극성’은 그녀의 작업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레이시의 작업은 대부분 작업 참여자의 대화이다. 공연자(Performer)와 참여자 간의 즉흥연기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작가와 ‘크리에이티브 타임’은 이번 대화의 장을 만들기 위해, 뉴욕의 다양한 여성단체와 연락하고 회의를 거쳤다. 대화 참여자를 선정하는 방식은 레이시가 모은 19명의 프로젝트 조언자단을 기반으로(이들 모두 다양한 계층의 여성단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추천 명단을 받거나, ‘크리에이티브 타임’ 측에서 직접 조사한 수백 개의 뉴욕 여성단체 목록과 뉴욕의 인종별 인구밀도 통계치를 바탕으로 하였다.
 
5월부터 시작된 참여자 모집 과정은 8월부터 본격화되어, 위의 목록을 바탕으로 직접 연락을 취해 단체들의 참여 의사를 확인한 후, 각 단체 리더들의 모임을 갖고, 전체 참여자를 포함하여 2회 이상 리허설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참여자들의 대화 방식에 대해 의견을 얻었고, 조율 과정을 거쳐 드디어 10월 19일에 그 모습이 구체화되었다.
 
이민자, 남성페미니스트 등 다양한 그룹의 대화
 
“문과 거리 사이”가 진행되는 자리에 모인 여성단체는 총 78개로, 참여자는 390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120명의 행사 자원봉사자들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벤트를 지원했다. 각각의 단체들이 한 명의 진행자와 구성원들로 팀을 이루었고,대화의 주제는 정해져 있지만 그 내용은 단체 성격에 맞게 자유롭게 끌어나가는 방식이었다.

▲ “문과 거리 사이”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그룹 별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 가수정 
 
‘아이 돌보미들의 모임’(Regeneracion Childcare Collective) 그룹은 regeneracion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남미계 이주자 모임이다. 미국 남미계 이주자의 증가, 이민자로서의 생활과 여성으로서의 고민, 사회 불평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라운스톤 현관 앞의 브룩클린 남성들’(Brownstone Brooklyn Men on a Stoop)은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few good men’으로, 여성주의자 남성들을 지칭한다. 이 그룹은 남성 참여자들로 이루어진 몇 안 되는 단체 중 하나였고, 여성주의자로서 남성의 위치와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처럼 흥미롭고 다양하며 생생한 주제를 가지고 수많은 대화들이 동시에 오갔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참여한 78개의 그룹 간에는 적극적인 소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또, 야외행사였기 때문에 약 1시간 15분 가량의 대화 시간 동안 관객들이 각 그룹의 대화 내용을 듣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하지만 이벤트 전에 이슈가 되었던 ‘공연자를 위한 임금 문제’와 어린 자녀를 가진 이벤트 참여자들을 위한 ‘임시 탁아’에 관한 이야기들이 미리 페이스북과 공개 편지를 통해 다루어진 점은, 관객들에게 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공연자는 참여자들 사이에 대화를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무보수로 고용된 여성들로서, 예술가와 여성의 노동과 임금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주최 측과 작가에게 공개 편지를 보냈다. 또, 이벤트 후 마련된 블록파티(한 블록 자체를 모두에게 개방하여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형태의 거리 행사)는 관객과 참여자들 간에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그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하였다.
 
시민들이 ‘관람자’를 넘어 ‘제작자’가 되는 미술
 
공공미술로서 “문과 거리 사이”는 분명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대부분 공공미술이 공공을 ‘위한’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에 ‘의한’ 작업의 역사를 지니게 된 것은 공공미술에 대한 비판적 운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미국에서도 채 50년이 되지 않는다.
 
“문과 거리 사이”가 흥미로운 지점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 정부의 지원 아래 공공미술을 생산해 낼 때, 그 미술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반영해왔는가’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목소리를 대안적 실천으로서의 미술로 구현해내기 때문이다.

▲  2013년 2월 3일  영국 테이트 모던 탱크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실버 액션”(Silver Action).  미술 작업인 동시에 여성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 가수정 
 
여기서 수잔 레이시는 미술가이자 사회운동가(Artist as Activist)로서 시민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열린 공론의 장을 제공한다. 참여자(시민)에게 작품의 관람자를 넘어 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제작자가 되는 기회를 줌으로써, 이전의 권위적이고 남성적인 공공미술에 대항하며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여성적 시각과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수잔 레이시는 현재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제리 브라운 시장의 교육 내각으로 일하고 있으며, 공공미술 기획책임자로서 시의 공공미술과 교육정책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여성주의 미술가의 의견과 개인 프로젝트들이, 이미 대안 제시를 넘어 현실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협력기관
 
크리에이티브 타임(Creative Time): ‘크리에이티브 타임’은 뉴욕에서 공공미술재단(Public Art Fund)와 함께 공공미술을 지원하는 가장 큰 미술단체 중 하나이다. 더 나아가 기존의 공공미술이 갖고 있는 관료적이고 전통적인 형태를 벗어나 시민의 참여를 좀더 유도하는 장을 마련하고, 미술 전시보다는 다양한 행사를 중심의 프로젝트를 지향하고 있다.
 
브룩클린 미술관 엘리자베스 새클러 여성미술센터(Elizabeth A. Sackler Center for Feminist Art): 브룩클린 미술관은 여성미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뉴욕 브룩클린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수잔 레이시의 칼아츠(CAL Arts) 대학 스승이기도 한 주디 시카고의 “디너파티”를 소장하고 있는 이 미술관의 엘리자베스 새클러 여성미술센터는, 20세기에 시작된 여성운동이 40년간 현대미술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정의한다. 또 여성주의 미술을 위한 교육 환경을 마련하고, 관련 전시회를 꾸준히 기획해왔다. _가수정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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