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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노라노, 우리의 문제적 그녀 
 
새 연재의 필자 김영옥은 일찍이 시와 소설의 문장들에 매료되어 문예학을 전공, 그러나 현실의 권력 구조를 통찰하지 않는 문장들의 허무함을 깨닫고 여성주의에 입문, 철학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이라는 명제를 젠더 관점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오랜 시간 장소와 몸, 미학적 표현에 몰두했고 현재는 심미적 감수성과 현실 개혁의 의제를 통섭적으로 함께 고민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칼럼을 열며: ‘하나이지 않은 지혜들’에 주목하기
 
한국사회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와 기대수명 연장이라는 현상에 직면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젊음을 찬양하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노년을 잉여적 존재로 간주한다. 때문에 '나이듦'을 아름답고 성숙한 생의 한 단계로 받아들이고, 그동안 살아낸 생의 모든 다른 단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통합적인 자아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의학의 발달과 식생활의 개선으로 노년기는 급속도로 길게 늘어나고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가 알지 못했던 현상이다. 노년당사자들은 이 긴 생의 단계를 어떻게 하면 존엄성을 잃지 않고 의미 있게 잘 살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각자 살아온 삶의 여정에 따라, 세계관이나 생명에 대한 태도에 따라, 여러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답들은 우리가 제대로 듣고 잘 전수해야 할 다양한 색과 향의 지혜들이다.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은 바로 이 ‘하나이지 않은 지혜들’에 주목하려 한다. 젊어야 아름답다는 뷰티 산업의 계략이나, 소비 능력이 있어야 존엄하다는 자본주의 논리, 사회적으로 유익한 활동을 해야 의미 있다는 유사 공공성 논리에 강요당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여정과 리듬에 맞게, 현재의 이 노년이라는 생의 무대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나이든 삶을 사는 다양한 노년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노년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왜곡 없이 발화되고 그에 합당한 이해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작은 토대를 마련하고 싶다.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을 하는 주체는 아마도 나이를 덜 ‘먹은’ 여성들일 수 있다. 칼럼의 제목은 ‘오지 않은 미래’인 ‘그 노년’이 나이를 덜 먹은 당신의 시간적 삶 속에 이미 깃들어 있음을 가리키고자 한다. 그리고 시간적 존재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 느껴보고자 한다.
 
노라의 선택 “뻔히 아는 길을 왜 가겠습니까?”
 
올해 오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노라노>(Nora Noh, 2013, 감독 김성희)를 만나고 온 날은 종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의 질문에 답하는 그녀는 스크린이 보여준 그녀를 더욱 입체감 있게 보완하며 ‘가슴 설레게 하는 선배’ 하나 드디어 확실하게 만났다는 믿음을 주었다.

▲ 다큐멘터리 <노라노>(Nora Noh, 2013, 감독 김성희, 프로듀서 김일란)의 한 장면. 
 
최근의 패션 유행과 사람들의 옷 입는 경향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그녀는 거의 도도한 느낌이 들 정도로 확신에 차서 말했다. ‘요즘은 사람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이 사람을 입는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고 난 후 만일 그 사람보다 옷이 먼저 떠오른다면 그건 그 사람이 옷 입을 줄 모른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평생 옷 만드는 일에 몰두한 사람의 철학으로 나무람이 없지 않는가. 나는 전문가로서 그녀가 보여주는 자신감 또는 자기애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었다. 거의 자랑스러웠다. 너희가 옷을 아느냐? 아니요, 잘 모릅니다. 가르쳐 주시어요. 기꺼이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이 느낌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온 그녀의 긴 속눈썹에서 시작되었다. 팔십이 넘은 여성이 긴 속눈썹을 붙이고 한껏 귀족적 자태를 뽐내는 모습은 일단 보기에 좋았다. 팔십 구십까지 화장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속눈썹은 좀 다르다. 오십 대 여자로 산 지 꽤 되는 나로서는 그녀의 ‘내 멋은 내가 안다’는 태도가 사랑스러웠고 그만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로도 여러 사람에게, 물론 주로 여성들에게, 노라노의 이야기를 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고 난 지금 60대 후반에 들어서니 새삼스레 주눅이 든다는 친척 언니에게도, 일보다도 두 아들 키우고 살림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는 후배에게도, 전범(典範)이나 모델이 있으면 좋겠다는 페미니스트 후배에게도, 세미나를 같이 하는 학생들에게도 노라노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패션 디자이너로 평생을 산 노라노. 내가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항상 ‘두 갈래 길’로 시작되었다. 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한 결혼. 그러나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해보기도 전에 군인이 되어야 했던 남편. 남편 없이 하루에 다섯 번 밥상을 차리며 시부모를 모시던 시집살이.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문과 함께 시부모에게 강제 이혼을 당하고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으나, 전쟁 후 살아 돌아온 남편. ‘당신을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전쟁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그의 낭만적 사랑 고백에 노라노는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한다. 그러나 본인이 쫓아냈던 며느리를 대면하자마자 납득할 수 없는 가부장적 훈계를 시작하는 시아버지를 앞에 두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여있다. 하나는 안 가 봤어도 너무나 뻔히 짐작이 가는 길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길은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길이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어떤 길을 가겠어요? 당연히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길을 가지요. 뻔히 아는 길을 왜 가겠습니까?”
 
다큐 <노라노>에서 내게 가장 감동을 준 건 바로 이 말을 하는 그녀의 태도였다. 물론 아무리 다큐라도 상황 조절이 가능한 상태에서 인터뷰한 것이고 또 그 인터뷰 내용을 연출한 것이니, 실제로 몇 십 년 전 스물 몇 젊디젊은 노라노가 어떤 태도로 어떤 생각으로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은 늘 재구성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 이미지를 완성시키기 위해 기억에 기대지 않는가. 그러나 영화에서 재현된 젊은 얼굴의 노라노는 전혀 알 수 없는 그 미지의 길을 가겠다고 망설임 없이 일어나 문지방을 넘는다. 당돌하고 간결하다. 그렇게 그녀는 “노라 노”, 한국의 ‘노라’가 되었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 대해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가부장제 드라마의 인형이 되지 않겠다고 집을 나선 노라까지다. 그 뒤로 노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최초’라는 면류관을 쓴 여성들
 
한국에도 사실 노라 노 이전에도 노라가 있었다. 완전히 집을 나가버리지는 않았지만 나혜석 역시 충분히 입센의 노라와 같은 계보에 서 있는 자매다. 나혜석의 비극적 종말은 시인 김승희가 토로했듯이 자기 목소리로 살려는 여성들의 무의식에 ‘행려병자의 노상 죽음’이라는 일종의 트라우마를 새겨 넣기도 했다. 그래도 여성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험하고 어두운 파시즘과 군사독재와 가부장적 국가주의의 정글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기’를 발견한 여성들이 ‘자기애’를 주장하면서 여성의 ‘인식애’를 사회적 정치적 일로 공식화하고자 ‘행려병자’의 두려움과 싸워 온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이제 겨우 3세대 정도로 이어졌을까.
 
여전히 중산층의 삶이나 도덕주의 그리고 여성주의 이념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여성주의자들도 많다. 용감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살지 못했다, 부끄러워하는 선배들도, 아예 성찰적 질문 자체를 생략해버리는 선배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음험한 집단주의를 가로지르고 거스르며, 여성에게도 개인이라는 개념을 통용 가능한 것으로 성립시킨 것, ‘자기만의 방’을 사회적 의제로 통과시킨 것만으로도 기적 아닌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감했고 정직했다는 증거 아닌가. 아니, 그래도 우리에게는 집을 나간 노라가 담대하게 자신의 길을 헤쳐 나아간 구체적 여정이 꿈으로 남아있었다. 부정형의 형태가 아닌 긍정형의 형태로 우리 앞에서 웃으며 손짓하는 노라가 그리웠다.
 

▲ 노라노는 대한민국 1세대 패션 디자이너. 한국 최초 패션쇼, 최초 디자이너 기성복, 최초 미국백화점 입점 등 수많은 ‘최초’로 설명된다.  © 다큐 <노라노> 
 
나는 이 지점에서 ‘노라 노’를 다시 만난다. 노라 노, 1928년 3월 21일 생. 본명은 노명자이며 대한민국 1세대 패션 디자이너. 한국 최초 패션쇼(1956), 최초 디자이너 기성복(1963), 최초 미국백화점 입점. 최초 <보그> 표지 등 수많은 ‘최초’의 형용사로 설명되는 그녀. 고관 부인들, 연예인, 교수, 고급 기생에 이르기까지 ‘최고’ 인물들이 그녀의 옷을 입었다, 라고 인터넷 백과사전은 알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아우라처럼 감싸고 있는 ‘최초’는 고종황제의 영어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 국장이었던 아버지, 최초 아나운서였던 어머니의 ‘최초’를 계승하고 있기에 더욱 주목할 만하다.
 
여러 개의 ‘최초’ 면류관을 쓰고 있는 여성의 삶의 무게는 어땠을까? 이런 질문이 들었고, 이 질문을 품고 나는 그녀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를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여성으로 산 다른 동시대인이 떠올랐다. 1929년생인 쿠사마 야오이와 1933년생인 오노 요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난 이 여성들은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알려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주홍으로 물들인 머리로 땡땡이 무늬 원피스를 입고 종일 여성들의 세계를 그리는 쿠사마 야오이(그녀의 드로잉 제목은 모두 여성과 관련된다), 그녀는 가부장적 도덕 관행과 쾌락에 묶여있던 가족 때문에 광기의 삶을 선택했고(내게 그녀의 삶은 거의 선택으로 보인다), 오노 요꼬는 침착한 비판적 성찰과 실험으로 가부장적, 폭력적 국가주의를 거스르는 다양한 미학적 실천의 삶을 살아왔다.
 
‘최초’ 면류관을 쓴 여성들이 자신의 삶의 무게를 느끼고 그 무게를 살아내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다. 아직 채 만들어지지도 않은 길에 발을 내딛는 사람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무엇을 얼마큼 기대할 권리가 있는가. 새로 생성되는 그 길은 시간이 지나면서 ‘뻔히 다 아는 저 길’이 어쩔 수 없이 자기 변신을 꾀할 수밖에 없도록 자극하고 있을까. 새로 생성되는 그 길이 시간이 지나면서 ‘뻔히 다 아는 저 길’과 은연 중 점점 더 닮은꼴이 되는 일은 없을까.
 
아직 포착되지 못한 동시대 여성들의 ‘중얼거림’
 
1956년 노라 노가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던 해는 영화 <자유부인>이 개봉되던 해이기도 하다. 다큐 <노라노>는 노라노가 1960~1970년대에 한국 영화 생산에 얼마나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준다. 1950~1970년대에 새로 탄생하고 있던 여성 주체의 형성에 노라노와 그녀의 패션이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은 상당할 것이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패션문화를 기록하고 보관해야 할 역사적 유물로 간주하지 않은 나라라서 이 분야에 대한 박물관적 계승이나 문화연구가 매우 미흡하다. 그래서 더욱더 노라 노, 그녀의 기억과 해석, 증언이 중요하다.
 
이때 기억과 해석, 증언은 ‘그때’와 ‘지금’이 만들어내는 제3의 시공간, 성찰적 재구성의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쓰기가 될 것이다. 그때 인식하지 못했다 해도, 이 제3의 성찰적 시공간에서는 보이고 들리고 인식되는 장면들, 동시대인들,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포착되고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중얼거림들이 있을 것이다.
 
그 장면들에는 ‘고관 부인들, 연예인, 교수, 고급 기생’뿐만 아니라 1960~1970년대 한국 수출의 ‘자랑스러운 역군’으로 혹독한 노동조건 속에서 자기를 지켜내고자 투쟁했던 여성노동자들도 있을 것이고, 옷을 만드느라 밤낮 없이 가위질과 바느질을 했던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도 ‘일하는 여성’으로서 그 전에 없던 길을 한 뼘 한 뼘(아니, 한 땀 한 땀) 스스로 만들어가며 나아간 사람들이다.

▲ 노라 노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함께 채집하고 발굴해야 할 다른 형상들이 있을 것이다. © <노라노> 
 
영화 속에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장면은 ‘단순 삽입’ 정도로 그친다. 공존하거나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다. 해외에 소개하는 옷을 만들 때는 반드시 국내 생산 직물을 사용했다는 노라 노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그 실을 잣던 동시대 다른 여성들의 삶을 껴안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부당할까. 당시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노라 노의 역사/쓰기, 노라 노와 함께 후배 여성들인 우리가 함께 채집하고 발굴하고 짜는 그녀의 기억에는 이 또다른 여러 동시대인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게 아닐까.
 
사회학적으로 ‘문제적’이라는 형용사는 부정적 의미겠지만 철학적으로 ‘문제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유의 흐름을 촉발시키는, 모두들 골똘히 머리를 맞대고 함께 생각하고 풀어야 하는 어떤 새로운 질문의 틀을 의미한다. 후자의 의미에서 노라노는 우리의 문제적 선배 여성이다. 그녀가 내디딘 저 다른 길의 형상은 아직 채 밝혀지지 않았다.  ▣ 김영옥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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