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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인터뷰] 미국의 행동주의 미술가 수잔 레이시 
 
지난 달 19일, 뉴욕 브룩클린의 파크 플레이스 거리에서는 80여개 뉴욕의 여성단체와 모임들, 그리고 390명의 여성들이 모인 가운데 “문과 거리 사이”(Between the door and the street)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 공공미술 작품의 ‘시발자’(始發者)인 현대미술가 수잔 레이시를 인터뷰하여, 여성주의 미술에 관한 그녀의 견해와 경험을 들어보았다. (글, 인터뷰_ 가수정)

▲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의 글로벌 프로젝트 연구 프레젠테이션    © 크리에이티브 타임 
 
행동주의 미술, 지역 커뮤니티를 움직이다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는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여성주의자의 이름으로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작업해온 미술가이다. 나는 2009년 뉴욕의 공공미술지원기관 ‘크리에이티브 타임’의 이벤트 “크리에이티브 타임 서밋”(Creative Time Summit)을 통해서 처음으로 그녀의 작업을 직접 접하게 되었다. 그때 레이시는 오클랜드 프로젝트에 관해 10여분 가량 연설을 했는데,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나 작업이 실현된 과정이 매우 인상 깊었다.
 
오클랜드 프로젝트는 작가가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청소년 층을 중심으로 다양한 협업자들과 진행한 작업이다. 당시 오클랜드 주는 최근 20년 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청소년 빈곤층이 급격한 증가했다. 전체 학생의 95%가 유색인종(아프리카계 55%, 남미계 20%, 아시아계 20%)인 공립학교에 재정 지원을 철폐한 것과, 오클랜드 주 감옥에 수감된 사람의 삼분의 일이 18세~24세 사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이라는 사실에 문제 의식을 가진 것이 이 작업의 주요한 시발점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레이시는 청소년 계층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그들 스스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 작업은 ‘행동주의 미술가’로서 작가가 지역사회와 혼연일체가 된 성공적인 미술작업이라고 평가 받는다. 그 이유는 수잔 레이시라는 미술가가 철저히 현실에 몸담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 참여자들의 자발성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이시가 2010년에 한국에서 진행한 ‘안양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 역시 작가가 모든 것을 총괄하되 참여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안양 지역여성들이 작업의 제작자로 참여하는 기회를 준 작품으로 보여진다. 특히 공공미술 퍼포먼스로 진행된 ‘안양 여성들의 노동환경에서 바뀌었으면 하는 건의’ 중에서, ‘여성의 블라우스에는 적합하지 않은 핀으로 된 뱃지를 바꾸었으면 한다’와 같은 작은 목소리까지 귀 기울여 듣는 섬세함이 느껴졌다.
 
이 인터뷰는 10월 19일에 진행된 수잔 레이시의 뉴욕 프로젝트 “문과 거리 사이”(Between the door and the street)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작가로서 그녀의 작업과 생각에 대해 대화를 나눈 내용이다. 레이시의 이야기는 여성주의 미술의 주요한 쟁점들을 통과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여성주의 미술작업은 더 급진적이 되었나요, 아니면 조금 보수적이 되었나요? 당신의 작업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면,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해주세요.
 
여성미술이라는 범주는 ‘여성주의’와 같이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그렇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주류 여성미술활동을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 이 용어는 한국 미술계에서는 백남준을 통해 수입된 전시 “휘트니 비엔날레 한국전–1996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소개되었으며, 미국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전시였다. 한 개인의 관심사와 정체성-특히 문화적 정체성-이 곧 사회를 반영한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당시 다인종 다문화 현상을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와 ‘행동주의’(Activism)입니다.
 
여성주의 예술가의 행동주의는 아직까지 역사적으로 공정하게 검토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초기 여성주의 예술가들의 ‘행동주의’가 인종차별에 반대하거나 미디어를 비평하는 것과 같은 다른 사회운동으로 분류되었고, 공공영역에서 실험된 까닭에 여성미술이 아니라 공공미술로 보여졌기 때문이지요.
 
저의 작업도 여성주의 미술이라기보다는 주로 행동주의자의 공공 퍼포먼스나 사회운동으로 다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제 작업은 초기 여성주의 미술에서 여성들 사이의 관계나 역할에 관해 다루었던 기획들과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 10월 19일 뉴욕 프로젝트 “문과 거리 사이” 팜플렛 표지     © 크리에이티브 타임 
 
‘여성주의’ 전체를 두고 무엇이 보수적이고 무엇이 급진적인가를 묻는다면, 그 또한 쉽게 정의하기 어렵겠네요. 미국 문화에서 무엇이 급진적인가에 대한 개념은 여성운동이 태동한 시기 이후에 크게 바뀌었습니다. 당시의 운동들(Activities)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특별히 급진적으로 보이기 어렵지요. 지역사회를 조직하는 활동을 예로 들어보지요.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그가 지역사회를 조직한 주체였다는 사실은 급진적 좌파주의 사례로 보여집니다. 반면, 제가 매일 준비하고 조직하는 것들은 진보정치의 목소리를 기록해 보관하는 많은 도구 중의 하나로 이야기되겠죠.
 
여성주의에도 진보와 보수가 갖는 입장의 스펙트럼은 항상 있어왔고, 여기에는 극보수파라고 불리거나 반(Anti)여성정치학이라고 이야기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아니타 브라이언트(Anita Bryant)는 여성주의 담론에 참여해왔지만, 그녀는 진보적인 노선을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보수파이지요. (아니타 브라이언트는 미국의 팝 가수로, 동성애 인권운동에 반대하는 정치적 활동으로 유명하다.)
 
저의 작업의 경우엔, 적어도 저의 공공 프로젝트들은 사회의 억압과 불평등을 드러내고자 하는 진영 속에 꽤 견고히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개인적이거나 미술 분야와 연관된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작업들도 해왔지만, 작품이 공공의 영역에 들어가거나 미술관계자 이외의 사람들과 함께할 때에 저는 사람들의 관심사와 처한 현실을 이야기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었지요. 사회 불평등 문제도 여성단체들로부터 막 표면화되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그러한 폭력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관심을 촉구하는 일이 급진적인 것이었지요. 오늘날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가 국제적인 차원으로 훨씬 깊이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은 아마도 충분치 않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재 여성에 대한 폭력이 다른 국가들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한국과 스페인에서도 큰 규모의 집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공공의 인식을 전환하는 것’과 ‘다양한 지역의 특성 안에서 변화를 이루는 것’ 두 가지 모두를 목적으로 합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지역마다 양상이 다르지만, 폭력에 대해 보다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고, 변하지 않은 상황을 변화하게 만들고, 사회적 통념들에 스스로 도전하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활동입니다.
 
-오클랜드 지역 청소년 커뮤니티와 오랫동안 깊이 있게 작업한 프로젝트가 있지요? 당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커뮤니티와 함께 작업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클랜드에서 작업할 때, 내가 청소년 문화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었어요. 배워야만 하는 것이었죠.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다름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들이, 정치와 예술 그리고 나의 작업을 진행시키는 ‘질문의 목록’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 오클랜드 프로젝트 1991-2000   © 수잔 레이시     
 
“문과 거리 사이”의 경우를 보면, 나와 내가 함께 일한 다른 사람들 간에 많은 유사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구학적으로 가까운 지점에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지만, 그것이 꼭 주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저는 나와 같은 인종이나 같은 세대의 사람들보다도, ‘오바마 케어’(오마바 정부가 약속한 국가의료혜택)를 지지하는 젊은 행동주의자들과 더 많은 공통점이 있어요. 경험이 다 다르지만, 내 작업의 기반으로서 이러한 경험들이 ‘공유될 수 있는 가치’가 되길 기대합니다. 우리의 안건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합의가 필요한 ‘다름’은 어디쯤에 있을까요? 억압과 싸우기 위해 합의가 필요하다면 더 통합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작업에서, 저는 뉴욕이라는 글로벌 도시에서 현재 여성주의가 어디쯤 있는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민의 기회가 주어지고, 상이하고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매우 소수의 지역들이 있어요. 뉴욕은 이러한 도시들 중 하나이죠. 또 수많은 다양한 운동들이 일어난 곳이기에, 여성들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그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도시라고도 볼 수 있고요.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누가 뉴욕의 여성운동가이고, 무엇이 그들을 이에 동참하게 하였는가? 이들은 유사한 문제를 두고 일어난 과거의 운동들과 현재 자신의 활동의 연결 지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주와 세계화 시스템 속에서 억압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성장해왔나?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젠더(gender)에 대해 이야기하는 조언자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 정현경씨도 이들 중 한 분으로, 저는 그녀의 활동을 존경해왔어요. 제가 프로젝트를 위해 만난 여성들도(한 명의 남성을 포함하여) 뉴욕의 규모를 감안해 광범위한 관심사들을 고려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여성들은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진화해가는 기획 과정에서, 자신이 흥미를 가진 지점에 대해 스스로 참여하기로 선택한 것이지요.
 
또한 이 프로젝트는 그 시작부터 여성운동단체와 활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문제 제기들과 관심사를 표현하고, 그 주제의 범위를 전체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1백여개 여성단체를 모집하고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연구와 출판, 정책, 서비스와 저항활동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험과 관심사들을 소규모 그룹들을 통해 함께 나누어 보자고 요청했어요. 참여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행사 기간뿐 아니라 이후에도 연결될 수 있도록 계획과 관점을 지원하기 위함이었지요.
 
-‘크리에이티브 타임’과 진행한 뉴욕 프로젝트 “문과 거리 사이”에 대해 당신 스스로 정의하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에서 작품 전체의 소유권을 갖기보다,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으로 명시했더군요. 여기에 대해 좀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 정도 규모의 작업을 한 작가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솔직히 말해, 어떠한 소규모의 정치적인 공공 프로젝트도 개인의 프로젝트일 수는 없어요. 저는 사실상 이러한 작업에 하나의 크레딧(어떤 프로젝트나 일에 공식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이름을 올리는 것)을 얻으면서 관여하는 것이지요. 이런 프로젝트들은 각기 다른 경험을 가진 다양한 직업군의 전문 지식인들이 관여하기 때문에, 저작권은 상황에 맞게 여러 방식으로 분배됩니다.
 
예를 들면, 마가리타 졸리(Margaretta Jolly) 박사는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런던의 현대미술갤러리)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전문 지식을 토대로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 기관, 협업자들과 함께 작업의 중요한 틀을 만드는데 기여했습니다. (“사랑과 투쟁 속에서: 현대 여성주의에 보내는 편지 In Love and Struggle: Letters in Contemporary Feminism”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편지와 이메일 네트워크를 조사한 논문으로, 2008년 영국 페미니스트와 여성연구조합상을 수상했다.) 운동가들과의 대화는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비디오로 촬영되었고요. 저는 그녀가 진행해 온 영국여성운동 역사에 대한 미디어와 재현 연구의 큰 부분이 이 퍼포먼스에 제공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문과 거리 사이” 프로젝트에서 이러한 작업을 미술로서 선보이고 마지막까지 이끌어간 주요 추진자인 것은 맞지요.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미술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직업상 한번도 저작권의 측면이나 작업 진행 과정에 대해 숨긴 적이 없어요. 여기엔 중요한 역사적 모델들이 있고, 문화와 정치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들이 계속 불거져 나오고 있지요. 예술가는 어떻게 작업을 하는 걸까요? 그들은 어떤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무슨 쟁점이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걸까요? 행동주의자로서 저는, 한 개인으로서 작업을 통해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안들에 전문가도 아닙니다.
 
오클랜드의 청소년들이 그들 스스로 다양한 비디오 테잎을 만들어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요. 그렇지만 나는 미술작업 제작 과정과 이를 공공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관해 많은 전문가들을 알고 있으며, 이런 현안에 대해 많은 연설을 하고 집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 저작’들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관한 문제는, 누가 누구를 어떻게 말하고 묘사하고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미술계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천재’라는 개념에 뿌리를 둔(단일 저작권이 일반화된) 시각예술과 달리 연극이나 과학 연구에서의 저작 관례는 이처럼 저작권자가 분명하지는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내가 작가라기보다는 ‘시발자’(始發者, initiated by) 라는 중요한 단어를 선택한 이유입니다.

▲ 수잔 레이시와 ‘크리에이티브 타임’ 총전시기획 책임자 나토 톰슨(Nato Tompson) ©크리에이티브 타임   
 
-“문과 거리 사이” 프로젝트에서 뉴욕의 인종별 인구와 같은 수치와 데이터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 보여집니다. 이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인가요, 수치나 데이터 너머의 것을 말하기 위함인가요?
 
우리가 뉴욕의 인구 수치를 사용한 것은 다양한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었어요. 제가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서 한 “실버 액션”(Silver Action) 프로젝트는 참여자의 민족과 인종의 다양성이 부족했다는 부분에서 비판을 받았어요. 우리는 인종적으로 분리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소수민족과 인종을 포괄하여 보여주는 작업은 꼭 이루어 보고 싶었던 도전이었지요. 데이터 수치들은 백인 중산층 여성들만 대표하거나 다른 인종들이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1972년부터 저의 작업은 ‘다양성’에 대한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종, 직업, 계층이 다른 여러 참여자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을 발전시켜왔고요. 그 중 하나가 모임이나 단체들, 조언자들, 그리고 지지층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가 기록하고자 하는 다양성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것일까요? 그 외의 방법으로 프로젝트 조직원들이 자신의 능력에 도전하도록 하는 기술을 쓰기도 하는데요, 자신의 네트워크를 넘어서 새로운 참여자들을 모으도록 하는 것과, 수치화되어 보여지는 인구 통계에 반하여 자신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평가하는 작업이지요. 이러한 과정은 참여자나 관객들을 완벽하게 계획한 대로 프로젝트에 끌어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작업은 연극적이고 시각적으로 굉장히 강렬합니다. “문과 거리 사이”에서는 어떻게 시각적 효과를 고안해냈나요? 당신의 작업에서 중요한 ‘대화’라는 요소를, 이 시각적 효과가 어떻게 강화시킨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 부분이 제 작업에서 자주 잘못 이해되고 있는 지점이에요. 저는 시각적 이미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이러한 측면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작업에 대해서는 다소 불만족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작업의 일시적이고 개념적인 구조에도 비슷한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작업을 통제할 수 있는 연극 환경이나 필름 세트에서 작업하는 감독들과 달리, 저는 제가 필요로 하는 자원들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문과 거리 사이”는 시각과 청각 요소들이 저희가 가진 예산으로는 많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어요. 저는 좀더 시간적인 여유와 큰 규모의 기술장비와 무대 예산을 가지고 작업하길 원했지요. 또 이 프로젝트를 위해 일한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보수를 드리고 싶었지만,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고 우리가 가진 돈과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어요. 이 작업의 의미와 진정한 카리스마는 참여자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뉴욕의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마라톤이나 기업의 행사들조차 시각적인 효과와 일시적인 경험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가 해온 작업보다 더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죠.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이유는 정치적인 작업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 가치가 평가절하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작업이 상업적인 가능성이 있다면, 더 많은 미학 도구를 가지고 작업함으로써 아마 더 많은 후원을 받을 수 있겠지요.
 
저는 상업미술의 분야에선 굉장히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미술작업에 있어서 돈의 지출과 정치적인 활동 간의 갈등은 제 작업에 대한 비평에서 크게 다뤄지지는 않습니다. (저는 교육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작업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액수에요. 금전적으로 손해보지 않는 작업을 한 경우, 제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정도죠.)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미니에폴리스(미국 미네소타 주 남동부 도시)에서 진행한 “크리스탈 퀼트”는 한두 명의 후원자가 미술 작업 생산의 가치를 지지하기보다는 노인을 위해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는 데에 돈이 더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지요. 미술 퍼포먼스에서 시각적이고 일시적인, 더 나아가 공간적인 효과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며, 이는 정치 운동과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저는 한번도 미술적 요소가 정치적 운동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어요. 그러나 그와 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미술은 다른 행동주의와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다른 관객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 글. 가수정 (뉴욕에 거주하며, 새로운 세대의 여성주의에 관해 뉴욕과 한국에서 작은 세미나를 하고 있다. 올해 1월 헌터컬리지 컴바이드 미디어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공공미술 지원단체 ‘크리에이티브 타임’에서 일하고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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