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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여전히, 비로소, 다시금 열정에 사로잡히는 그녀들  
 
연애하는, 그러나 연애를 숨기고픈 그
 
일요일 아직 이른 오후 시간이었다. 섬돌향린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지하철 6호선을 타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상수역에서 한 ‘할아버지’가 한 ‘할머니’의 다정한 눈길을 뒤로 하고 지하철에 올라 탔다. 지하철이 움직일 때까지 그는 밖에 서 있는 ‘할머니’에게 애틋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곧 또 봅시다”는 따스한 말을, 입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았지만,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안타까워하며 헤어지는 모습이나 손을 흔드는 모습이 시종일관 부드럽고 살가웠다. 망설임과 어색함 또한 없지 않아 은연 중에 지지하는 마음까지 들게 만들었다.
 
마침 옆자리에 앉은 그에게 나는 가능한 실례가 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웃는 얼굴로 가볍게 말을 걸어보았다. “데이트하셨나 봐요?” “아, 뭐... 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이었지만 분명 자부심이 묻어 있는 목소리와 얼굴 표정이었다. 그러나 2,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정색을 하고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 거에요.. 같은 교회에 다니니까, 예배 끝나고 지하철 타러 같이 온 겁니다.” 라고 말을 덧붙였다. 조금 전까지 눈가에 머물던 부드러운 미소와 입술을 달싹이게 하던 행복의 여운은 이미 사라졌고 목소리 또한 완고하고 건조했다.
 
한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꿈꾸던 한 특별한 남성에서 그는 ‘노년’ 혹은 ‘실버’라고 불리는 집단의 평범한 한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태도는 사생활의 은밀한 비밀을 지키려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황당한 꿈의 세계에 잠시 발을 들여놓았다가 서둘러 관습의 현실로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역시 내가 실례를 한 걸까? 예배와 데이트는 공존할수 없는가? 영성과 친밀성에 대한 욕망은 서로 배치되는 걸까? 특히 나이가 든 사람들의 경우에는? 내가 본 데이트 장면의 주인공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니었어도 그런 식으로 말을 걸었을까? 내 옆에 앉은 사람이 ‘그’가 아니고 ‘그녀’였다면 내 말걸기의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들의 데이트를 지지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고, 또 가능하다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던 내 위치는 어디인가. 주름진 얼굴의 어떤 노년남성 옆에 앉아서 나는 이런 저런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노년, ‘나이 든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것
 
사랑에도 자격이 있는가. 사랑에 빠진, 연애하는 노년은 제대로 잘 늙어가지 못하는 건가. 아니,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한다 해도 그 모양새는 젊은이들의 그것과는 달라야 하는가. 예를 들어 꽤나 나이 든 여성이나 남성이 섹스를 하고 오르가즘을 기뻐하는 그런 사랑을 하면 ‘역겨운’ 것일까. 대답은 역사적 맥락과 문화에 따라, 특히 젠더 문화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 <제2의 성>을 쓴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 
 
예를 하나 들어보자. 60대에 접어들어 보봐르는 자신을 스스로에게서 소외시키고 타자화시키는 ‘나이듦’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적응하기 위해) <노년>이라는 책을 쓴다.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일어나기 전 공동체 사회들이 노년의 지혜를 얼마나 필요로 했으며 또 존중했는가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를 마친 후, <노년>은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열정”에 사로잡히고 몰두했던 노년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작가나 시인, 화가 등 예술가들과 그들이 창조한 인물들의 집요하면서도 과잉으로 부푼 열정 스토리들이 방대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혹은 그런데) 그들은 모두 남자다. 현실의 남자건 재현된 남자건 그들은 모두 왕성한 성욕을 자랑하고 나이와 무관하게 거침없이 남성성을 ‘발사’하면서 행동과 활동, 창조의 무대 위를 뛰어다닌다. 보봐르는 그들을 질투한 것일까. 70, 80, 90이 되어서도 자신이 여전히 타자가 아닌 “자기”임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고 섹스를 탐하고 발기하(려)는 그들의 권력을 탐한 것일까. <노년>의 문체는 남성성과 섹슈얼리티, 생산하는 능력, 사회적 평가 간의 등가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거의 부러워하면서 확인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회적 나이와 생물학적 나이, 그리고 칼렌더 나이와 정신적 나이 사이의 분열이 가져오는 타자화가 철저하게 젠더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2의 성>을 쓴 그녀가 주목하지 않았을까. <노년>의 책장을 지루하게 넘기며 나는 이 질문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년은 무엇보다 계급의 문제라는 것, 즉 나이든 사람의 삶이 조금이라도 위엄과 평화를 유지하려면 지위와 자본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강조하면서, 나이듦이 젠더 레짐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보봐르가 내게는 거의 측은하기까지 했다.
 
‘나이 든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것. 거울 속의 저 낯선 주름진 얼굴이 바로 자기라는 사실. 그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자가 또한 바로 자기라는 또 다른 사실. 전 세계적으로 지성인의 반열에 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치열하고 투명한 정신을 지녔지만, 다른 모든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하지 않다”는 덫에 꼼짝없이 걸려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봐르는 그리고 <노년>은 앞으로 ‘나이 든 여자’로 살아야할 후배 여성들에게 밝고 명랑한 혹은 지혜롭거나 유머러스한 전범이 되지는 못한다. 지침서나 조언을 물려받지 못한 채 불안의 안개를 헤치고 스스로를 위한 길을 만들어야 했던 선배 전위 여성의 힘겨운 노년 여행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쾌활하게 들려주는 성적 욕망과 사랑의 즐거움
 
시간이 그동안 조금 흐른 것일까. 보봐르의 철학적-미학적 탐색이 제시하지 못한 당당하고 믿을만한 견해와 실천을 제시하는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다큐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데이드레 피쉘,  2004) 
 
데이드레 피쉘(Deirdre Fishel) 감독이 만든 다큐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Still Doing It: The Intimate Lives of Women Over 65, 미국, 2004)에 등장하는 9명의 여자들은 모두 65세 이상의 ‘할머니들’이다. 그러나 50 여분 이들이 솔직하고 쾌활하게 들려주는 성적 욕망과 사랑하기의 즐거움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을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적합한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등장인물들 중에는 와니타처럼 할머니이면서 동시에 증조할머니인 여성도 있다. 할머니나 증조할머니는 단순히 친족 안에서의 관계를 나타내는 기표일 뿐이다.
 
그러나 쭈글쭈글 주름살 투성이인, 어깨가 구부정한,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하염없이 졸고 있는, ‘내가 스물 살 적에는, 서른 살 적에는’ 노래를 부르며 과거를 향해 눈물짓는, 선물을 마련해 놓고 손주들 오기 만을 기다리는,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에 둘러싸여 ‘소녀처럼’ 순진하고 행복한 미소를 띠고 생일 케익의 촛불을 끄는, 사춘기 손녀의 입에서 담배를 낚아 채며 짐짓 엄하게 여자의 덕목을 가르치는, 더 이상 섹시한 란제리를 입을 필요가 전혀 없는, 아니 아예 그런 욕구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창피하고 불경스러운 ... 등등, ‘할머니’에 겹겹이 달라붙은 사회문화적 의미는 평생을 재기발랄하게 ‘자기 멋대로’ 살아 온 싱글 여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일정 연령대에 여자라면 누구나 ‘아줌마’가 되듯이 그렇게 일정 연령대가 되면 여자는 또 누구나 할머니가 된다. ‘할머니’라는 이 무기력하고 의존적이며, 매력도 향기도 반짝임도 없는 존재에게 가장 확실하게, 절대적으로, 없다고 즉 있어서는 안된다고 간주된 것이 성적 욕망이다. 그러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와 뷰티 산업이 조작해낸 이 관념에 그녀들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대고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도전한다. 그녀들에게 섹스는 무엇보다도 서로 필요하다는 느낌과 따뜻함, 그리고 사랑한다는 느낌 더 나아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의미한다.
 
어렸을 때부터 우아하게 늙고 싶었던 와니타는 말한다. ‘내가 할머니 아니 심지어 증조 할머니라는 사실이 애인과의 만족스러운 섹스를 여전히 강하게 원하는 나의 욕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할머니나 증조 할머니라는 정체성은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우아하게 늙는다는 것은 허리를 펴고 어깨를 뒤로 젖히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당당하게 자기로 살아가는 걸 뜻한다.’
 
해리엇의 의견은 이렇다. ‘나쁜 섹스라도 섹스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언제나 강한 성적 욕망을 느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늘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를 애인으로 두었던 그녀는 이제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그 꿈을 이루기위해 <어느 누드 모델의 노트>라는 책을 쓴다. 서점의 쇼윈도우에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과 나란히 전시된 그녀의 책은 묘하게 자랑스러움을 뽐낸다. 

 

▲ 다큐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데이드레 피쉘,  2004)  
 
돌로레스를 만나 30대에 느꼈던 뜨거운 열정을 다시 불태우게 된 엘렌은 빛나는 얼굴로, ‘지하철에서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지난 밤 얼마나 뜨거운 시간을 누렸는지 모를 거에요.’ 라고 말한다. 부엌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고 침대에서 사랑이 가득한 키스를 나누고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추는 엘렌과 돌로레스의 모습은 과연 젊은이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고도 남을 만하다.
 
베티는 47세 연하의 애인과 열애 중이다. 그녀는 73세, 그는 26세. ‘물론 멋진 젊은 몸 옆에 나이든 내 몸을 세운다는 건 항상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편견을 뚫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지금 서로 지극히 만족하고 있다.’ 1960년대 뉴욕에서 들불처럼 일었던 페미니즘 운동시절 여성들을 모아놓고 자위를 통한 오르가즘 맛보기 워크숍을 진행했던 그녀가 이렇게 끝까지 편견의 최전방에서 자신만만한 삶을 사는 게 나는 일단 기분좋다.
 
60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70세에 섹스를 함께 나누는 애인을 만났던 프랜시스는 80세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인생의 절정기’를 누린다. 글쓰는 일이 중요한 그녀에게 SF 저널리스트이며 노년 인권 지지자인 그와의 사랑과 이해는 너무나 소중하다. 고관절 수술을 받고 시력까지 심하게 나빠져 요양원으로 들어와 살지만 그녀는 그와의 육체적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아요, 내게는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에요.’
 
그렇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과 히피 문화의 자유분방함을 세례받고 훈련한 그녀들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다큐를 만들고 이어서 몇 년 후에 30 여 명의 여성들을 더 인터뷰해 책을 낸 감독들은 ‘이런 여성들은 드문 경우일거라구요? 아니요, 우리는 인터뷰 대상자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어요. 그녀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는 수천 수만의 토론과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적어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들은 앞으로 하염없이, 100세까지 늙어 갈 후배 여성들에게 꽤나 쓸만한 옷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여전히 하고 있어요 Still doing it!
 
노년의 섹슈얼리티는 정치적 의제다. 여성의 경우는 더욱 더 그렇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가 불러 일으켰던 회오리 바람 덕분에 한국에서도 노년의 성은 이제 완전히 기이하고 낯선 주제는 아니지만, 여전히 그냥 손잡고 다정한 배려와 온기를 나누는 정도의 친밀함이 아니라 키스하고 섹스까지 원하는 사랑의 관계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외설이고 미성숙이다. 주책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이다.
 
나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 또는 ‘자기’로 남아 있다는 자존감이나 자신감이 특별히 성적 욕망과 실천을 통해서만 가장 확실하게 증명된다는 가설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나이든 사람들의 경우에 뿐 아니라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체성 이해에 있어 성적 욕망이나 섹슈얼리티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는 것은 다양한 친밀성의 흐름을 오히려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단계를 성적 에너지와 실천에 연동시키는 것, 그 결과 노년에게서 일체의 열정적 ‘놀이’와 일탈적 행동을 박탈하는 것은 심각한 정치적 억압이다. 나이든 여성들의 사랑과 섹슈얼리티 실천은 그야말로 완전한 소비고 놀이고 일탈이다. 그래서 더 흥미롭고 중요하다.
 
65세 이상된 여성의 수는 눈에 띠게 빨리 증가하는 추세고, 그 숫자는 남성의 경우보다 훨씬 높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 여성을 선호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들은 길게 늘어나고 있는 노년의 시간을 ‘쾌락 없이’ 지내야 한다면? 최근에 노년에 들어선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와 ‘열정’을 다룬 극영화들이 늘고 있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 징후적 독해랄 것도 없이 명백한 현실의 한 국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 세바스티안 렐리오 영화 <글로리아> (2013) 한 장면. 
 
<글로리아>(세바스티안 렐리오, 칠레-스페인, 2013)를 보러 갔을 때 극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60대(로 보이는) 여성들을 보면서도 확인한 일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껏 섹시한 차림으로 싱글 바에 가서 춤추며 파트너를 찾는 60대 여성 글로리아에게서 이 한국 여성들은 무엇을 찾는 것일까.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처진 뱃살에 두꺼운 허리와 허벅지도 아랑곳 않고 완전 나체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글로리아,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영화에서 이렇게 ‘관리 안 된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에 영화를 보는 여성들은 통쾌함과 해방감을 누렸을 것이다. 글로리아가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옷을 벗어던지고 요염한 눈빛으로 남자에게 다가가 그를 침대에 쓰러뜨릴 때 60대 한국 여성관객들은 순간적으로나마 자신들에게 쳐져있던 금기의 선 하나가 끊어지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남편과 사별하고 난 뒤 젊었을 때의 꿈과 재능을 되살려 란제리 가게를 여는 80대 여성의 ‘반란 성공사례’를 따스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리는 <할머니와 란제리>(베티나 오벌리, 스위스, 2006) 역시 시대적 요청을 반영한다. 영화의 원제목 “Die Herbstzeitlosen”(늦게 핀 꽃)이 암시하듯 늦게 자신의 열정에 따르는 여성들의 향기와 빛깔, 열매는 농도가 세다. 영화는 ‘란제리’라는 은유를 통해 마르타와 그녀의 친구들이 함께 빠져드는 이 몰입의 열정이 에로스에서 기원함을 은은히 번지는 향기처럼 알린다. 전체주의와 극도로 보수적인 가부장제로 똘똘 뭉친 마을 공동체에서 파리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세련되고 고혹적인 실크 란제리로 쇼윈도우를 장식한 마르타의 용기는 “i'm still doing it”의 또 다른 버전이다. 직접 재단을 하고 수를 놓는 마르타의 손과 눈은 에로스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의 원제목 "Still doing it"에서 목적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와 무관하게, 아니 나이가 들었음으로, 그만큼 지혜가 쌓였고 시간을 이해하게 되었음으로 무언가를 진정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모든 열정이 그렇듯이 그녀들의 열정은 깊은 에로스의 샘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우리는 에로스의 작은 빛화살을 심장에 박고 사는 사람들의 부드러움과 따스함, 관대함이 너무나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광폭한 자본과 관료주의 국가의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이듦에 깃든 지혜를 에로스의 생기가 감싸안는다면 젊은이들에게도 큰 위로와 버팀목이 되지 않겠는가? 연애소설을 읽고 사랑에 빠지며 향기 좋은 비누로 목욕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변에 많으면 좋겠다.
 
점점 더 늘어나는 기대수명에 점점 더 두꺼워지는 노년층은 이제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아킬레스건이다. 정체성의 정치학이나 문화적 다양성의 차원에서도 노년 웨이브의 전개는 중요하다. 젠더와 나이, 섹슈얼리티에 걸려 있는 차별과 편견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 김영옥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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