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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의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폐경(閉境)의례  
 
갱년기에 대한 여성 개개인의 인식, 혹은 담론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게 가능해진 이후에 나타난다. ‘개인’으로서의 여성, 즉 여성들의 ‘개별성’이 생겼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 어머니 세대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몸이 보여주는 증상을 토대로 생애의  특정 시점을 인지하지 않았다.


“갱년기? 난 갱년기가 언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라. 둘째가 화상을 입어서 내가 매일 병원 드나들 때, 그때가 갱년기였나?”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 세대들은 생애의 특정 시기들을 그때그때 발생한 ‘사건별’로 인지하곤 했다.
 
쓰시마 유코의 뛰어난 단편「나」에 나오는 어머니는 일기인지 일지인지 확실치 않은 삶의 기록을 남기는데, 평범하고 순탄한 나날에는 단 한두 문장으로 그리고 애간장이 끊어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문장의 부재, 즉 침묵으로 특정 시기나 시간을 새긴다.
 
그러나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토대로 자신의 생애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서 남학생들이나 남자 교수들이 있는 자리에서라도 발열이나 홍조, 집중력 저하 등 갱년기 증상이 나타나면 ‘제가 지금 갱년기라서요’ 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여성의 갱년기는 이제 사회적으로, 공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할 것이다. 여성들이 각자 자신들의 갱년기 경험을 중요한 이야기 거리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지금 갱년기라서요…”
 
갱년기는 여성들이 제2의 삶으로 들어서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빠지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4 자매의 막내인 한 친구는 차례로 갱년기를 겪게 된 언니들이 매번 남편과 자식들에게 자신이 갱년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며,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전에처럼 당신들/너희들 시중들어줄 수 없다. 그러니 스스로 알아서 옷도 챙겨 입고 밥도 챙겨 먹으시라, 그리고 나한테 무슨 위로를 받거나 챙김을 받으려는 생각은 아예 마시라’고 경고하더라는 말을 전한다.
그래서 남편들이나 자식들도 이 ‘갱년기’의 중요성을 충분히 숙지하고 그에 적응하면서, 자신들의 일상을 변화시키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들이 자신의 갱년기나 완경에 대해 말할 때 일상에서 남편이나 자식이 적절한 반응체가 되어주는 것과 달리, 싱글 여성의 경우 적절한 반응체는 사유 패턴이나 사유 속도 등과 관련될 수 있다. 몸이 마음이나 언어와 매우 다른 속도로 움직일 때 적응은 난관에 부닥친다.
 
40이라는 나이가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을 이해하는데 5년이 걸렸다고, 그래서 45세 때 비로소 40살이 되었다고 말하는 한 싱글 여성 교수는 그래서 말한다.
“50대의 삶이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사는 것”이라고.
 
한국에서 전문직 여성들의 40대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살아낸 일의 시간이다. 그녀들은 그때 경험한 속도가 정상이라고 생각해서 50대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완경과 더불어 시작하는 제2의 삶은 느린 삶이어야 한다. 땅과 가까운 삶이어야 한다.
 
헐떡이며 좌충우돌하는 ‘미친 시간’의 광기를 가라앉혀 줄 땅의 부드럽고 완곡한 호흡. 그 호흡 속에 30대, 40대를 밀어붙였던 욕망을 슬쩍 내려놓고 발바닥에 와 닿는 땅의 느낌으로 새로운 몸의 리듬, 삶의 리듬, 일 생산의 리듬을 구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땅에 가까운 삶을 산다는 것은 몸으로 느끼는 삶을 산다는 것, 구체성을 맛보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주의자들의 경우 특히 제1의 삶에서는 ‘있는 삶’이 아니라 ‘도래했어야 할 삶’을 살아왔다면, 이제 제2의 삶에서는 ‘지금 여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여성들은 삶의 한 주기가 마무리되고 또 다른 주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낀다.
 
막 열리기 시작한 생의 또다른 문, 폐경(閉境)의례
 
이제 물리가 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낯선 만큼 생생하고 치열한 갱년기를 보내든 무난하고 평화로운 완경을 맞이하든 여성들은 몸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달리 보기 시작한다. 몸이 들려주는 사물의 이치 속에서 그녀는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생의 또 다른 강을 향해 몸을 돌린다. 이 강에는 ‘다른’ 삶의 이야기들이 물결치고 있다.  

▲ 홍현숙의 <폐경의례> 중에서  
 
아티스트 홍현숙은 <폐경의례>에서 완경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목욕탕 물속에 잠겼다가 동네 개울가에서 솟구쳐 나오는 여성의 몸으로 표현한다. 생리혈 물감으로 한 여자는 다른 여자의 벗은 등에 글씨를 쓴다. 하나의 문이 닫히고 또 다른 문이 열렸다고. 이제 뱀처럼 자유롭게 날렵하게 살겠노라고.
 
여기서 닫힌 문은 여자로서 감당해내야 했던 가부장제 이성애중심 결혼제도와 사회라는 법체계의 문을 말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카프카의 말을 빌리자면) ‘나’를 위해 마련된 문이라지만 늘 들어서기 힘들었던, 늘 까다로운 누군가가 지키고 서 있던 문, 그래서 열려 있되 들어서지 못하고 바깥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던 문. 그 문을 이제 갱년기에 들어선 여성이 등 뒤로 쾅 닫고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위해 문을 연다. 축지법과 비행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담을 넘고 다리 난간 위에 올라서고 이 집과 저 집을 마음껏 넘나든다.
 
혹독한 갱년기 증상들과 더불어 살기로 마음먹은 나는 기꺼이 홍현숙의 이 폐경(廢境)-의례에 동참하기로 한다.
 
언젠가 비슷한 연배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삶의 시간이 빨리 흐를 줄 알았다면 어떻게 살았을 것 같냐?’는 질문을 서로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동안 나름대로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여자로서 살고 일하면서 눈치 보고 산 부분들이 있다. 더 막 살 것 그랬다’라고 말했었다. ‘나’를 위한 문이라면서도 나를 바깥에 세워두고 들이지 않으려 한 그 문을 더 일찍 더 시원스레 쾅 닫을 걸 그랬다는 느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갱년기를 사적 부담이 아니라 사회적 의제로 구성해내면서 그야말로 맘껏 신나게 늙어볼 일이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로서가 아니라 그대들 다중과 손잡고 새 길을 만들어가는 도반으로서.  ▣ 김영옥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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