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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나이듦과 사랑과 죽음, 그리고 반려
1. 아무르: 자궁밖으로 던져진 존재들이 기억하는 기원
사랑. ‘젖가슴을 찾는다’는 고어에서 유래함. 탯줄을 끊고 태어나는 포유동물의 특징적 속성임. 젖꼭지(amma), 유방(mamma), 유방의(mammaire), 유두(mamilla) 등의 단어와 친족 관계에 놓여 있음. 이 단어들의 한가운데에는 어머니의 입(사랑의 젖꼭지, amma de l'amor)이 있음. 아무르는 ‘말하는 입’보다는, 배가 고파 입술을 뾰족하게 앞으로 내밀고 ‘본능적으로 젖을 빠는 입’ 모양에 더 가까움.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할 때 빠져드는 황홀경(ekstasis)이라는 단어가 라틴어의 존재(existential)라는 단어와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게 필요함.
▲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이것은 파스칼 키냐르가 『은밀한 생』에서 가르쳐주는 지식이다. 정리하자면 앞으로 뾰족하게 돌출된 입술과 황홀경에 빠진 눈은 탯줄을 끊고 자궁 밖으로 빠져나온 존재들의 출생 기원을 가리킨다. 사랑은 어머니가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저 ‘내던짐’을 환기시킨다. 이 내던짐, 떼어놓기는 상실의 공포를 존재에 새겨 넣지만 그 대가로 언어를 준다. 만지고 느끼고 그 안에 포근히 깃들 수 있는 최초의 어머니는 잃었지만 언제든 ‘어머니’를 쓰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어머니와의 최초의 융합이 귀환하는, 그러나 또한 머물지 않고 사라지기에 그 융합의 불가능성을 환기시키는 시공간이다. 우리 모두는 아랫배에 이 융합의 귀환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작은 흔적, 배꼽을 갖고 있다. 아무르, 사랑은 서로의 배꼽을 같이 기억해주는 것, ‘내던져진’ 존재로서 ‘고파하는 것’을 향해 서로 입술을 내미는 행위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어머니의 입, 사랑의 젖꼭지가 되어 주는 행위다. 그래서 “이 같은 입술의 돌출은 하나의 작은 젖가슴과도 같다.”
아무르,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태어난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우리가 상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결핍으로 쪼그라들거나 불안에 먹혀버린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게 하는 힘. 열정과 평화와 기쁨으로 살게 하는 상호 작용.
나는 하나의 실제 사례와 한 편의 영화가 들려준 사랑 이야기에서 이러한 아무르의 모습을 보았다. 늙음과 함께이기에 더 오래 들여다보고 더 오래 듣게 된 네 사람의 이야기다.
2. 고르가 사랑한 도린
오랫동안 책상 앞 유리창에 붙여놓고 지내던 사진이 한 장 있다. 책에서 발견한 사진을 복사한 거라 흑백 입자가 거칠다. 복사한 사진 위에는 오랜 시간 허공을 떠돌던 공기와 먼지, 온도와 습도가 가라 앉아 있다. 그리고 늘 새롭던 나의 감탄도.
생태정치 운동가인 앙드레 고르(André Gorz)와 그의 아내 도린 케어(Doreen/Dorine Keir)의 사진이다. 많이 늙은 고르가 역시 많이 늙은 아내 D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 두 사람의 주름진 얼굴은 부드럽고 지혜로운 미소로 은은하게 빛난다. 아, 평화다!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 가슴을 물들이던 이 느낌은 거의 십 년 동안 조금도 시들지 않고 늘 동일한 밀도로 남아 있다.
▲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
이 사진을 나는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견했다. 20년이 넘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투병 생활을 해온 아내 도린이 생을 마감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고르는 긴 한 편의 시 같은 이 편지를 썼다. 두 사람 모두 80대에 들어서 있었다. 편지는 도린과 함께 한 그의 생을 빛 바라지 않은 생생한 가슴 뜀으로 회상한다. ‘저와 함께 춤추러 가시겠어요?’ 고르가 도린에게 한 첫 말이다. ‘왜 아니겠어요?’ 도린이 고르에게 한 첫 말이다. 춤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책의 표지를 밝고 명랑한 열정으로 채운다. 젊고 아름답다. 그러나 내게는 저 늙은 고르와 도린의 사진이 더 깊고 풍부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은 평생을 이념의 동지로, 일상의 도반으로 함께 했다. 기쁨과 슬픔, 희열과 절망 속에서, 그리고 불치병을 앓던 도린의 형용할 수 없는 통증과 고통 속에서 함께 나이가 들어갔다. 80여 쪽 넘게 이어지는 고르의 연서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낸 시간이 늘 함께 춘 춤이었음을 고백한다. 내가 좋아하는 저 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은 고르의 고백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한다. 서로 사랑하며 온유하게 지혜롭게 함께 늙어간 두 사람. 두 장의 사진 사이에서 아름다운 춤이 따스한 불꽃처럼 일렁인다.
도린은 20년이 넘게 불치병인 거미막염을 앓고 있었다. 고르는 은퇴하고 자신의 활동 영역인 파리를 떠나 시골 마을에 집을 짓는다.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르는 이곳에서 도린을 돌보는 일에 전념한다. 사람의 뇌에는 골수의 띠와 뇌를 감싸고 있는 가느다란 섬유들이 있다. 이 섬유들에 이상이 생기면 상처 난 섬유가 만들어지고, 이 상처 난 섬유는 골수의 띠를 누르고 그 띠 속으로 들어가 신경 뿌리까지 압박하게 된다. 이것이 거미막염이다. 거미막염은 다양한 형태의 마비와 극심한 통증을 유발한다. 모든 것을 함께하고자 약속하고 실천한 고르와 도린 사이에 이 통증은 넘어설 수 없는 타자성의 간극으로 존재했다.
또한 통증에 대한 의학적 조처들은 도린을 자신의 몸에서 소외시켰다. 진통제를 계속 복용하지만 통증은 반복되고 진통제에 대한 의존만 커진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환자에 대한 인성적 이해나 공감 없이 환자를 수동적인 의약품 소비자로 바꾸어 놓을 뿐이다. 의학에서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이 분명해졌을 때 도린은 의료기술과학이 그녀의 몸과 그녀 사이의 관계를 마음대로 휘두르게 하는 대신, 자신의 생명에 대해 스스로 권한을 갖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의 국제적 네트워크와 접촉하여 정보와 조언을 나누는 한편 요가를 시작한다. 자신의 병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감당할 힘을 기르는 것만이 그 병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르는 “당신의 병 때문에 우리는 생태주의와 기술 비판이라는 영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고 쓴다. 도린과 고르는 의료기술과학이야말로 푸코가 ‘생명권력’이라 부른 것, 즉 각각의 개인이 자신과 맺는 내밀한 관계조차도 기술적 장치들의 지배를 받게 만드는 권력의 가장 공격적인 형태 중 하나임을 확인한다.
통증이 너무나 심해 밤에도 앉아 있거나 서 있어야 했던, 그러나 아픈 몸과 어떻게든 자율적인 관계를 맺으려 애쓴 도린. 그런 그녀를 보며 ‘당신은 내가 모르는 곳을 다녀 온 사람입니다’라고 통렬히 절망한 고르. 이런 두 사람이 도달한 생태주의는 “삶의 양식이 되고 매일의 실천이면서 끊임없이 또 다른 문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매개되지 않은 상태로 도린의 통증과 고르의 절망을 느끼고 싶다. 감염되고 싶다. 나 뿐아니라 그들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를 듣는 다른 사람들도 이 통증과 절망에 감염되길 원한다. 그 감염을 통해서 ‘다른 문명을 요구하는 생태주의’에 날마다의 실천으로, 구조의 변화를 촉구하는 운동으로 가담하길 원한다.
편지 전체가 다 고백이지만 그래도 더 마음을 잡아끄는 두 개의 고백이 있다. “당신은 내 부족함을 채워주는 타자성의 차원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성찰적이고 진지한 고백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타자성의 차원이야말로 남자에게는 너무나 낯선 지대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이 고백.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죽기 얼마 전 찍은 저 사진 속 두 사람의 얼굴은 고르의 이 고백에 순진함과 존엄함의 아우라를 덧붙인다. 1년 후, 그러니까 도린이 여든세 살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한다. 고르는 여든네 살이었다. 두 사람을 태우고 남은 재는 유언대로 두 사람이 손수 가꾼 정원에 뿌려졌다.
3. 조르주가 사랑한 안느
“매일 말하는 연습을 하거나 노래를 함께 불러. ... 나는 5시에 일어나. 안느는 낮에 주로 자고 밤에는 거의 깨어있지. 5시에서 7시 사이에 기저귀를 갈고 욕창 방지를 위한 마사지를 해. 7시에 뭣 좀 먹으라고 설득을 하지. 효과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어. ... 가끔 어릴 적 이야길 하기도 해. 몇 시간을 불러대기도 하고 갑자기 킬킬거리기도 해. 울기도 하고. 다 남에게 보이기엔 안 좋은 모습이지.”
▲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 한 장면.
두 번 뇌졸중을 맞고 심한 마비와 망각 증세를 앓고 있는 엄마 안느를 보기 위해 찾아온 딸에게 아버지 조르주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조르주는 딸에게 문을 열어주기 전 안느가 누워있는 방문을 잠근다.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딸의 주장에 결국 잠근 방문을 열지만, 딸 역시 안느를 보이고 싶지 않은 그 ‘남’이 아닌 건 아니다. 영화 <아무르>는 조용하고 냉정한 표면 아래에서 아프게 성찰한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이 70대에 들어섰다는 건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이다. 아니, 아직 나이듦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사람들 사이에 교감의 다리를 놓으니,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다. 나이 든 감독이 ‘나이듦’을 성찰하는 영화를 만들 때 그것은 사회에 대한 큰 공헌이다.
85세의 에마뉘엘 리바와 82세의 장 루이 트랭티냥이 (연기한다기보다) 보여주는 안느와 조르주의 모습은 감동이라는 말 너머에 있는 삶의 어떤 국면 그 자체를 드러낸다. 삶의 여정 끝부분 어느 언저리, 시간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의 어떤 불가사의한, 물론 무섭고 두려운 국면. 그곳에서 빤히 이쪽을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는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응대해야 하는 숙명.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 대면은 필연적이다. 삶이라 부르기에도 죽음이라 부르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이 상태, ‘죽어가는’ 이 상태에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끝까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가?
기쁜 마음으로 함께 제자의 피아노 연주회를 다녀온 다음 날 첫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이후 안느의 육체는 점점 더 치명적인 소멸의 길을 간다. 쉬울 줄 알았던 경동맥 수술이 잘못 되어 반신불수가 된다, 오지 않길 희망한 뇌졸중이 두 번 온 이후 언어와 식사와 배변 등 모든 자율적 활동 능력은 사라진다. 이런 안느를 두고, 이런 안느와 함께 조르주는 ‘어떻게 하면 ‘안느’는 ‘안느’로 죽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안느를 사랑하기에, 평생 매혹의 샘이 완전히 마른 적이 없던 연인으로서의, 음악 동료로서의, 서로의 습관을 존중하는 파트너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기에, 안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여전히 너무나 생생히 알고 있기에, 저 철저한 파괴와 괴멸의 순간에도 안느의 자기 이해가 어떠할 것인지를 너무나 잘 짐작할 수 있기에 조르주가 선택하는 마지막 가능성. 베개를 집어다 안느의 숨을 멎게 하는 조르주의 행동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가능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이 마지막 가능성을 향해 손을 뻗는 용기를 내야한다. 어느 누가 그 힘든 역할을 기꺼이 맡으려 하겠는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미움과 혐오가 사랑과 따스함에 대한 기억이나 감정을 모조리 부패시켜 버릴 때까지 마비와 망각의 포로가 된 반려를 돌보는 것과 똑같이, 그이를 그 폭력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도 인간으로서는 가장 하기 힘든 선택 중 하나다.
이것만이 최상의 선택이거나 가장 인격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르>가 감정의 파고 없이 침착하게 따라가는 성찰의 선은, 불가항력적으로 전개되는 어떤 보편적 변화의 과정과 도적떼처럼 쳐들어 온 그 과정 앞에서 놀라고 당황한 개별 인간 사이의 간극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경동맥 수술이 잘못 되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뇌졸중이 왔다, 점점 나빠지다가 마지막 날을 맞게 될 것이다’는 식의 의료보고 동사만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진행형 동사가 있음을 느껴보자고 영화는 제안한다. ‘안느’에게 이런 일이 생겼고, 그녀를 사랑하는 ‘조르주’는 평생을 반려로 살아온 믿음과 신뢰 안에서 베개를 집어 든다. 안느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조르주 안에 깃들어 있는 안느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존엄’ 한 조각을 심장처럼 움켜쥐고 죽을 수 있는
<아무르>를 보면서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행복을 느낀다. 반려자를 위해 타자를 살해하는 힘겨운 역할을 맡아 줄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건 행복한 삶/죽음이다. 나이듦과 사랑과 죽음, 그리고 반려. 반려는 어디까지 함께 가는 것일까.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살고 싶지 않은 시간까지도 살아야만 하는 어이없고 당혹스러운 운명도 늘어나고 있다. 빈 방에서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고,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인지 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낯선 요양원 한 귀퉁이에서 평생 한 번도 인연을 맺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전 존재를 맡기고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인간의 위엄을, 평생 추구하고 지키려 애썼던 그 삶의 속살을 완전히 파괴당하지 않은 채 노년을 보내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완성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이제 개인의 손을 떠나 어딘가 허공을 애처롭게 떠다닌다. 가족이나 친지를 비롯해 공동체가 붕괴된, 계속해서 붕괴되고 있는 현대에 존엄 한 조각을 심장처럼 움켜쥐고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소수의 사치와 향락이 되어 가고 있다.
<아무르>를 보면서 그래, 당신들은 음악과 글이라는 문화자본과 시간당 지불해야 하는 간병인을 고용할 수 있는 경제자본과 사랑과 믿음이라는 감정자본까지 소유한 ‘부자들’이었으니까 그토록 서늘한 자기성찰의 깊이를 지킬 수 있지, 라고 말한다면 그건 영화가 제안한 사회개혁을 비껴가는 일일 것이다. 질병이나 나이듦의 신체적 징표가 개인적 존재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낭패나 재앙으로 간주되는 사회 안에서라면 그 누구도 ‘자기만의 죽음’을 죽을 수 없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이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촉구한다. 이것이 공통의 사회개혁운동으로 추진되지 않는다면 예견된 100살 수명은 얼마나 잔혹하며 폭력적인가.
웰 다잉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잘 죽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온 것에 맞게 자기만의 죽음을 죽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 안에는 자기만의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뇌와 이해가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방식과 실천이 꼭 배타적 사랑에만 해당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 개인의 능력에만 맡겨두지 않는 것, 그게 혁명이다. ▣ 김영옥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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