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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후차라 마타> 공연을 앞두고① 섹슈얼리티는 ‘선택의 문제’
공연창작집단 <뛰다>는 2010년부터 인도 팀과의 공동작업을 추진해왔으며, 2012년부터 작업의 주제를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지지 않는 성(性)’으로 정하고 이에 대해 탐구해 왔다. 오랜 기간에 걸친 공동작업은 마침내 올해 4월 한국에서 <바후차라 마타>(Beyond Binary)라는 제목을 달고 관객들 앞에 선보이게 된다.
남/녀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성(性)에 관한 가능성을 처음 엿보게 된 것이 인도의 여신 바후차라 마타와, 이 여신을 모신(母神)으로 섬기는 히즈라(hijras.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으로 불리는 사람들) 커뮤니티였다. 그래서 <바후차라 마타> 공연을 앞두고, 이에 관한 연재를 인도 신화에서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신화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 2014년 4월 5일 남산예술센터에서 막을 올리게 될 연극 <바후차라 마타: Beyond Binary> 포스터.
신화는 과연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일까?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신화란, 옛날부터 내려 온 조금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러나 인도의 신화학자이자 저술가인 데브두트 파타나이크(Devdutt Pattanaik)가 말한 것처럼, 옛날 사람들이 머리가 다섯 개 달린 신이라든지, 날개달린 말과 같은 존재들을 정말로 믿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인의 오만이다.
얼핏 비현실적이고 황당해 보이는 겉모습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힘을 거의 잃기는 했지만 우리가 여전히 신화로 돌아가곤 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말로 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을 빌어 전할 수 밖에 없을 때, 그것이 신화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가 무엇이고, 여자가 무엇인지 우리는 과학의 논리로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왜 남자가 존재하고 여자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러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물질적 세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물론, 그 세계를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초월적 세계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남자와 여자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종족번식을 위해? 종족번식은 그렇다면 남녀의 형태로만 가능한가? 생물학을 조금만 파고들어도 금세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은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소멸하는지는 알려주지만, 왜? 라는 물음에 답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다른 형태의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은 신화와 종교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性)에 관해서는 무시하거나 공격적이 되곤 하는 세상에 대해, 우리는 왜? 라고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것을 설명하는 과학적, 심리학적, 철학적 논리들이 그다지 두텁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한 순간 번득이며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듯 보이던 날카로운 논리들은 그에 맞서는 또 다른 논리 앞에 빛을 잃었다. 그러한 이유로, 또한 태생적 이유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도의 신화들에서 물질적, 현상적 세계를 넘어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고리를 찾게 되었다.
인도의 신화에는 성(性)과 관련하여 대단히 기발한(?) 장면들이 풍부하다. 남신과 여신이 수직으로 반반씩 합쳐져 있는 형상, 남신이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여신으로 변신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들, 남자를 여자로 변모시켜주는 신, 남자의 몸으로 아이를 임신하는 왕의 이야기, 한 달에 반은 남자, 반은 여자로 살게 된 왕의 이야기, 신의 도움으로 여자들끼리의 동침을 통해 아이를 갖게 되는 이야기 등등….
앞서 언급했듯이 좀 황당해 보이는 이러한 이야기들에는 그러한 형식을 취하게 된 이유가 담겨있다. 인도 남부의 도시 첸나이에 위치한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 대학의 영어교수이자 30여년간 성소수자들과 함께 연극을 포함하여 다양한 활동을 해 온 망가이(A. Mangai) 박사가 이러한 인도의 신화들 속에 존재하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글을 써 주었다.
인도에는 사람수보다 더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신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그들이 뒤얽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더더욱 끝이 없어 보인다. 짧은 지면으로는 그 방대한 신화의 지극히 작은 일면을 소개할 수 있을 뿐이지만, 우리 시대의 과학적 상식을 벗어나는 듯 보이는 이 이야기들이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는 충분할 듯하다.
인도 신화와 공연예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닌 망가이 박사의 글은 한국의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듯 하여, 약간의 수정 과정을 거쳤음을 밝혀둔다. [황혜란/ 공연창작집단 뛰다 배우]
인도 신화와 서사시 속의 섹슈얼리티
▲ 시바신(왼쪽)과 그 부인인 파르바티(오른쪽)가 반반씩 합쳐져 있는 형상. -인도 바위사원 마하발리푸람.
신화와 서사시는 ‘집단 무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반을 형성해 왔다. 때문에 공동체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 둘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의 물질적 조건들이 아무리 변화한다 해도 ‘정당한 것’, ‘수용할 수 있는 것’,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개념들을 바꾸는 데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다.
인도인들의 정신 속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몇몇 개념들은 순결, 모성, 카스트에의 소속, 그리고 섹슈얼리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개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여러 인물들에 의해 ‘위반’되는 방식이다. 판다바 형제들을 낳은 쿤티 왕비의 경우가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동침을 통해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남편의 허락을 받고 특별한 기도를 통해 다른 신들과 관계하여 아이를 낳는다. ‘니요가’(niyoga)라고 불리는 일종의 ‘씨받이’ 남편의 풍습을 통해,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들인 드리타라슈트라, 판다바 형제들, 비두라 등이 태어나게 된다.
섹슈얼리티는 금기시되는 주제인 데 반해 출산은 그렇지 않다.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이성애 관계의 기능적인 측면은 그 자체로 논쟁의 장이다. 그 이외의 다른 성적 욕망이나 관계는 대개 ‘비정상’ 혹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화와 서사시들 속에는 동성애 혹은 성전환 행위와 같이 규범을 벗어난 순간들이 풍부하다. 대단히 교훈적인 성격을 지닌 <라마야나> 보다는 <마하바라타>에서 이러한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라마야나>에도 역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왕자 라마가 추방될 때, 한 무리의 충성스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다. 라마는 이를 눈치채고 왕국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에게 도시로 돌아가라고 명한다. 그런데 라마가 14년간의 추방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14년 동안이나 라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라마가 자신의 백성들에게 ‘남자와 여자들’은 모두 도시로 돌아가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들은 그 자리에 남아서 라마를 기다린 것이다.
<마하바라타>에는 성전환과 관련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모히니의 모습을 취한 크리슈나(비슈누 신의 아바타)가 가장 첫번째 자리를 차리 할 것이다. 모히니는 비슈누 신이 여성으로 화한 모습으로, 모두를 매혹시키는 유혹적인 존재이며 ‘모가’(moga), 즉 욕정으로 가득한 사랑의 현현이다. 그녀는 시바신과 관계하여 아이야파를 낳는다. 그녀는 또한 크루크쉐트라 전투에서 판다바의 승리를 위해 희생양이 될 운명인 아라반과 하루밤을 보내기도 한다. 다음 날이면 죽게 될 아라반이 아내가 되어줄 여인을 찾지 못하자, 크리슈나는 모히니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와 동침한다.
인도 남부의 히즈라(hijras.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들은 이 아라반을 위해 매년 축제를 연다. 타밀나두의 쿠바캄에서 매년 4, 5월에 열리는 이 축제에는 전 세계의 트랜스젠더들이 모인다. 트랜스젠더들의 성지순례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첫째 날 저녁에는 사원의 사제가 주관하는 가운데 아라반과의 결혼식이 이루어진다. 아라반은 각종 장식물들로 치창하고 사원의 수레에 탄 채 등장한다. 다음 날 아침에는 그의 머리가 잘려진다. 트랜스젠더들은 팔찌를 부수고 흰색 사리를 입음으로써 자신들이 과부임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 하루밤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십 일에서 십육일 정도의 애도 기간을 갖는다. 신성한 노란색 실이 목을 자르고, 진흙 언덕 위에 던져지고, 유리 팔찌들이 깨어져 여기저기 흩어지고, 트랜스젠더들이 울부짖는 광경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남과 여, 어느 쪽이 섹스에서 더 큰 즐거움을 얻을까
▲ 연극 <바후차라 마타> 공연을 앞두고, 배우들이 현재 인도에서 연습하고 있는 모습 © 공연창작집단 뛰다
힌두 신화에서 주피터의 역할을 하는 신이 브라스파티이다. 그는 매우 현명하여 ‘구루’(스승)라고도 불린다. 그의 부인은 타라(성운)다. 브라스파티의 제자 중에 챤드라(달)가 있었는데, 그는 타라와 부정한 관계를 갖게 된다. 찬드라가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브라스파티는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타라를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찬드라는 타라가 자기 의지로 온 것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관계를 계속한다. 이에, 온 우주가 찬드라의 편과 브라스파티의 편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전쟁의 여파로 우주가 위험에 휩싸이자 창조주 브라흐마 신이 타라를 브라스파티에게 돌려보내주도록 명한다.
타라가 브라스파티에게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브라스파티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아이 아버지를 말해 줄 의무가 없으므로 타라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태어나자마자 한 첫 번째 질문이 바로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였다. 너무나 똑똑했기 때문에 이 아이는 부다(‘지성’이라는 의미로 부처와는 철자가 다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자식이 물어볼 때에 어머니는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타라는 찬드라가 아버지라고 대답해주었다. 이를 알게 된 브라스파티는 화가 나서 부다에게 남자도, 여자도 아닌 간성이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부다는 나중에 수듐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수듐나는 훌륭한 왕이었다. 어느 날 수듐나가 숲 속으로 사냥을 갔는데, 그 숲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시바신과 그의 부인 파르바티가 사랑을 나눌 때, 파르바티는 아무도 그 숲에 들어와 그들을 불 수 없도록 시바로 하여금 숲에 마법을 걸어 모든 것들이 여성이 되도록 한다. 그런데 수듐나가 사슴을 쫓다가 그 숲에 들어서는 순간 여자가 되어버린다. 그는 시바에게 달려가 자신을 다시 남자로 바꿔달라고 빌지만, 파르바티는 잘못에 대한 최소한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시바는 그가 한 달의 반은 여자로, 한 달의 반은 남자로 지낼 수 있게 해 준다. 달이 찰 때는 남자로, 달이 기울 때는 여자로. 시바신이 반대의 성으로 지낼 때를 기억 할 수 없도록 했으므로, 남자인 수듐나는 여자일 때의 기억을, 여자인 수듐나는 남자일 때의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수듐나와 부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부다는 수듐나의 비밀을 알지만 말해주지 않는다. 한 동안 함께 살면서 둘은 많은 아이를 낳는다. 수듐나는 여자일 때 남자와 관계를 가져서 낳은 아이들도 있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와 관계를 가져서 낳은 아이도 있다.
<마하바라타>에서 유디스트라가 비슈마에게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쪽이 성관계에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느냐고 묻자, 비슈마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둘을 모두 경험한 수듐나 뿐이라고 말한다. 수듐나는 이후에 시바신에게 오랜 기간의 기도를 올려서 완전한 남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분법적 성 개념을 넘어서는 공동체 문화
바후차라 마타는 중무장한 채로 수탉에 올라 타고 있는 상징적인 여신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와 여동생이 상인의 무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바삐야라는 약탈자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신성한 카스트인 챠란 계급에 속한 이들 자매는 관습에 따라 트라구(tragu), 즉 자결을 선언하고 가슴을 자른다. 챠란 계급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저주를 받은 바삐야는 불능이 되는데, 여자의 옷을 입고 모신(母神)을 숭배하며 속죄한 뒤에야 저주가 풀렸다.
인도 구자라트 주에 위치한 바후차라 마타의 사원은 일 년 내내 트랜스젠더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이 마을에서는 아무도 암탉과 수탉을 죽이지 않는다. 사원 주변의 기도의례와 가게들은 대부분 트랜스젠더들이 운영하고 있다.
▲ 2013년 8월 <뛰다> 팀은 인도 벵갈로에서 트랜스젠더들과 만나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 뛰다
젠더(성)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인 것이라면, 섹슈얼리티는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 인도의 서사시와 신화, 그리고 공연의 전통 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그러므로 남/녀 이분법적 성을 문화적으로 허가된 유일한 체제라고 간주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오래 된 구전 혹은 문자 전승의 문화를 지닌 대부분의 공동체 사회가 그러하듯 인도 역시 포용의 증표를 보여준다.
서구에서 수입한 비이성애적 상상들에 대한 비판은 서사시와 신화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비이성애적 상상들이 지지를 받거나 찬미된 것은 아니다. 동성애나 성전환에 대한 포용을 예외적이며 규범에서 벗어난 것으로 비하하려는 요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과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화와 서사시의 내러티브 속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 A. Mangai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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