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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로드트립> 30. 남아공을 떠나며(최종회)
애비(Abby)와 장(Jang)은 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 서른되던 해 여름 함께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합니다. www.ildaro.com
'흑인을 위한다'는 활동가들의 인종주의를 보며
집 나간 플로렌스가 돌아온 건 며칠 전이었다. 플로렌스는 센터의 살림을 맡아하는 도우미다. 짐바브웨 출신인 그녀는 매번 비자를 갱신하러 북쪽 국경에 가야 했고, 우리도 겪어본 '국경'은 끝없이 행렬을 이루어 남아공으로 들고나는 주변국 출신 노동자들에게 고압적이기 그지없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며칠이 걸릴지 모르겠다는 마지막 연락이 눈의 심기를 건드렸다. 안 그래도 지난번 국경에 다녀온 후 플로렌스가 덜컥 임신 사실을 알려 눈을 경악케 한 터였다. 이미 아비 없는 첫째를 짐바브웨의 친정 엄마에게 맡겼다고 들었건만, 이번에도 같은 사내인지 알 길이 없는 둘째 소식에 눈은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곧, 플로렌스는 아기를 잃었다. 단순 과로를 유산과 연결 짓는 것이 의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해도, 그저 처음부터 건강하지 못한 임신이었기 때문이라 해도 죄책감이 명치를 무겁게 눌렀다. 돌아온 플로렌스를 도와주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나는 그녀가 비운 빈자리를 장과 나눠 맡은 얼마간 밤마다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상주 인원은 넷이지만 하루 세 끼 제대로 요리해 차려 내는 음식 설거지와 때마다 밀려드는 식재료 손질 뒷감당은 버겁게 많았고, 손님도 끊이지 않았으며, 한식당과 게스트하우스를 겸하던 건물인 센터는 청소하기 만만치 않게 넓었다.
어느 아침, 눈과 병원에 다녀온 후 그 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들어서는 플로렌스를 보자 울컥 눈물이 솟았다. 아… 어쩌면 좋니. 나도 모르게 다가가 플로렌스를 꼭 안자, 짐짓 담담해 보이던 그녀가 “마이 베이비… 마이 푸어 베이비” 하며 어깨에 얼굴을 묻고 허물어졌다. 누가 보면 내가 일 시켜서 애가 그렇게 된 줄 알겠구나. 냉정한 말을 던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눈께 대들고 싶은 마음이 터지려는 찰나, 진이 눈을 붙잡았다.
- 빌이 또 연락하셨어요. 이번엔 답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 아이 참, 그 사람 왜 그렇게 재촉이야. 뒤채도 좋다면 오라고 해. 부엌은 출입 못하게 하고, 바깥에서만 지내는 걸로 얘기합시다.
빌은 프레토리아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활동하는 한국인 기독교 활동가다. 그가 나흘간 진행될 학생들의 방학 프로그램 공간으로 센터 대여를 요청하자, 눈은 난색을 표하며 답을 미루셨다. 물론 센터는 다양한 행사를 위한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할 생각이지만, 흑인들은 고려 대상이 아닌 까닭이었다. 그네들이 쓴 공간은 뒤처리가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느 지역의 활동가는 흑인 학생들을 센터에 머물게 하곤, 후에 해당 단체에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는 얘기도 하셨다. 흑인이 쓴 이불은 세탁해도 냄새가 지워지지 않으니 침구를 모조리 새로 구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대우하는 것은 생각만큼 당연하지 않다. ©Abby
함께 먹고 마시고 공부하고, 믿다가 속더라도 기회를 주고, 못 받아들이더라도 ‘꿈’을 얘기해 주는 타인이 남아공 젊은이들에게 절실하다고 말하던 빌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흑인들을 위해 일한다면서 흑인을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자신들과 결코 동등해질 수 없는 존재로 대하는 일부 활동가들을, 십 수 년이 지나도 현지인 리더를 키울 생각보단 처음처럼 변함없이 자신들이 개발 원조를 주도하고자 하는 외국 단체들의 현실을 아쉬워했다.
아예 흑인 학생 몇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하는 빌 부부의 행보는, 자연스레 다른 한국인 활동가들로부터 불편한 감정을 샀다. 한국의 비슷한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우리가 하루 저녁 외출해 빌 부부와 식사를 함께 하자, 눈은 싫은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유난한 건 좋지 않다, 는 것이 눈의 입장이다.
유난한 빌의 학생들은, 무난하게 흑인 인부들이 사용하는 뒤채에서 지내며 바깥에서 불을 피워 밥을 해 먹게 될 것이었다. 별스러운 빌과 그의 아내 또한 기꺼이 그들과 함께 바깥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장과 나는 그 모습을 보기 전에 떠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입버릇처럼 뇌까리곤 했다. 예정보다 일주일만 더 있다가는 그 새 우리를 자식처럼 (엄밀히 말하면 장을 아들로, 나는 며느리로) 아끼시게 된 눈께 끝내 직언을 드리게 될 것 같았다.
여행 중 여러 곳을 방문하며 우리가 정한 원칙은 ‘일단 머리를 비운다’는 것이었다. 인상 비평적 판단을 유보한 채 보고, 듣고, 겪는다. 잠시 머무는 객으로선, 가급적 비판적인 질문조차 삼가야 내 프레임에 그곳을 가두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야 정치적 종교적 색채가 다른 사람들, 문화적 차이가 큰 사람들로부터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프레토리아에서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고 서로 옆구리를 팔꿈치로 쳐 가며 머리와 입을 닫은 지 한 달, 가슴의 부대낌이 슬슬 한계를 넘어서는 중이었다. 한 곳에 오래, 예상보다 더 깊이 머물렀다.
‘완전한 타인’은 없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창문 없는 한 여인숙에 둘 다 쓰러진 후 꼬박 마흔여덟 시간 동안 잠을 잤다. 눈을 감으면 에티오피아의 슈퍼스타 아비가 등장했고, 기내에서 챙긴 비스킷을 씹다 말고 까무룩 다시 잠들면 마드리드 광장에 버펄로 떼가 출몰했다. 창문이 날아간 채 내달리는 댄싱 버스에선 케냐 고아원 아이들과 탄자니아 마사이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고, 다음엔 창밖으로 빅토리아 폭포의 물보라가 들이치는 백 년 된 로디지아 열차의 진동이 덜컹덜컹 느껴졌다. 롤러코스터 같은 꿈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안팎으로 쉼 없이 요동친 아프리카에서의 백 일 동안 나는 간혹 멀미에 시달렸다. 가장 오랜 아름다움과 가장 오랜 고통이 한 몸으로 뒤엉킨 아프리카.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다 담을 수 없는 절경과 아무리 눈을 감아도 피할 길 없는 참혹한 풍경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아프리카. 첫 사막과 초원과 인간이 출현한 그 땅의 오랜 세월에 비하면 찰나에도 미치지 못할 순간을 닿고 튕겨진 주제에, 무언가를 소화해보려 너무 발버둥 친 탓인지도 몰랐다.
멀미의 한 쪽은 인지부조화로부터 왔다.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진심과 열정이 그렇게 집중된 곳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오랜 호의를 입은 사람들의 눈빛에 짙게 밴 적의와 비관을 처음 마주했을 때,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지나는 여행자의 눈에도 보일 만큼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피폐해져온 듯했고 삶은 고단해 보였다. 조금 더 다가가자, 그들이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어느 역사가는 현재 아프리카의 개발 원조 활동가 수가 식민 시대의 유럽인 관리 숫자보다 훨씬 많다고 지적하며, 선진국의 활동가들이 보다 현대적인 방식으로 아프리카의 식민 통치를 이어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희망과 절망이 엇갈리고, 선의와 기만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은 그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 때나 구걸을 하고 누구에게나 돈과 선물을 내놓으라 뻔뻔히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존중이나 믿음이나 자립 따위가 자신들 몫이 아니라면 가능한 실속을 챙겨야겠다는 생존 방식인 것일까? 거리에서 누군가에게 길을 물을 때면, 방향을 가리키는 그네들의 손가락을 믿는 데조차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 혼란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전 세계가 이견 없이 이곳을 돕고자 하는 한편 영원히 도울 수 있도록 그 상태 그대로 있어주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의 체계를 내 속에서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했다. 나는 결백한가. 나는 아프리카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을까. 간간히 찾아들던 묘한 죄책감은 엄밀히 말해 이 세상에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타인’, ‘나와 완벽히 상관없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지나온 시간은 뒤에 두고
▲ 오래도록 그리울 아프리카의 하늘 ©Abby
끙끙 앓던 자리를 접고 일어나 며칠 만에 거리로 나왔다. 허기를 호소하는 것이 배인지 심장인지 쉬 분간이 되지 않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마드리드의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들숨을 따라 그대로 들이마셔지는 것 같았던 그 탁 트인 아프리카의 하늘, 우리가 더 이상 그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더 크게 두 팔을 벌려 그 하늘을 품어 왔어야 했던 건 아닐까. 너무 빨리 그 하늘이 잊히면 어쩌나. 말끔한 차림의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며 바쁘게 활보하는 반듯한 대도시 한복판에서 문득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 나미비아에서처럼, 아직도 너희가 돌아올 것만 같구나.
그 사이 메일함엔 진과 눈에게서 온 소식이 있었다. 마지막 날, 정신없는 일과를 보내다 마치 저녁에 다시 만날 것처럼 공항 앞에서 바쁘게 헤어진 것이 못내 아쉬우신 모양이었다. 며칠간 저녁마다 잘 도착했다는 우리의 전화를 기다리셨다는 눈의 이야기에 몹시 죄송해졌다.
그러나 보고 싶다는 어떤 말보다도, 우리가 남긴 아이들의 사진 파일과 돈으로 꼭 아이들에게 사진을 선물하겠노라, 우리를 위해 다시 한 번 다짐해 주는 진의 말이 고맙고 미더웠다. 그녀라면 우리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아이들 손에 사진을 쥐어 주리라.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이니까. 그곳 사람 또한 밥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반질반질 근사하게 잘 닦인 마드리드의 돌길을 다시금 딛고 서자,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아프리카가 아니라, 작열하는 태양처럼 거침없고 뜨거웠던 삶의 한 절을 영영 떠나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거창하기도 하지, 스스로 타박하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장의 손을 꾸욱 잡았다. “자 힘내, 이젠 이리 넘어와야지” 하고 힘주어 손을 마주 잡는 그가 있어 참 다행이다.
그래, 어쩌겠는가. 소화한 일도 못한 일도, 아쉬움도 충만함도, 지난 시간은 뒤에 두고 다시 앞을 향해 자세를 가다듬을 시간이다. 여행자에게 뒤돌아보느라 현재를 놓치는 것만한 패착은 없으리라.
일단 초콜릿에 깊이 담근 추로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지나온 세계엔 없고 당도한 세계에만 있는 그 ‘악마의 단 것’을 한 입 베어 물면, 다시금 새로운 여행이 시작될 것 같았으므로. (Abby) -부족한 경험과 글을 나눌 기회를 주신 일다 편집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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