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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아프리카 로드트립> 29. 다시 남아공으로 ①

애비(Abby)와 장(Jang)은 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 서른되던 해 여름 함께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합니다. www.ildaro.com
 

남아공 대형마트에서 장보기
 
- 으악!
 
과욕을 부리던 내가 또 사고를 쳤다. 차 트렁크에서 물건을 내리던 중, 한꺼번에 여러 개를 그러안다 놓친 20kg짜리 딸기잼 캔을 받겠다고 반사적으로 다리를 뻗은 것이었다. 덕분에 캔은 정확히 정강이를 찍고 나동그라졌고, 캔 모서리도 정강이도 움푹 패고 말았다. 너무 아파 눈물을 찔끔 흘리며 동동대는 내게 장은 한 음절의 동정도 보내지 않는다. 내가 뭐랬어, 차근차근 하라니까. 그저 끌끌 혀를 차며 호박 부대를 들어 옮기는 저 남자는 역시 ‘남의 편’이라 남편인가.
 
프레토리아 활동가들의 주중 일과 중 하나는 방과후학교 아이들의 먹거리를 마련하는 장보기였다. 일주일에 네 번, 백 명이 훌쩍 넘는 아이들을 먹이는 일이라 장만하는 음식재료의 양이 엄청났다. 장과 내가 합류해도 물건을 사고 싣고 내리고 정리하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리는 일을, 빼빼 마른 노년과 중년의 두 여인이 가든히 해 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보통은 주스, 빵, 잼, 버터, 스낵 종류로 비교적 품목이 단순했지만, 한 끼만큼은 꼭 밥을 먹이고 싶다는 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후로는 채소와 고기 등 각종 다양한 음식재료가 밴을 꽉꽉 채웠다.  

▲ 남아공 대형마트의 채소들. 형형색색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구경하는 것은 산뜻한 기분 전환이 된다.  ©Abby 
 
힘은 들었지만 장보기는 은근히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동아프리카를 종단하는 중에도 곳곳에 대형 상점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으나, 대체로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다는 안도를 주는 수준이었다. 도시에 따라서는 물건이 제대로 수급되지 못해 매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남아공의 마트는 차원이 달랐다. 구비된 물건은 종류와 규모 면에서 한국을 압도하는 수준, 꼭 한국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 특정 재료를 빼고는 각 문화권의 거의 모든 음식재료가 오색찬란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나무 바구니에 담긴 싱싱한 야채들이 뿜어내는 색감과 윤기며, 막 오븐에서 나온 빵과 과자들이 풍기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 현존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고기로 만드는 남아공 특유의 먹거리 빌통(biltong, 육포)이 종류별로 널린 곳곳을 놀이동산 누비듯 헤매노라면 오감이 다 신선해지는 느낌이었다. 흙먼지 부연 비포장도로, 어지러운 시골 마을, 격정적인 아프리카 사람들과 밀도 높게 부대끼는 사이사이에 이런 도시적 말끔함을 가끔 쐬어주는 것이 꽤 효과적인 기분 전환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이건 정말 뿌듯하다, 그렇지 않아? 한국에서라면 이 중 하나 정도나 살 수 있겠지?
 
한쪽에 모아 놓은 채소들을 보며 하는 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에서 매일 행사로 제공하는 ‘오늘의 꾸러미’, 그날의 꾸러미는 양파 한 자루, 감자 한 부대, 수박 한 통, 버터넛이라 부르는 노랗고 길쭉한 호박 한 자루, 토마토 한 상자였다. 그 모두를 합친 가격은 단 돈 1백 랜드(한화 약 1만 5천원)! 마트 측의 재고 처리 의도가 있는 기획이라곤 해도 어디 한 군데 무르거나 다친 데 없는 멀쩡한 녀석들이다. 덕분에 아이들에게 더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먹일 수 있어 기쁘다.

▲ 거의 모든 종류의 육류로 만드는 남아공 특유의 육포, 빌통(Biltong)     © Abby 
 
‘어르신 모시기’는 쉽지 않아
 
짐을 부려 놓고 바쁘게 나는 진의 작업실에, 장은 거실에 앉았다. 나미비아에서 돌아와 맞은 두 번째 자원봉사는 정신없이 흘러가는 중이었다. 틈나는 대로 나는 1분기 재정 정리를 도왔고, 장은 홈페이지를 다듬었다. 그보다 중요하게는 후원자들에게 보낼 아이들의 연간 성장 정보 업데이트를 위해 매일 아이들 사진을 찍고, 키와 몸무게를 재고, 몇 가지 간단한 정보들을 조사해 정리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하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부름에 기민하게 답했다.
 
- 애비, 장, 진아!! 나와 봐라, 여기 좀!!
 
앉아서 컴퓨터와 서류를 잡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진과 눈짓을 주고받곤 ‘제가 갈게요’ 하고 총알같이 뛰쳐나왔다. ‘부르셨어요, 선교사님’ 하고 부엌으로 들어서자 찌푸린 얼굴의 눈으로부터 가벼운 책망이 떨어졌다. 지금이 몇 시냐. 저녁 시간 살펴서 식사 준비할 생각을 해야지, 일도 좋지만 계획 없이 시간을 써서야 되겠니.
 
- 네 그러게요, 제가 이렇게 생각이 모자라요. 짜장밥이랑 찌개 괜찮으세요?
 
신기하게 나답지 않은 넉살이 술술 나온다. 실은 이것이 우리가 남아공에 돌아오기로 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늘 혼자 눈을 보필하는 진의 짐을 잠시라도 덜어 드리는 것. 다행히 우리를 예뻐하시는 눈의 관심과 잔소리를 가로채 잠시라도 진과 눈 사이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 진이 집중해서 방과후학교 연간 계획을 세울 수 있게 집안일로부터 방패(?)가 되는 것.
 
눈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은퇴하고 홀로 와 계신 활동가다. 60년대에 명문대 경영학 석사를 마친 여성 엘리트로, 결혼 후엔 북미로 이주해 아이 셋을 키우는 일하는 엄마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 왔다. 사업하면서도 몇백 평 저택을 돕는 사람 없이 혼자 건사했고, 그날그날 입을 옷의 스타일에 따라 차를 골라서 탈 만큼 막대한 부를 누렸다. 타고난 외모도 출중한데다 자기 관리도 철저해 아무도 그녀를 칠십 넘은 노인으로 보지 않는다. 아이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은퇴하고, 이제 여생을 남을 위해 살겠노라 활동가로 변신해 남아공으로 삶터를 옮긴 지 몇 해 째다.
 
그런데 터전과 직책이 바뀌었다고 평생의 라이프 스타일까지 따라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늘 저녁으로 말한 짜장은, 당연히 춘장을 볶아 해내야 할 것이었다. 한 번은 월남쌈을 준비하며 땅콩 소스에 피넛 버터를 넣었다가 ‘게으른 사람들이나 쓰는 방법’이라며 혼쭐이 났다. 다른 활동가는 활동가들의 주중 모임 식사를 한 번 라면으로 먹자고 했다가 타박을 들었다.
 
매 끼 식사는 언제나 정찬으로 차려야 해, 매일 아침 일곱 시 첫 모임 전에 식사 준비를 마치기 위해 여섯 시면 눈을 떴다. 때로 방과후학교처럼 멀리 떨어진 활동 현장에서 일이 늦어질 때면 전화로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빨리 와서 밥 안 하냐!
 
간혹 인생의 2막에 앞서 지난 무대는 깨끗이 갈무리하고, 마치 새로 배우는 인턴인 듯 현지 생활을 익히려 애쓰면서 한 발짝 물러서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으셨던 어떤 어르신들을 뵙기도 했다. 평생 연마한 의술이나 건축술 등을 가지고 젊은이처럼 일하며 두루 현지의 활동가들을 비롯한 커뮤니티를 도우시는 분들도 있었다. 본인들의 옛 시절이 떠오르신다며 타지에 나와 사는 젊은 활동가들을 아무 대가 없이 이모처럼 삼촌처럼 살뜰하게 챙기시는 교민들도 보았다.
 
그러나 ‘눈’의 경우를 더 많이 마주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서른부터 예순까지만 쳐도 삼십 년 곱하기 삼백육십오일, 일만이 넘는 날들을 충실히 자신과 가족을 위해, 한국 사회의 문법대로 살아온 삶의 관성은 얼마나 강력한가. 마음 같지 않게 몸에 꼭 붙은 한국적인 사고와 생활 방식에 좀처럼 현지 적응은 어렵고, 그래도 나는 어른이니 경험과 세월에서 우러나온 가르침을 내리고만 싶고, 모셔주길 바라지는 않으나 모시지 않으면 쉬이 서운하고 노여워지는 분들. 경영자 출신인 분들이 특히 더했다. 그러면 냉정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분들을 돌보랴 자리를 만들어 드리랴 안 그래도 바쁜 삶이 한층 고단해진다.
 
은퇴 후 국외 봉사나 선교를 꿈꾼다면 젊은 시절부터 엄격히 자신을 관리해 검박하고 겸손한 삶을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을 스스로 파악할 때 그게 어렵다면, 생각하셨던 정착금과 생활비를 현장에 전폭 지원하시고 한두 해에 한 번쯤만 ‘어르신’으로 잠시 방문하시는 것이 어떨까. 너무 효율만 따진 야박한 생각임을 알지만, 나는 현장에서 종종 마주치는 은퇴 활동가들, 한국의 아들 며느리라면 언감생심 받아 주지도 않을 응석과 권위를 마음껏 부려 전체의 팀워크와 생산성을 떨어뜨리면서도 한국으로부터 ‘노년에 고생한다’는 찬사를 받는 어떤 어른들이 얄미웠다.
 
‘악한 인간’은 따로 있지 않다
 
이튿날, 일찍부터 방과후학교가 있는 마을로 향하는 우리와 진의 친구 트루디가 동행했다.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이민자들. 보어인들은 유럽출신 이민자 중 가장 초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정착한 그룹이다.)인 그녀는 프레토리아 주 정부의 스포츠와 여가 관련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 레크레이션 일일 강사로 나서 마을의 시선을 집중시킨 트루디     © Abby 
 
오늘은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레크레이션 프로그램 일일 강습을 위해 나선 길이다. 마을의 센터 마당에 도착해 짐을 풀자, 이웃 주민이 흘낏대는 눈길이 느껴졌다. 이미 아침부터 거나하게 취한 옆집 남자는 우리를 향해 팔을 뻗고 알 수 없는 부족말로 크게 떠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간 마을에서 활동해 온 동양인들이야 익숙하지만 여전히 보어인이 개인적으로 타운십(흑인 구역)에 들어올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진과 비슷한 중년 연배의 트루디만 해도 어린 시절 흑인 유모로부터 ‘아가씨’ 소리를 듣고 자랐다. 연로하신 그녀의 부모님은 여전히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아, 한동안 진과 함께 산 다른 활동가가 흑인 아기를 안고 트루디의 집을 방문하면 아기를 향해 제대로 눈길조차 보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스스럼없이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누고 낄낄대며 몸을 부딪치며 놀이를 함께하는 트루디의 모습이 도드라질 정도다. 인정하건 안 하건 사람은 다 똑같아, 간혹 그녀는 말하곤 했다.
 
트루디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시대를 개인적인 삶에서 소화해야 했던 세대다.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 한 번 기울어졌던 균형추가 조화로운 자리를 잡기까지는 오랜 진통이 필요했다. 특히나 공무원 조직에서 분 변화는 상상을 초월해,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녀가 거꾸로 견뎌야 했던 차별과 냉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고 했다. 여전히 트루디의 보스는 때때로 별다른 이유 없이 그녀를 해코지한다.
 
인간일진대 권리를 찾은 흑인들에게 왜 복수심이 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뿐 아니라 2008년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잔혹하게 벌어진 유혈 사태, 제2의 타운십처럼 다시 별도로 구분 지어진 이주민 거주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절대선과 절대악을 짓는 인간이 따로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입장이 달라지면 인간도 달라진다. 나치에게 당한 것보다 절대 덜하지 않게 팔레스타인을 괴롭히는 유대인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제삼자여서 담담한 척 그들을 읽어내려는 나 역시 당사자가 되면 크게 다르지 않겠지. 하여, 인간의 절대적 종류보다 때마다 약자의 입장에 함께 서라던 어느 선배의 충고는 일리가 있다.
 
세단보다 빛나는 진의 흙범벅 ‘똥차’

▲ 교회 청년들의 횡포로 건물에서 쫓겨나 수업 중인 아이들     © Abby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이른 오후 트루디와의 강습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어진 방과후학교 준비가 곧 난관에 부딪혔다. 장소를 빌려주는 교회의 청년 셋이 자신들이 기도회를 해야겠으니 나가라며 어깃장을 놓은 거였다.
 
스태프들이 따지고 어르고 달래도 막무가내, 옳고 그름을 떠나 싸움이 붙어 보아야 이쪽에 이로울 것이 없었다. 결국, 텅 빈 건물을 세 사람이 차지한 채, 바깥에 겨우 햇빛을 막을 가림막을 쳐 아이들을 두 팀으로 앉혀 수업을 진행하고, 한 편에서는 아이들을 줄 세워 사진 찍고 키와 몸무게를 쟀다. 안 그래도 바깥이라 질서를 잡기가 어려운데, 빵 대신 준비한 팝(옥수수 가루를 뜨거운 물에 갠 것)과 치킨 스튜에 흥분한 아이들은 통제 불능이 되어 그야말로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피곤하지?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휑하니 다녀올게!
 
전쟁 후 폐허가 된 공터에 길게 누운 해를 따라 널브러진 장과 나, 민과 안을 보며 진이 말했다. 누구보다 진이 빠졌을 하루의 끝에 여전히 가장 씩씩한 사람은 그녀다. 그리곤 여느 때처럼 흙투성이가 된 해가리개 텐트, 백오십 명분의 더러운 그릇들, 호박범벅 찌꺼기가 범벅이 된 대야, 흙과 주스가 엉긴 컵이 가득 든 버킷 같은 것들을 그녀는 서슴없이 턱턱 차에 싣게 했다. 트렁크가 모자라면 뒷좌석에 놓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노을에 녹아든 그 모습이 이 북새통의 하루를 어루만진다. 활동가라고 해서, 선교사라고 해서 누구나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마을의 센터에서 방과후학교가 열리는 교회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이니 현지인 스태프들에게 수레나 한 대 던져주면 될 일을, 매번 자기 차로 해결하다니. 꼭 차로 가야 해요? 하고 물으면 그녀는, 쟤들 종일 힘들어. 얼른 실어다 주고 올게. 했다. 그러니 진의 차는 참 더럽다. 나미비아의 흙탕을 헤집고 다녔던 우리들의 왜건만큼이나 늘 엉망이다. 티 하나 없는 눈의 고급 세단 옆에 만날 주차되니 더욱 더러워 보이는 진의 그 똥차가, 장과 나는 참 좋았다.
 
- 누가 뭐래도 애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스태프들이야. 정말 애들 위해서 애 많이 써.
 
진은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언뜻 보기에 그녀는 언제나 요구 많은 스태프들과 실랑이 중이다. 언성을 높여서 무섭게 다그칠 때도 있다. 그러나 늘 덤비며 퉁퉁대는 것 같은 스태프들도, 진에게만큼은 존중 받고 있음을, 자신들의 수고가 인정받고 있음을 아는 것 같다. 가끔 들러 ‘사랑한다, 귀하다’ 말하지만 그들이 차에 타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 어르신을 대하는 표정과 다 큰 성인이면서 때로 진을 ‘맘 mom’이라 부르는 그네들의 표정은, 진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누가 뭐래도 우릴 진심으로 위하는 건 이 사람이에요. 

▲ 가르침은 말보다 서로 몸을 부딪치며 부대끼는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닐까?   © Abby 
 
무얼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단단한 한 사람 진의 행동과 표정과 말이 프레토리아의 한 빈민촌에 정직, 인내, 인간에 대한 신뢰 같은 것들을 싹 틔우고 있었다.
 
방과후학교의 현지인 활동가들은  운영비가 모자란다고 매일 불평할지언정 월급 외엔 단 1랜드도 자기들의 주머니를 채우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는 교회의 청년들과 맞붙어 싸우지 않는다. 절망만을 안겨준 이 빈민촌에서 나고 자란 그네들이지만, 아이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미래를 보일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아직 시퍼런 적대감이 지구상에서 가장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고 종교인도 정치인도 활동가도 서로를 불신하는 이 나라에서, 그 싹이 더 많이 틔워지길, 부디 건강히 살아남아주길 어찌 간절한 마음으로 빌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자신을 던져 가치를 지켜내고, 누군가는 가치를 이용해 자신을 지킨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관성을 거스르려 애쓰고 어떤 이들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앞의 이들을 못마땅해 한다. 활동가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그 사이를 살고 있으리라. 여행자로서, 자원봉사자로서의 우리, 당신과 나는 어디쯤에 서 있을까. 똥차 뒷좌석의 흙을 털고 앉으며 묻는다. (Abby)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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