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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스무살 여연의 공상밥상 (5) 원추리나물과 냉이부침 
 
홈스쿨링과 농사일로 십대를 보낸, 채식하는 청년 여연의 특별한 음식이야기. 갓 상경하여 대도시 서울의 일상 속에서 음식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그리고 그 좌충우돌 실험 속에서 터득한 ‘여연표’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www.ildaro.com  

▲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표지. 케네스 그레이엄 글,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시공주니어)
 
“하늘과 땅과 모울의 주변은 봄이 한창이었다. 봄은 성스러운 불만과 열망에 가득 찬 기운을 품고 어둡고 누추할 정도로 좁은 모울의 집까지 스며들어왔다.” -케네스 그레이엄,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케네스 그레이엄이 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동화이다. 이 동화의 첫머리에서 두더지 모울은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봄기운에 흥분해서 ‘솔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뛰쳐나간다.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급하게 모울을 불러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더지 모울의 모험은 그렇게 시작된다.
 
서울에서 나의 일상은 계절과 그렇게 큰 상관은 없다. 그래서인지 봄이 왔다는 것도 직접적으로 몸에 와 닿지는 않는다.
 
어느 날은 시장에 갔더니 쌈 채소들이 잔뜩 나와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황사주의보가 내렸다는 걸 알게 된다. 촉촉하게 비가 내려도 더 이상 오스스하지는 않다. 길고양이들이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이 하나 둘 보인다. 무엇보다 이제 춥지 않다! 두 겹, 세 겹씩 옷을 껴입고 두꺼운 외투에다 목도리, 장갑, 귀마개로 완전무장을 하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게 기쁘기 그지없다. 피부에 와 닿는 바람도 날카롭지 않다.
 
‘봄나물 캐러 집에 가봐야겠어’
 
유난히도 따뜻하던 어느 날, 갑자기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이 떠오르자 나도 어딘가에 가고 싶어졌다. 모울처럼 모험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반대로 내가 매년 봄을 맞았던 곳이자 봄기운을 맘껏 느낄 수 있는 곳이 그리워졌다. ‘집에 가봐야겠다.’ 무작정 집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봄이라고 들떠서 일상생활을 제쳐놓고 놀러 간다고 생각하니 좀 민망해서 먼저 핑계를 만들었다. ‘지금은 감자 밭을 만들 때잖아. 나는 놀러 가는 게 아니라 괭이로 감자밭 만들러 가는 거야. 차비 아까워하지 말고 일단 가자!’
 
사실 감자밭은 핑계일 뿐이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 햇살 아래서 깜빡깜빡 졸면서 곧 맛보게 될 나물들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야생 봄나물들은 향기가 강하다. 머위는 씁쓰레하고, 달래는 톡 쏘고, 쑥은 향긋하면서도 고소하고, 통통한 연초록색 두릅은 진한 소나무 향기를 풍긴다. 씀바귀와 민들레는 씁쓸한 상추 같은 맛이 나고, 노란 별을 닮은 삐죽삐죽한 꽃이 피는 돌나물은 토실토실하게 물이 올라서 양푼에 담아 고추장 양념으로 샐러드를 만들면 입 속에서 톡톡 터진다. 살짝 삶아 조선간장과 들기름으로 양념한 미나리나물은 쫄깃하고 즙이 많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 다니며 나물을 캐는 것도 봄에 맛볼 수 있는 커다란 기쁨이다. 산에서 볼 수 있는 색은 아직 갈색, 회색, 누런 색이 대부분이지만 햇빛이 많이 비치는 따뜻한 곳에서는 초록색이 언뜻언뜻 보인다.
 
매년 한두 가지의 나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보물 같은 장소들도 있다. 밭 옆 산에서는 질 좋은 돌나물과 쑥이 자라고, 습기가 많은 개천 옆 어딘가에서는 돌미나리를 한 묶음이나 뜯을 수 있다. 어느 여름날 동생과 놀다가 평소에 잘 안 가던 조그만 계곡에서 엄청나게 많은 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걸 찾아냈을 때는 둘 다 잔뜩 흥분했었다. 올해도 그 장소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이번엔 고작 며칠이지만 산을 헤매면서 나물을 뜯어 원 없이 무쳐먹고, 지져먹고, 국 끓여먹고 와야겠다.
 
산골의 3월은 빈궁한 ‘나물고개’
 
그런데 정작 집에 도착해서 “당장 나물 캐러 갈래!”하고 떠들었더니 왜 벌써 왔냐는 핀잔을 들었다. 우리집은 남쪽이지만 산이라서 주변의 다른 마을들보다 해가 늦게 떠서 빨리 지고 공기도 차갑다. 그러니 아직은 추워서 나물들이 반찬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자라지 않은 것이다.
 
슬슬 봄기운이 찾아오지만 아직은 쌀쌀한 감이 있는 3월 초에서 중순 사이는 오히려 한겨울보다 더 먹을 게 없는 시기이다. 저장해놓았던 야채들이 다들 상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감자는 겨우내 싹이 올라올 때마다 꺼내서 떼어내고 또 떼어내고를 반복하다 보면 볼품없이 쭈글쭈글해진다. 추위에 민감한 고구마는 얼어서 썩은 걸 골라내고 나면 남은 것도 별로 없다. 양파는 노랗고 푸른 싹이 자기 몸보다 더 기다랗게 자라면서 서서히 썩어간다. 겨울 내내 맛있게 먹었던 장아찌랑 김장김치가 슬슬 질리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가족들은 농담처럼 이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보릿고개란 저장해놓은 곡식은 다 떨어져 가는데 아직 햇보리는 익지 않은 4~6월 사이의 시기를 말한다. 대부분의 농부들이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던 옛날에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지주에게 도지를 주고 나면 먹을 양식이 부족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식민지적인 지주제도가 견고해지면서, 소작농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경작권마저도 빼앗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곪았다. 한때 한국을 식량 기지로 삼았던 일본의 ‘산미증식 계획’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한국은 늘 식량 부족에 시달리면서 만주에서 좁쌀을 수입해 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한 봄철에는 아무도 심거나 돌봐주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나는 산나물 들나물은 특히나 소중한 양식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나물이 먹을 만큼 크지 않은 지금 이 시기는 ‘나물고개’라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나물고개에 미나리는 새끼손가락 반 마디만하고 머위 잎은 강아지 발바닥만 해서 뜯기 미안할 지경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어서 바구니를 들고 마을 근처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반가운 냉이, 달래, 싱아 그리고 원추리! 

▲ 바구니에 가득 채운 원추리, 쑥, 달래, 냉이, 싱아  ©여연 
 
앗, 저기 냉이가 있구나!
 
늦가을에 싹을 틔워 눈 속에서 겨울을 버텨낸 냉이는 얼핏 보면 도무지 먹을 수 있는 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겨울 찬바람을 피하려고 땅에 딱 달라붙어 땅딸막한데다 색깔은 얼마나 불그죽죽한지. 톱니바퀴가 비죽비죽 튀어나온 질긴 잎사귀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다.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죽은 이파리들이 누렇게 말라붙어 있는 걸 보면 ‘살아있는 풀 맞아?’ 싶을 정도다. 하지만 잘 씻어서 국에 넣거나 살짝 데쳐서 뿌리까지 꼭꼭 씹어 먹으면 냉이 특유의 향기로운 냄새와 함께 입 안 가득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양지바른 곳에는 쑥과 달래, 싱아도 있다. 다 자란 쑥은 그야말로 산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거칠고 키도 크지만, 말라비틀어진 작년 쑥 덤불 속에서 매년 봄마다 고개를 내미는 어린 쑥은 연둣빛이 도는 흰색에 앙증맞은 모습이다. 아직 머리카락보다 조금 더 굵을 뿐인 어린 달래도 진한 향기를 풍긴다. 시큼한 맛을 내는 싱아는 샐러드를 만들 때 같이 넣으면 상큼하다.
 
하지만 오늘 최고의 수확은 바로 원추리가 무리 지어 자라는 곳을 발견한 것이다. 전에는 늘 근방을 지나다니면서도 그 자리에 원추리가 있는지 몰랐다. 어린잎과 꽃을 먹는 백합과의 원추리는 기분을 좋게 만들고, 생리통에도 좋다고 한다. 통통한 어린잎을 뜯어서 맛을 보면 봄나물 치고는 특이하게도 달다. 살짝 데쳐서 나물로 먹으면 비린 맛이 없는 파나물을 먹는 것처럼 미끈한 식감에 달짝지근한 맛이다.
 
나물들을 바구니에 채워서 흥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하늘을 쳐다봤더니 마치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곳은 이런 곳이지 않을까? 서울은 배움의 장소이자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활기찬 장소이지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삶의 장소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내가 정말 살아있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곳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곳은…. 아직은 서울 삶에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내가 만든 싱아를 넣은 샐러드와 원추리나물, 엄마표 들깨 무국, 동생이 만든 파전으로 저녁을 먹고 나가보니 겨울 별자리인 오리온이 촐싹거리는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중이다. 하지만 산 가까이로 비스듬하게 많이 기울어져 있는 걸 보니 이제 봄 별자리들에게 자리를 내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겨울은 그렇게 봄에게 자리를 비켜 준다.

원추리나물

▲ 어린잎과 꽃을 먹는 백합과의 원추리는 기분을 좋게 만들고 생리통에도 좋다고 한다.  © 여연 
 
재료: 원추리, 소금, 된장, 들기름, 매실액,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약간
 
원추리를 제외한 재료들은 섞어서 양념을 만들어 놓는다. 된장과 들기름을 한 수저 넣으면 매실액은 반 수저, 다진 마늘은 3분의 1수저 정도를 넣는다. 고춧가루는 많이 넣으면 비릿하기 때문에 색깔을 낼 정도만 뿌려준다.
 
소금을 약간 탄 끓는 물에 원추리를 넣고 뒤적거리면서 풀이 죽을 만큼만 살짝 데친 다음에, 찬물에 씻어서 물을 꼭 짜낸다. 원추리에 양념을 섞어서 주물럭주물럭 나물을 무친다. 통깨를 뿌려서 예쁜 접시에 담아낸다.

 • 냉이부침과 달래간장 

▲ 냉이부침에 곁들인 달래간장.  달래는 간장에 10분쯤 재워놓았을 때 가장 맛있다.  © 여연 
 
-냉이부침 만들기: 냉이, 밀가루, 계란, 물, 소금을 준비한다. 밀가루에 계란 한 알과 물을 넣어서 묽은 반죽을 만든다. 냉이는 뿌리까지 잘 씻어 놓는다. 크기가 큰 냉이는 반으로 자르고, 작은 냉이는 통째로 반죽에 버무린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기름을 둘러서 뜨겁게 달군 팬에다 놓고 바삭바삭하게 굽는다. 달래간장을 곁들인다.
 
-달래간장 만들기: 달래, 양조간장, 식초, 들기름, 매실 액이나 설탕, 깨소금, 물 약간을 준비한다. 달래는 잘 씻어서 뿌리 채 손가락 작은 마디만한 크기로 송송 썰어놓는다. 달래를 제외한 재료들을 섞어서 양념장을 만든다. 맛을 봐서 짜다 싶으면 물을 조금 넣고, 달래를 넣어 향이 잘 배이게 버무려 놓는다. 너무 오래되면 달래가 물러져서 맛이 없고, 10분쯤 재워놓았을 때 가장 맛있다. (여연)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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