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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여연의 공상밥상 (6) 땅끝 마을에서 만난 풀꽃과 사람들
홈스쿨링과 농사일로 십대를 보낸, 채식하는 청년 여연의 특별한 음식이야기. 갓 상경하여 대도시 서울의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스무살 청년의 음식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좌충우돌 실험 속에서 터득한 ‘여연표’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www.ildaro.com
해남의 한 녹차농장에 초대를 받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전라남도 해남의 어느 녹차농장에 와있다. 서울에서 버스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곳에 약간 무리를 해서 온 건, 차밭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기타 연주를 해달라는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음악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글 주제를 완전히 바꾸면서까지 여기서 며칠 더 있기로 했다.
나를 여기 초대한 이는 이 농장에 살면서 일을 돕고 있는 젊은 여성이다. 도시에서 살다가 얼마 전 새로운 삶을 찾아 이곳으로 내려온 그녀는 주변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사람이다. 음악회가 다 끝난 한밤중에 뜨끈한 방바닥에 등판을 지지면서 우리는 피곤한 가운데서도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이곳의 일상에 대해서 말하면, 나는 서울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 공유하는 관심사들이 종종 커다란 웃음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이 농장은 차밭과 민박, 체험학습장을 겸하고 있다. 음악회나 워크숍 같은 여러 행사를 열기도 한다. 농장을 운영하는 부부는 젊은 청년들이 이 공간에 와서 꿈을 펼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열린 분들이다. 그래서인지 낯선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슬쩍 왔다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있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 무릉도원처럼 펼쳐진 해남의 '설아 다원' 풍경. 녹차밭 주위에는 별꽃, 제비꽃, 민들레가 오밀조밀 피어있다. © 여연
다음 날 늦잠을 잔 내가 일어났을 땐 음악회에 참석했던 손님들은 모두 떠난 후였다. 미적미적 눈곱을 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싼 바위산, 그 아래에 줄줄이 펼쳐진 녹차 밭. 고개를 들면 흰 목련이 보인다. 건드리면 움찔할 것 같은 우아한 분홍색 진달래, 크리스마스 조명등처럼 생긴 노란 개나리, 꿀이 가득 차있는 붉은 동백꽃. 줄을 맞춰서 심어놓은 차나무 사이에는 별꽃, 민들레, 제비꽃이 오밀조밀 피어있다. 화단엔 어디에 피어 있어도 뜬금없어 보이는 수선화도 있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꽃들, 새소리, 이 모든 게 너무나도 꿈결 같고 낯설어서 놀랍다. 분명히 익숙한 풍경인데 익숙하지가 않다. 서울에서 살게 된지 6개월이 되어가는 지금, 도시의 소란스러움을 접할 때마다 놀라서 부르르 떨면서도 나도 모르게 적응을 했나 보다. 당연한 일이야, 라고 중얼거려 보지만 왠지 씁쓸하다.
산책을 하고, 차를 우려 마시고, ‘공상밥상’ 글을 조금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느긋하게 오전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에는 근처 해수탕에 갔다가 장을 봐와서 음식을 했다. 나는 이번 칼럼을 위해 꽃으로 장식한 잡채와 떡 미역국을 끓이기로 했고, 중학생인 이 집의 둘째 딸은 크림 파스타를 시도해보고 싶단다.
농장에 딸린 체험학습장에 있는 부엌은 냄비, 프라이팬, 가스레인지 모두 기가 질릴 정도로 큼직큼직했다. 이런 거대한 부엌에서 당면 한 봉지를 몽땅 삶아서 10인분쯤 되는 잡채를 만들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하다.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크림파스타 만드는 요리법을 검색하던 둘째 딸은 마음만큼 손이 빨리 따라주지 않아서 이리저리 헤매는 눈치다.
시금치를 삶아 무치고 당근과 팽이버섯을 볶고 계란을 부쳐서 잡채를 만들었다. 면을 살짝 맛보니 왠지 덜 삶아진 것 같지만 에이 모르겠다, 싶어서 그냥 버무리기로 했다. 온통 꽃 천지인 바깥에서 진달래, 개나리, 목련과 동백꽃을 따와서 장식을 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질 좋은 생미역을 듬뿍 얻어서 버섯과 떡을 넣어 미역국을 끓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오래오래 국물을 우려내야 하는데 그럴 정신이 없어서 빨리빨리 끓여 버린 게 조금 마음에 걸린다.
봄꽃으로 장식한 10인분의 잡채를 선보이고
농장의 주인부부와, 파스타를 만든 중학생 둘째 딸, 할머니, 어제 가야금 공연을 해주셨던 아주머니, 다국적 유기농장체험 프로그램인 ‘우프’(WWOOF)를 통해서 머무르고 있는 프랑스 남자와 한국여자 커플, 그리고 언니와 나. 오늘 요리를 맛볼 사람들이다.
▲ 꽃 천지인 바깥에서 진달래, 개나리, 목련과 동백꽃을 따와서 잡채를 장식했다. © 여연
내가 마지막으로 미역국을 만들어서 들어갔을 땐 배고픈 사람들은 이미 벌써 생선회와 소주, 엄청난 양의 크림파스타와 잡채를 먹어 치운 후였다.
“이런 말은 솔직히 해줘야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잡채가 영 싱거워.”
“당면을 더 삶아서 비볐어야 했어.”
첫 마디부터 영 심상치가 않다. 주부 경력 몇 십 년인 아주머니들의 가차 없는 평이 이어진다. 장식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잡채 간에 신경을 많이 못 썼다는 걸 이렇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여기 해남은 음식을 좀 짜게 먹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어제 먹은 반찬들도 내 입맛에는 약간 짭짤했다. 보통보다도 약간 더 심심한 잡채는 사람들의 입맛에는 영 밍밍했던 모양이고, 내 입에는 약간 짜게 느껴지는 미역국을 오히려 맛있게 먹었다.
타인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기타를 치고 글을 쓸 때면, 타오르다 만 모닥불처럼 애매하게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왜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더 성실하지 못한 걸까. 왜 더 부지런하게 살지 못하는 걸까. 왜 더 이해가 빠르지 못한 걸까. 나는 쉽사리 자괴감에 빠지고, 거기서 헤어나오는 일이 힘겹다.
몇 년 전 산골 구석에 파묻혀 있는 집을 답답해하는 나에게 엄마는 이런 말씀을 했다.
“너는 운이 좋아. 아직은 아무도 널 평가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여기 숨어서 실력을 기를 수 있잖니?”
그러나 이제는 나 자신이 실망스럽다고 책 속으로 숨을 수도, 집에 틀어박힐 수도 없다. 어떤 날은 엉엉 울면서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어진다.
“저는 더 연습을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빨리 세상에 나오고 싶지는 않았단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배워가고 있다. 봄 날씨가 과하게 따뜻하면 봄이 아니라 애매한 여름이 되어버리듯이, ‘더 빨리’ ‘더 많이’ ‘더 비싸게’ ‘더 잘’ 하는 것이 언제나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내가 편안하고 행복해야 다른 이들도 그런 감정을 전달받지 않을까? ‘과하게 잘하려고 하지 않고 설렁설렁 살아보기, 그렇지만 게을러지지는 않기’는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한 삶의 방식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즐겁게 음식을 먹었다. 별것 아닌 농담에도 웃음이 터지고, 잡채를 장식한 꽃들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이 장식은 참으로 멋있었어.”
“내 평생 밥상에서 이렇게 봄꽃을 많이 받아본 건 처음이여.”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네.”
싱거운 잡채. 국물도 못 우려낸 미역국. 하지만 알록달록 봄꽃들 덕분에 얼렁뚱땅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10대 소녀부터 90살 넘은 할머니까지 여러 세대가 둘러앉은 밥상. 꽃으로 가득 찬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은 흥에 겨워 시를 읽고 이야기를 한다. 봄밤은 흘러가고, 나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잡채를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
• 꽃을 얹은 잡채 만들기 (10인분 기준)
재료: 당면 한 봉지(300그램), 시금치 한손 가득 두 줌, 당근 3개, 계란 5알, 팽이버섯 3봉지, 간장과 들기름. 다양한 봄꽃들.
잡채를 만드는 법은 일반적인 요리법을 따른다. 당면을 물에 불려서 삶는다. 당근은 얇게 채 썰어서 소금으로 간하고 기름에 볶는다. 시금치는 끓는 물에 설탕소금을 넣고 살짝 데쳐서 물을 쪽 빼고, 집간장과 참기름으로 무쳐 놓는다. 계란을 우묵한 볼에다 깨트려 섞어서 지단을 부친다음 손가락 두 마디만한 길이로 썰어 놓는다.
커다란 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삶은 당면과 준비한 재료를 볶듯이 섞다가 불을 끄고 뜨거운 상태에서 다시 버무린다. 잡채를 큰 접시에 놓고 매화, 진달래, 개나리, 목련, 동백꽃, 냉이꽃, 민들레 등의 봄꽃을 따와서 장식한다.
• 떡 미역국 만들기
▲ 질 좋은 생미역을 듬뿍 얻어서 버섯과 떡을 넣어 끊인 떡 미역국. © 여연
재료: 말린 미역이나 생미역, 떡볶이용 떡이나 조랭이떡, 집간장, 들기름 약간, 생 표고버섯과 팽이버섯, 다시마.
말린 미역은 물에 불리고, 생미역을 쓴다면 물에 박박 씻어서 준비한다. 미역을 한 입 크기로 잘라서 들기름에 달달 볶은 다음, 뜨거운 상태에서 다시마 우린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이때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표고버섯도 넣는다. 미역이 부드러워지면 마지막에 팽이버섯과 떡을 넣고 살짝 더 끓인다. 그릇에 담아낸다.
※ 부엌을 빌려주시고 생미역과 양념을 협찬해주신 ‘설아 다원’ 아주머니와 아저씨, 요리하고 치우는 걸 도와준 산들 언니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합니다. (여연)
[원문 보기] http://ildaro.com/sub_read.html?uid=6312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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