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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여연의 공상밥상] 8. 야채 커리 
 
홈스쿨링과 농사일로 십대를 보낸, 채식하는 청년 여연의 특별한 음식이야기. 갓 상경하여 대도시 서울의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스무살 청년의 음식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좌충우돌 실험 속에서 터득한 ‘여연표’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www.ildaro.com
 
인도의 한 불가촉천민 공동체에 머문 한 달
 
8년 전 4월. 엄마와 나와 동생, 이렇게 세 모녀는 얼떨떨하고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인천공항에 떨어졌다. 4개월 만에 돌아온 한국은 참 추웠다. 그동안 우리는 인도, 네팔, 태국과 캄보디아를 돌아다녔지만, 사실 주로 여행했던 곳은 인도였다. 인도에서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주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들과 아쉬람, 티베트 절 등에서 머물렀다. 덕분에 관광지를 방문했던 일보다는 공동체에서 새로운 문화를 맛보기로라도 경험했던 기억이 훨씬 뚜렷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나름대로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여행이었다.
 
여행 중에 우리가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은 라자스탄 주의 반사막에 있는 어느 공동체 마을이었다. 무려 한 달도 넘게 지냈으니, 여행 중에 휙 들른 곳이라기보다는 짧게나마 생활했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땐 어려서 몰랐지만 사실 그곳은 인도 내에서 차별받는 불가촉천민이 생태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독특한 대학이자 공동체였다. 허허벌판에 우물과 펌프, 공동 부엌, 도서관, 의료기관, 학교, 수공예품 작업장, 꼭두각시 인형 작업장,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는 그 공동체에서는 태양광으로 불을 밝히고, 태양열 조리기를 사용해서 둥글납작한 밀가루 빵인 차파티를 구웠다.
 
열두 살이던 나와 여덟 살이던 동생은 이곳저곳 다니면서 프로그램을 구경하곤 했다. 태양열 조리기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꼭두각시 인형을 만드는 작업장에서는 신문지를 물에 불려서 인형 얼굴을 만들었다. 사막 한가운데 덜렁 세워져 있던 허름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우리를 구경하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하지만 그런 흥미로운 행사가 언제나 있는 건 아니라서, 심심함을 떨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시도해보며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온 공동체를 헤집고 뛰어다니면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지치면 몇 시간 동안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둘만의 상상을 펼친다. 인형과 인형 비슷한 물건들을 모두 동원해서, 음모와 암투가 난무하는 연극에 가까운 역할놀이를 하고, 바나나를 먹으면서 껍질로 인형을 만들어서 역시 바나나껍질로 만든 옷을 입히며 논다.
 
때때로 마을에 사는 소녀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한다. 소녀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이는 갈색 피부와 갈색 머리,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갈색 눈망울을 가지고 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무성하게 자란 님(Neem tree, 인도멀구슬나무) 나뭇가지에는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 섞인 화려한 깃털 덕에 마치 인형처럼 보이는 야생 앵무새들이 앉아있고, 이파리에 가려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나운 다람쥐들은 작은 맹수처럼 시끄럽게 소리를 지른다.

▲ 인도여행에서 산 손가락 크기만한 숟가락.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 여연 
 
식사 시간이 되면 먼지투성이가 된 나와 동생은 고픈 배를 안고 공동 식당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흰 쌀밥과 차파티, 병아리콩으로 만든 인도식 스튜인 달, 커리 한 종류, 시금털털한 요구르트가 거의 매 끼니 나오는 음식들이다. 양념 된 요리들에서는 코리앤더라고 부르는 고수풀의 강한 냄새가 진동한다.
 
고수풀 냄새에 적응하지 못한 나와 동생은 밥을 깨작거리기 때문에 늘 간식이 고프다. 엄마는 근처 가게에서 캐쉬넛과 파스타치오, 말린 코코넛 과육을 사다주면서 딸들의 끝없는 허기를 달래주려고 노력한다. 나는 견과류라면 얼마든지 먹을 자신이 있지만 말린 코코넛 과육의 반들거리는 흰 덩어리를 씹으면 입에 기름이 가득 차서 찝찝하고 머리가 아프다.
 
우리는 매일 오후 차 마시는 시간을 밥 먹는 시간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염소젖과 설탕을 듬뿍 넣은 뜨거운 짜이를 간식 대신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신선한 염소젖은 짜이에 넣지 않고 그대로 마시기도 한다. 양철 컵으로 새하얀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켜면 코로는 훅하고 비린내가 들어오지만, 맛은 진하고 달짝지근하다. 토요일 아침에는 특별음식으로 으깬 감자를 넣은 일종의 인도식 채소 빵이 나온다.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이 빵에도 고수 씨앗이 통째로 뿌려져 있다.
 
해 질 녘에는 엄마가 종종 우릴 데리고 마을 바깥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간다. 산이라기보단 앉아있기 좋은 모양새의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커다란 바위언덕이다. 나와 동생은 신이 나서 각자 바위집을 정하고, 돌가루로 음식을 만들며 소꿉놀이를 한다. 그동안 엄마는 노을이 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동그란 자두처럼 불그스레한 저녁 무렵의 태양은 손톱만큼씩 움직여서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는다. 먼지투성이 반사막에 드문드문 흩어진 바위언덕, 척박한 땅에서 메마르게 자라난 가시나무들. 그 사이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염소들. 그리고 재잘거리며 염소를 따라가는 강하고 거친 소녀들. 잠깐 동안 마법처럼 모든 게 단번에 진분홍빛으로 물든다. 하루에 단 몇 분밖에 없는 찰나의 순간이 방금 지나갔다. 우리는 바위산에서 내려와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준 야채 커리
 
모든 게 벌써 8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인도 여행을 다녀온 뒤에 우리 가족은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점점 더 깊숙한 산골로 들어갔고, 나와 동생은 학교에 가지 않고 엄마와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고수풀 냄새를 맡으면 그때 그 반사막의 척박한 바위산이 떠오른다. 하지만 십대를 보내는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절대 잊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여행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정말 맛있는 커리를 맛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주말마다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어느 날 점심에 빵집에서 일하는 요리사가 직원들을 위해 커리를 만들었다. 인도식도, 한국식도 아닌, 커리와 카레의 중간 정도에 있을 법한 커-레였다(이 말은 내가 방금 만들어냈다). 황금빛이 도는 색깔에, 따끈하고 걸쭉하고 놀라울 만큼 조화로운 맛이다. 감탄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만들었느냐고 묻자 요리사는 몇 가지 팁을 알려주었다. 향신료와 밀가루를 적절하게 섞어서 사용하고, 채소는 타기 직전까지 센 불에 볶아라. 그리고는 농담처럼, 진짜 비법은 비밀이기 때문에 말해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저녁이 돼서 아르바이트가 끝났을 때, 몸은 피곤하지만 머리에서는 커리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요리사의 커-레 덕분에 예전에 인도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쌀가루를 발효시켜서 찐 부드러운 이들리, 바삭한 과자 같은 팬케이크에 양념한 채소를 넣어 돌돌 말아내는 커다란 도사, 향신료를 듬뿍 넣은 으깬 감자와 완두콩이 들어있는 세모난 튀김만두 사모사,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서 먹었던 기름과 소스에 버무려 톡 쏘는 맛이 나던 레몬장아찌, 과일과 함께 시원하게 갈아낸 인도식 요구르트 라씨. 그리고 온갖 맛이 나는 커리!
 
결국, 밤늦게 문 닫기 직전인 시장에서 채소들을 사왔다. 브로콜리, 파프리카, 양배추, 단호박, 레몬 그리고 지금 한창 제철인 마늘종을 마늘 대신으로 구하고, 곁들여 먹을 차파티를 만들기 위해서 밀가루도 사왔다. 예전에 먹었던 것만큼 상큼하고 강렬한 맛을 내는 걸 목표로 커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마침 아시안 마켓에서 사놓았던 커리가루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강황으로만 된 가루가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는 향신료 배합이 끝난 상태의 커리라서 내가 가진 매운 후추와 바질을 조금만 더 넣으면 될 것 같다.
 
커리 만들기에 '정석'은 없다
 
카레가루와 밀가루를 섞어서 기름에 볶다가 코코넛밀크 대신 두유를 넣어서 끓여 소스를 만들고, 야채를 거칠게 갈아서 센 불에서 볶다가 소스와 섞었다. 내가 도대체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워서 종종 손을 멈췄다. 하지만 커리는 인도의 된장찌개나 마찬가지이다.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데는 정석이 없다. 누구는 된장을 살짝만 끓여야 한다고 말하고, 누구는 오래 끓일수록 구수해진다고 말한다. 커리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에 일단 내 손과 혀, 그리고 기억 속에 있는 맛을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기름과 향신료, 후추, 갖가지 채소와 과일이 뒤죽박죽 섞인 커리는 온갖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이고 복잡한 음식이란 생각을 했다. 마치 세상을 한 수저 떠서 꿀꺽 삼키는 것 같은 맛이 난다.
 
세상은 가끔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20대에게는 지나치리만큼 복잡하게 느껴진다. 때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 수가 없어지고, 심지어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과거에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고 기록되었는지 더 많이 배우면 언젠가는 마구 엉킨 매듭이 스르르 풀리는 날이 오려나? 산다는 건 도대체 뭘까? 뭔가 꼭 이루어야 하는 일이 있기나 할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밀가루를 물에 개어서 차파티 반죽을 만들었다. 반죽을 열심히 치대서 쫀득해지라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뭉근한 불에서 익어가는 커리에 레몬즙을 짜 넣자 마침내 만족스러울 만큼 강렬하고 상큼한 맛이 나기 시작했다. 완성된 커리를 맛보자 마음이 안정된다. 급하게 결론지을 수 없는 수많은 고민은 시간이 답을 내려주겠지. 답 같은 게 원래 없다면 적어도 잊어버리게는 해 주지 않을까.

 • 더듬더듬 헤매면서 만든 커리

▲ 인도에서 먹었던 맛을 떠올려 만든 커리와 차파티. 강황으로 물들인 밥을 곁들였다.  ©여연  
 
[커리 베이스 만들기] 
-재료: 밀가루와 커리가루(4:3 정도의 비율로), 표고버섯가루(없으면 빼도 된다), 매운 후추, 집에 있는 향신료들 중 마음에 드는 것, 1000ML짜리 두유 한 팩, 식용유.
 
밀가루와 커리가루, 표고버섯가루를 섞어서 체에 한 번 내린다. 팬에 기름을 약간만 둘러 뜨거워지면, 가루를 넣어서 타지 않도록 잘 저어주면서 볶는다. 갈색이 돌게 적당히 볶아지면 뜨거운 상태에서 두유와 물을 붓는다. 매운 후추와 다른 향신료들도 이때 넣는다. 약간 묽은 소스처럼 되면 불을 끈다. 
 
[커리 만들기] 
-커리에 들어가는 채소들: 양배추 반 통, 브로콜리 1개, 파프리카 2개(빨간색과 노란색), 마늘종 한 묶음(500g), 단호박 2/3통, 레몬 1개.
 
양배추, 마늘종, 파프리카를 잘게 다지거나 거칠게 갈아놓는다. 브로콜리와 단호박은 살짝 삶아서 앞의 채소들과 똑같이 한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단호박-브로콜리-파프리카-양배추-마늘종 순서로 강한 불에 볶는다. 타기 직전까지 노릇하게 볶아지면 준비해놓은 커리베이스를 부어서 끓이기 시작한다. 불을 약하게 줄이고 재료가 어우러지도록 오래오래 끓인다. 맛을 봐가면서 두유를 더 넣거나, 커리가루와 다른 향신료를 더 넣는다. 마지막에 레몬즙을 짜 넣는다.  

 • 차파티 만들기 
-재료: 중력분 밀가루, 따뜻한 물, 소금.
 
따뜻한 물에 소금을 풀어서 수제비를 만들 때처럼 밀가루를 반죽한다. 열심히 치댈수록 단백질의 일종인 글루텐이 많이 형성되어 쫀득쫀득해진다. 반죽이 끝나면 냉장고에서 하루 이상 숙성한다. 직화로 굽거나,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재빨리 뒤집어가면서 굽는다. 잘 반죽이 된 차파티는 구울 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 강황밥 만들기(4~5인 기준) 
-재료: 하얀 쌀, 커리가루, 물.
 
물을 평소보다 약간 덜 넣어서 밥을 안친다. 커리가루 1스푼을 밥물에 잘 풀어서 꼬들꼬들하게 밥을 짓는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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