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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아프리카 로드트립> 23. 남아프리카공화국⑧
[애비(Abby)와 장(Jang)은 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 서른되던 해 여름 함께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합니다. www.ildaro.com]
프레토리아의 나미비아 대사관, 너무하는 거 아니야?!
-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린 육로로 보츠와나로 넘어갈 거예요. 남아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요. 당신네 나라에서 보츠와나로 가는 버스는 예약도 티켓도 없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감옥 면회 창구처럼 생긴 접수구 너머의 남자는 우리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당장 한국 계좌의 잔고를 증명할 수 있는 영문 증서를 제시하거나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오는 교통편 티켓을 내놓아야만 우리 여권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이곳은 프레토리아에 위치한 나미비아 대사관, 이것으로 세 번째 방문이다.
첫 번째 방문에선 미리 전화로 확인한 비자 업무 시간을 잘못 알려 준 안내 직원의 실수로 아예 허탕을 쳤다. 항의했으나 물론 누구도 나 몰라라 했다. 두 번째 방문해 비자를 신청하며, ‘찾을 때 필요한 서류’에 대해 거듭 물었다. 나미비아 대사관에서 외국인들에게 괜한 까탈을 부린다는 소리를 들은 터였다. 우리가 육로로 국경을 이동할 거라 나미비아로부터 나가는 교통편을 입증할 자료가 없을 텐데 괜찮은지 자꾸 묻자, 담당자는 귀찮은 듯 비자 비용을 지불했다는 입금증명서만 있으면 된다고 손을 저었다. 비자 삯도 비자 사무실에서 직접 받지 않고 시내의 특정 은행에서만 대행하는 몹시 번거로운 시스템이었다.
오늘의 세 번째 방문, 여권을 내 주기만 하면 끝나는 이 시점에서 대사관 직원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전에 했던 말을 들먹여도 소용이 없다. 뒤에 상관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더욱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걸 어필하고 싶은 눈치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같은 사람이 어제와 오늘 전혀 다른 소리하는 걸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면서 방심한 우리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유럽 같은 편의 시설을 갖춘 프레토리아에서 지내며 이곳의 행정 서비스도 그러리라고 착각했던 걸까.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고 진에게 부탁해 시내의 PC방을 찾아 헤맸다.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구획 지어진 프레토리아의 도심은 일방통행이 많아 한 번 길을 놓치면 먼 길을 돌아야 했다. 한참을 살핀 끝에야 한 PC 방을 찾아 서둘러 적절한 날짜의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다행히 몇몇 항공사는 항공편을 예약하면 스케줄과 행선지, 탑승자 정보와 예약 번호가 적힌 예비 티켓을 결제 없이도 출력할 수 있었다. 예약 정보를 저장해 두고 일정 기간 안에 결제해서 예약을 확정하거나 취소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하늘마저 우리를 돕지 않는다. 대사관에 다시 도착하자 처음 우리를 상대했던 녀석은 아예 뒤로 빠지고 그 보스가 나섰다. 몇 시간 사이에 우리가 얼마나 시내를 헤맸을지 알면서도 그는 작정하고 우리를 골탕 먹이기로 한 듯 했다. 우리가 내민 예비 티켓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친히 수화기를 들고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참 통화를 하더니 창구 밖으로 출력물을 확 던졌다.
결제 안 된 티켓이군요. 티켓을 사 오란 말이에요. 일정을 확정해 오란 말입니다.
이봐요. 지금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알면서 당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잖아요.
솔직히 증명이 왜 필요한가요, 당신네 나라에서 우리가 비자보다 길게 불법 체류할 이유가 전혀 없죠, 하고 인신공격하고 싶은 야비한 마음을 꾹꾹 참았다. 그리곤 다시, 같은 언쟁의 반복이었다. 이 방법이 싫다면 당신의 계좌 잔고를 증명할 문서를 가져 오라. 아, 외국 은행 계좌도 안 된다 남아공 계좌여야만 한다. 아니면 남아공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로 보증인을 세워 오라.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장과 내가 말도 안 되는 처사라며 거세게 항의하자 그는 급기야 우리 눈앞에서 드르륵, 창구의 블라인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 야!!!
참지 못한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악을 썼는지 내 귀가 다 따끔하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당신 뭐야? 왜 이렇게 무례한 거야? 대체 당신들 여기서 하는 일이 뭐야! 나는 남아공 사람도 나미비아 사람도 아니야, 무슨 권리로 우리한테 이러는 거야? 성질을 못 이기고 한국말로 버럭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로써 이 기싸움에서 내가 완벽히 지고 말았다는 것을.
내려가던 블라인드가 득득 바쁘게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비열한 미소를 띤 남자의 얼굴이 다시 등장했다. 너 딱 잘 걸렸다, 하는 하이에나 같은 눈빛을 한 그가, 한 손에 내 여권을 들고 내게 삿대질을 했다. 다시 한 번 소리 질러 봐. 내 여권이 당신한테 있어. 이 스탬프 보여? 내가 이거 찍으면 당신 나미비아 못 가. 당신이 제출한 서류, 내가 찢어버리면 그만이야. 당신 같은 사람은 나미비아 들어올 자격이 없어.
-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겁니까?
장이 정색을 하고 묻자 그가 멈칫했다. 평소라면 파르륵 하는 내 편을 조금도 들지 않는 사람이라 저래서 ‘남편’인가 싶었던 남편이 처음으로 역성을 들었는데, 기가 살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번쩍 났다. 지금 다툼을 키워 우리가 얻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장의 팔을 꾹 잡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남자에게 사과를 했다. 소리쳐서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들의 처사는 합리적이지 않다. 당신들이 여권을 돌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그는 파리를 쫓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여행은 우리에게 ‘유연함’을 훈련시킨다
▲ 나미비아 관리의 횡포로 해질녘이 되어서야 시내를 빠져나왔다 © Abby
기운이 쫙 빠져 차로 돌아왔다. 한두 시간이면 될 줄 알았던 개인적인 일로 바쁜 진의 시간을 한나절이나 빼앗은 셈이 됐다. 미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우리를 대신해서 화를 내 주는 통에 도리어 위로를 받았다. 생각 같아서는 성질대로 스탬프 찍어라! 당신들 나라 따위 여행 안 해! 시원하게 질러 주고 자세한 투서를 넣어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의 격정을 이기지 못해 여행을 망친 기억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우리와 얼마간이라도 함께 여행하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이 먼 곳까지 친구 윤이 날아오는 중이었다.
- 그것 봐, 내가 뭐랬니. 그러니까 나미비아 여행 자알 하고, 돌아와. 돌아와야 한다는 뜻이야.
센터로 돌아와 이 사태를 이야기하니, 은근히 반기시는 것은 '눈'이었다. 마침 일주일에 한 번씩 몇 명의 한국인 활동가와 교민들이 저녁 모임을 갖고 식사를 함께 하는 날이었다. 저녁 자리에서도 단연 화제는 아프리카의 각종 관리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짐바브웨로부터 남아공에 들어올 때에도 자국에 들어오려는 짐바브웨인들을 대하는 삼엄한 남아공 관리들의 태도에 불편함을 느꼈었다. 우리가 지나온 어떤 나라는 국경에서 독특하게 ‘영국인’만 걸러내 비자 비용을 두 배로 받기도 했다. 옛 식민 지배에 대한 일종의 보복 심리였던 걸까?
그러나 역시 불합리와 불쾌함의 최고봉은 나미비아 관리들이라는 데 입을 모았다. 오래 머물다 보면 한두 번은 인근 나라에 다녀 올 일이 생기기 마련, 식탁에 모인 교민들 대부분 비슷한 일을 겪은 터라 대사관에서 어떻게 불합리하게 굴었는지 굳이 우리가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와 한바탕 일을 치른 관리 두 사람의 인상착의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케이프타운의 비자 발급 사무소는 워낙 관광지 안에 있어 그 불친절이 덜하다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 에이, 나미비아 욕할 것도 없어.
누군가 불똥을 한국 영사관으로 옮겼다. 하긴, 우리 역시 여행의 중간에 몇 차례 들른 우리나라의 영사관 직원들로부터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영사관을 찾을 때는 언제나 크고 작은 도움이 필요해서였지만, 고압적인 태도의 직원들은 기꺼이 도움을 주려하기보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적게 일을 하려고 했다. 결정적인 문제가 생기면 기꺼이 손을 보태주기보단 서둘러 발을 뺄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지 장과 마주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윤과 함께 나미비아를 여행한 후 마지막으로 보츠와나를 들러 아프리카를 빠져나가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앞선 계획은 프레토리아에서가 아닌 서아프리카에서의 자원 활동이었지만, 무시무시한 비행기 삯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계획하지만, 인생에서 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되는 걸까? 특히나 아프리카에선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야 매일 졸도할 지경, 상황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대안을 찾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다.
- 눈의 말씀대로, 돌아오는 게 어쩌면 우리를 위해서도 이 분들을 위해서도 좋을지도 몰라.
끝내 장이 말했다. 사실 지난 보름은 기대만큼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쉽지 않은 날들이라 아쉬움이 있었다. 매 끼니 잘 차리고 치우는 센터의 부엌일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일과의 많은 시간을 책상에서 보내는 과제를 맡은 때문이었다. 만약 돌아올 경우 할 일이 많기도 했다. '진'은 방과후학교 아이들의 연간 성장 보고 자료와 분기 재정 보고 자료 작성을 앞두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 년간 단 둘이 함께 지내며 쌓여 온 '진'과 '눈' 사이의 갈등은 폭발 직전이었는데, 오랜만의 젊은 방문자들은 그 틈의 윤활유가 되었다. 조금 더 머문다면 여러 모로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라면 아마 다시는 기회가 없을 아름다운 나라 보츠와나를 이대로 포기해도 좋은가?
오빠 언니, 저희들 같이 가고 싶어요. 네? 괜찮죠?
결정을 못하고 이 쪽 저 쪽으로 기울던 시소를 쿡 누르는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의 민이었다. 그 동안 프레토리아에만 머물던 '민'과 '안'이 나미비아 여행을 함께 하고 싶다는 눈치를 몇 차례 보이던 차였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지내는 '연' 감독님 부부는 친구의 딸인 '민'을 그 험한(?)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민'과 '안'이 함께 졸라서 마지막 순간에 허락을 얻어낸 모양이었다. 다만, 장과 애비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여행하다가 프레토리아로 함께 돌아온다는 조건 하에.
▲ 삼고초려, 점입가경, 우여곡절 끝에 받은 나미비아 비자 © Abby
우습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상황을 순순히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 이번엔 돌아오는 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인가보다.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 대해, 아프리카에 대해 좀 더 배울 것을 기대해야겠다. 하여 셋이 하기로 했던 여행은 다섯이 되었고, 보츠와나로 넘어가기로 했던 일정은 다시 프레토리아로의 선회가 되었다. 여행은 마지막까지 우리로 하여금 유연함을 훈련시키려는 것일까.
다시는 안 보고 싶군요. 당신들 때문에 무척 번거로웠어요. 내 일을 방해했다고요.
확정된 비행기 티켓을 갖고도 이리저리 꼼꼼히 시빗거리를 살피며 오래도록 항공사와 통화를 한 나미비아 관리가 마지못해 창구 밖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그리고 우리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굳이 안 해도 좋은 독설을 뱉었다.
정말? 그럴 리가, 당신이 우리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요.
발 빠른 내가 대꾸하기도 전에 장이 여권을 탁, 낚아채며 말했다. 그가 다시 한 번 욱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어쩌랴, 여권은 이미 우리 손에 있는 것을. 속이 다 시원했다.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흔들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케이프타운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친구 윤에게로 간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을 가진 나미비아에서, 우리는 함께 어떤 시간을 만나게 될까. (Ab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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