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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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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로드트립> 21. 남아프리카공화국⑥   

[애비(Abby)와 장(Jang)은 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 서른되던 해 여름 함께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합니다. www.ildaro.com]

 
남아공 북쪽의 행정 수도 프레토리아(Pretoria)에 머무는 중이다. 오늘은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학교에 다녀왔다. 활동가들의 센터로부터 한 시간쯤 떨어진 빈민촌에서 일주일에 나흘씩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흙먼지 나는 길을 한참 달려 허허 벌판에 놓인 어느 교회 앞에 차가 섰다. ‘교회’라고는 하지만 누가 말하지 않으면 그저 창고라고 여길만한, 함석으로 얼기설기 벽을 세우고 지붕을 이은 커다란 깡통집이다. 

▲ 조금만 시내를 벗어나면 어디에나 끝없이 펼쳐지는 빈민촌     © Abby  

프레토리아 빈민촌 방과후학교의 아이들
 
하나둘 모여든 아이들이 제법 많아 백 명쯤 되어 보였다. 현지인 진행요원들이 망아지처럼 신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큰 소리로 불러 모아 앉힌 후, 몇 가지 노래를 함께 부르고 오늘의 활동을 설명했다. 디렉터인 ‘진’의 지시에 따라 장과 나, 신 작가님, 우리와 같은 자원활동가인 ‘민’, ‘안’이 각각 그룹을 맡기 위해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팀별로 이백 조각짜리 ‘직소 퍼즐’을 맞추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울 리 없다. 만 세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골고루 모여 앉은 아이들이 다 같이 한 퍼즐에 집중하길 바라는 건 지나친 기대이리라. 어떤 아이는 예쁜 색의 조각을 모으고, 어떤 아이는 다 맞춘 퍼즐을 흩뜨리고, 어떤 아이는 박스를 껴안고 완성된 그림을 감상했다. 시작부터 나를 의자 삼아 턱 자리를 잡고 앉은 네 살 꼬마는 어느새 자세를 고쳐 안겨 눕더니 깊이 잠이 들었다. 바람이 통하지 않고 열은 흡수하는 찜통 같은 깡통집에서, 아이가 흥건하게 흘린 땀에 나도 흠뻑 젖어 버렸다. 

▲ 아이들이 가장 반기는 간식, 잼을 바른 식빵 샌드위치와 묽은 주스 한 국자   ©Abby  
 
꽤 시간이 흘렀으나 결국 한 팀도 채 마치지 못한 채 아이들이 가장 열광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이 방과후교실이 유지되는 가장 큰 동력일지도 모를, 간식 시간이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지금 먹는 음식이 종일의 유일한 끼니이기도 하다고, 매년 이 곳을 찾는 신 작가가 귀띔해 주었다. 간식은 땅콩버터와 과일 잼을 한 면씩 발라 붙인 세 쪽짜리 식빵 샌드위치와, 농축액에 물을 타 희석한 주스 한 컵씩이다.
 
타고난 기질이 자유분방하기 때문인지 질서를 배운 일 없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줄 서서 기다리는 걸 몹시 힘들어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스태프들은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 틈에, 약삭빠른 아이들이 더딘 아이들 틈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아이들을 줄 세웠다.

가장 큰 아이들은 선생님을 도와 간식을 나눠 주었다. ‘리더십 코스’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교육을 더 받는 그 십대 소년소녀들은 능숙하고 의젓하게 동생들을 먼저 챙기고, 끝나면 매일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것까지 끝낸다고 했다. 그들의 차분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곧 빵으로 가득 찼던 박스가 비고, 드럼통의 주스도 바닥을 보였다.
 
먹을 것을 손에 넣은 아이들은 피어난 꽃처럼 함박웃음을 머금고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개중에도 차이는 있어, 어떤 아이들은 빵 받아들기가 무섭게 절반을 베어 물고 씨익 웃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제 등에 업힌 두세 살짜리 동생의 입에 연신 제 몫을 떼어 먹여 주었다.

그런가 하면 따로 봉지를 받아 넣은 빵은 소중히 손에 든 채 주스만 꼴깍꼴깍 마시며 다른 아이들이 빵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집에 가서 가족과 나누어 먹으려는 생각이리라. 그 모습이 찡하게 마음에 박혔다.
 
빵 한 조각이 소중한 아이들의 마을 너머에는…

 
돌아오는 길의 풍경은 방금 우리가 빠져나온 마을과는 다른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놓았다. 잘 포장된 길은 널찍하고, 하늘은 높고 푸르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대형 쇼핑 콤플렉스엔 ‘울월스’, ‘페이앤고’ 같은 글로벌 마켓 체인점을 비롯해 다양한 분위기의 카페, 레스토랑, 의류점, 애완용품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마치 볕 좋은 날의 미국이나 호주 어느 도시 외곽을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착각 속에서 남아공의 현실로 우리를 데려온 것은 교차로마다 한두 명씩 선 흑인 남자들이었다. 텅 빈 표정을 한 그들은 위험천만하게 신호 사이를 오가며 가만히 승용차 앞에 서 운전자를 응시했다. 그의 가슴에 덩그라니 매달린 팻말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살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하고, 하고픈 말을 대신했다. 그 모습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자 운전하던 ‘진’이 기겁을 하며 만류했다.
 
- 큰일 나요. 잠깐 신호에 선 동안에도 유리창을 깨고 달려들 수 있거든. 여기선 무조건 조심해야 해요.  

▲ 남아공의 행정 수도, 북쪽의 프레토리아(Pretoria) 전경  
 
해가 뉘엿뉘엿 지는 늦은 오후, 센터에 돌아왔다. 프레토리아 외곽에 있는 활동가들의 센터는 연못을 갖춘 커다란 정원에 본채와 별채를 갖춘 큰 저택이었다. 고급 한정식집과 게스트 하우스를 겸하던 저택을 교포 중의 한 재력가가 인수하여 이 NGO에게 임대 중이라고 했다.
 
늘 상주하며 건물을 돌보는 것은 방과후학교 디렉터인 중년의 싱글 여인 ‘진’과 일흔 나이에 은퇴 후 활동가로 이곳에 자리 잡은 ‘눈’ 등 두 분이었다. 그러나 욕실이 딸린 몇 개의 방이 있어 우리 같은 게스트가 묵기도 하고, 한국인 활동가들이 정기적인 회합을 갖기도 하는 등 드나드는 손님이 무척이나 많은 공간이었다. 현재는 우리 두 사람과 사진작가 ‘신’, 미국에서 이주해 남쪽의 케이프타운 근방에서 활동한 지 몇 달째인 연로한 두 부부 활동가 ‘안’과 ‘정’등 일곱 사람이 묵고 있었다.
 
프레토리아와 조벅 등 남아공 북부에는 예상보다 꽤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센터를 거점으로, 몇 사람의 한국인 활동가들이 팀을 이루어 이 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지역 소년 리그를 결성하는 데 힘을 쏟기도 하고, 학교와 교회를 짓기도 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청년들, 에이즈를 앓고 있거나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머무는 <에이즈 센터>에 정기적으로 방문해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장과 내가 자원활동가로 이곳에 도착한 지 나흘째, 아직은 특정한 활동 없이 이 곳 저 곳 현장에 따라다니며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듣는 중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린 후, 모두 모여 오늘의 일과를 이야기했다. 테이블에 차를 올려놓는 장에게 ‘안’과 ‘정’ 부부가 인사를 건네셨다.
 
     아, 고마워요 장.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서빙해 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러니까 말이야. 한국 젊은이들이랑 있어야 이렇게 섬김을 받는데... 우리 센터에선 외국 젊은 친구들이랑 지내잖아. 양보가 없어. 어른 대할 줄을 모르고, 개인주의적이야. 그게 적응이 힘들더라고.
 
그러셨어요, 하고 답하던 장이 슬쩍 내 얼굴을 살폈다. 여기 닷새를 머무실 예정이라는 이 어르신들의 식사가 점점 스트레스라고, 간밤에 내가 불평을 한 터였다. 센터의 디렉터인 ‘눈’과 그녀의 선배 부부인 ‘안’과 ‘정’, 평균 연령 칠십이 넘는 이 세 노인은 몹시 까다로워, 매 끼니마다 새로운 요리를 해 내야 했다. 아프리카이고 매일 정신없이 일과가 진행되는 활동가들의 현장이지만, 평생의 생활수준과 습관을 바꾸기엔 너무 연세를 드신 탓이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오롯이 함께 사는 젊은이들에게 전가되었다.
 
덕분에 우리도 잘 먹는다는 감사는커녕, 먹고 치우는 데 이 아까운 시간을 지나치게 할애하고 있다는 압박감이 더 컸다. 오늘 같은 날은 비닐봉지에 잼 샌드위치와 먹고픈 마음을 함께 담아 꾹 쥐고 집으로 향하던 아이들의 뒷모습이 떠올라 입이 더욱 깔깔했다.
 
이들은 흑백 간 ‘평화의 다리’가 될 수 있을까

 
게다가 이 분들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1950~1960년대에 대학을 나와 각각 미국과 캐나다 주류 사회에 들기 위해 무던히 애쓰며 살아 온 북미의 검은 머리 시민권자 노인들은, 때로 한국의 같은 세대 어른들보다 더 보수적이고 고집스럽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본인들은 스스로가 합리적이고 깨어 있다 여기지만, 폐쇄적인 교민 사회의 문법은 그 세대가 떠난 시점의 한국 사회에 멈추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틈날 때마다 젊은이들인 우리와 몹시 대화하고 싶어 하셨는데, 그건 이만치 살고 나니 해 주고 싶은 충고가 많아서라고 하셨다.
 
세 분 모두 이 땅에서 한인들의 역할을 ‘흑인과 백인 사이의 평화의 다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인 지역에 살며 백인 교회에 출석하고 백인 친구들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반면 흑인 친구는 ‘만날 기회가 없다’고 얘기했다. 흑인을 위해 종일 일하지만 흑인 친구를 사귈 기회는 없고, 흑인을 사랑하지만 그들과 자신이 본질적으로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 보인다.
 
결국, 우리가 택한 이 분들과의 대화법은 ‘입은 다물고 고개는 끄덕이는’ 것이었다.
 
     참, 눈, 에이즈 센터에서 말이야. 여자 아이들에게 화장하고 네일 아트를 가르치는 건 어떻게 생각해냈어요?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라구. 얼마나 예민할 나이야.
     네, 여기 소녀들한테는 그럴 필요가 있어요. 워낙 성범죄도 많고, 어릴 때부터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꾸미는 법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 알려 주고, 그러다 보면 자기 존중감도 생기고 스스로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렇구먼. 아이들을 보면 마음에 그렇게 긍휼한 생각이 드는 거야. 오늘 우리는 교도소 사역하는 데 갔었는데, 거기서도 내내 심정이 그렇더라고.
     그런데 그 수감자 청년들 중에 백인 아이도 하나 있길래 깜짝 놀랐어. 그 아이는 아마 정신적으로 문제 가 있는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구먼.
     그렇지... 정신이 이상하지 않고서야 백인 아이가 그런 데 가 있을 리가 없지. 

▲ 방과후학교에서 간식을 받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선 가장 어린 아이들   © Abby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렇게 뜨악해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나오곤 했다. 우리가 신경이 쓰이셨는지 세 분은 곧 ‘백인 뿐 아니라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 교육도 잘 받은 아이들이 교도소에 갈 리가 없다는 뜻’이라고 부연하셨지만, 충분한 해명이 될 리 없었다. 그 분들의 특수한 삶의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장과 나는 몇 일간 함께 살고 대화하는 중에 드러나는 그 분들의 생각과 삶 사이의 인지부조화를 점점 크게 느끼고 있었다.
 
가장 큰 부대낌은 센터의 흑인들을 대하는 디렉터 ‘눈’의 모습에서 왔다. 가사일을 돕는 프롤렌스와 별채 공사를 진행 중인 대여섯 명의 인부가 모두 짐바브웨로부터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눈’은 누군가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불호령을 내렸다. 흑인들은 그렇게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일자리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므로, 그들의 수고에 대해 ‘고맙다’고 얘기하는 일도 없었다. 가끔은 꽤 오래된 냉동실의 음식들을 선심 쓰듯 내놓기도 했다. 함께 일하려는 우리에게는 ‘자꾸 도와줘 버릇하지 말라’는 엄명이 내렸다. 때로 나는, 백 년 전 이 곳에서 노예를 부리던 백인 여주인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상상하곤 했다.
 
이런 곳에서 앎과 삶을 일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를 대상으로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은 과연 진정한 의미의 ‘위함’이 될 수 있을까? 무의식중의 눈빛과 몸짓은 의식적으로 말하는 대사와 잘 짜인 프로그램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법인데. 문득, 에이즈 센터와 교도소의 청년들, 방과후학교의 아이들은 한국의 활동가들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가장 자주 듣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센터의 대문 앞에는 송아지만한 도사견 테사와, 아직 강아지인 (그러나 진돗개보다 큰) 도베르만 두 마리가 늘 사람보다 미덥게 집을 지키고 있었다. ‘눈’은 집을 나설 때면 테사를 데리고 나가라고 신신당부하시곤 했다. 늦은 저녁, 테사를 데리고 나선 산책길에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훈련을 지나치게 잘 받은 명민한 테사는, 거리에 흑인만 나타나면 무섭게 짖으며 달려들었다. 여유로운 밤 산책은커녕 때마다 그 민망함을 참고 테사를 제압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나 흑인들은 하나같이, 익숙한 몸짓으로 개를 피해 에둘러 가던 길을 재촉했다. 백인들이 키우는 개에게 받는 공격이 대수롭지 않은 일상인 흑인들에게, 21세기는 지난 세기보다 얼마나 나은 세상일까. 울컥, 답답함이 솟구쳐 애꿎은 테사를 무섭게 야단쳤다. (Abby)

   * 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는 독자들의 응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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