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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아프리카 로드트립> 20. 스무살이 돌아가던 날 
 
[애비(Abby)와 장(Jang)은 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 서른되던 해 여름 함께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합니다. www.ildaro.com]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사촌동생에게 쓰는 편지

▲ 희망봉 트레킹 중 장과 사촌동생 '스무살'. 스무살은 희망봉 트레킹을 마지막으로 45일간의 배낭여행을 마치고 우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 Abby 
 
"... 너는 달라달라 속에서도 갓난아이를 젖먹이는 엄마를 보았어. 닭장처럼 꼭꼭 들어찬 그 트럭의 뒤편에서 그녀와 어깨를 꼭 붙인 채 흙먼지 날리는 길을 달렸지. 해질녘 자욱하게 먼지 일으키며 염소 떼와 집으로 돌아오는 마사이 아이들 옆에도 서 보았어. 그네들과 함께 짜이를 마시고 소똥집에서 잠을 잤어. 이전에도 너는 아프리카에 대해, 마사이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지금, 네 앎은 좀 달라졌을까?
 
... 너는 이제 네가 알던 그 모든 답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야 해. 당연한 모든 것을 지우고, 많이 질문하고, 많이 넘어져라.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막막하고 캄캄한 두려움이 엄습할 거야. 그러나 우직하게 자신을 던져 부딪치다 보면 어느 순간 껍질에 균열이 일어나고, 미세한 그 틈 사이로 비로소 너만의 이야기가 아주 조금씩, 고이기 시작할 거야. 그래야 껍질만을 핥는 삶 대신, 남들의 대본을 반복하지 않는 너만의 삶을 살 수 있어.
 
... 희망봉 트레일에서 수없이 넘었던 산들을 기억해. 저걸 어떻게 넘나 싶지만 '결국 넘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게 '얼마나 힘든지'를, 이제 너는 동시에 알지. 그러니 산 앞에서 발을 딛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너처럼 산을 넘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할 수 있을 거야. ..."
 
스무살이 돌아가던 날, 누나는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 깨 길고 긴 편지를 썼다. 언젠가 형과 '지금 우리가 멀리 보아야 할 것'을 이야기하던 중 ‘스무살 인생에서 이 여행의 의미'를 꼽았었다. 그의 생애 첫 45일간의 배낭여행이 끝났다.
 
회상 하나, 낯선 여행의 쓴 맛
 
누나는 말했었다. 형 누나가 너와 함께 다녀줄 수는 있어. 그렇지만 거기까지가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전부야. 네 여행은 결국 네 것이야. 네게 달렸어. 그러면서도 누나는 스무살을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더 놓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한, 아쉬움이 가득한 여행이었다. 무엇이 남았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 분명해. 적어도 잔지바의 여행자 중에 달라달라 타고 다니는 건 우리밖에 없어.
 
탄자니아 잔지바에서였다. 용달차를 개조해 만든 교통수단 달라달라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던 어느 밤에 스무살이 말했다. 글쎄다, 하는 시큰둥한 답이 돌아왔다. 배낭여행자라고 해도 달라달라는 안 타, 이건 우리가 배낭여행 중에서도 제일 돈 없이 구질구질하게 다닌다는 증거야. 계속 투덜댔다. 내가 아프리카 사람이야? 투덜대면서도 스무살은 알고 있었다. 누나가 그런 투정을 받아주고 달래주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너,
 
아니나 다를까, 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잘 먹고 편히 자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돈이 없는 건 맞지, 그런데 돈이 있어도 우리는 달라달라를 탔을 거야. 여기 사람들 모두 달라달라 타고 다니면서 생활해.
 
반항했다.
 
     그니까, 얘네는 맨날 타고 다니는 거잖아 우리랑 똑같아?
 
반항의 대가는 폭력(!)이었다. 누나가 기분 나쁘게 뒤통수를 쥐어박으며 소리쳤다. 이게 아무나 발밑으로 보고 얘네 쟤네야, 이 사람들 중에 너보다 어린 사람도 없는데!
 
아, 아프리카는 힘든 곳이었다. 어딜 가나 “얘네들 왜 이래?” 하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왔다. 양계장 닭처럼 사람을 채우고서야 출발한 버스 기사는 시간 개념 탑재가 안 되어 있는 인간들이라, 주유소만 들렀다 하면 다른 기사들과 세월아 네월아 노닥거렸다. 그리고 주유 중엔 기름이 잘 들어가도록 차를 기울여 꿀럭꿀럭 흔들어대는 통에 차가 뒤집혀 폭발하지나 않을까 늘 가슴을 졸였다.
 
형 누나도 문제였다. 사파리 중에 가이드가 제안한 마사이 마을 투어를 거절한다 싶더니, 다음 날 진짜 쌩 마사이 마을로 들어갔다. 전기도 물도 화장실도 없고 오로지 벼룩과 가축만 득실대던 그 곳에서의 하룻밤은 '여행의 위기'였다. 포경 수술을 하고도 믿을 수 없이 멀쩡한 전사 마사이 남자들은 무섭고 거칠었다. 수백 마리 벼룩에 뜯긴 형의 등은 봐 줄 수가 없었다. 염소 털이 둥둥 뜬 스프를 먹고 며칠이 지나도록 몸에서 염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디 그 뿐인가, 형 누나는 그가 도착하자마자 이제 세면도구는 내가 챙겨라, 론리는 네 가방에 넣어라 하며 짐을 나눈답시고 자꾸 자기들 짐을 떠넘겼다. 그러면서 “누나 티셔츠 좀 빨아 줘” 하면 “니 뿡,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했다. 아, 손빨래가 젤 싫다. 짜증의 연속이다. 그가 생각한 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다. 심지어 목적지부터 달랐다. 느려터진 형 누나가 원래 만나기로 했던 남미 근처에도 못 온 탓이다. 생뚱맞은 아프리카라니.
 
그래도, 조금 멋지기는 했다. 저렇게 끝도 없는 지평선은 처음 봤다. 어디에나 거대한 구름의 그림자가 평원에 드리워졌다. 이곳에선 땅도 하늘도 구름도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이상해. 여기 하늘은 왜 한국보다 넓지? 하늘은 왜 여기서만 돔이지?” 묻기도 했다. "햇빛 이펙트"도 자주 봤다. 커다란 구름 뒤의 해가 지평선으로 비스듬히 빛살을 뿌리는,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흔한 게 무지개였다. 별은 매일 밤 쏟아질 듯 했다.

▲ 희뿌연 새벽은 새벽대로, 저녁은 저녁대로 아름다운 풍경     © Abby 

여행을 통해 스무살에게 찾아온 변화
 
5천 500킬로미터, 대륙을 종단하며, 건기와 우기인 지역을 번갈아 지난 여행은, 보얀 스무살의 피부를 말렸다 쪘다 했다. 6년근 홍삼처럼 점점 붉게 익는 몸처럼 여행도 생각도 익어갔다. 여행이 소비 행위 이상의 것일 수 있음을 조금씩 깨우쳐 가면서, 처음과 달리 질문이 많아졌다. 형과 누나로부터 질문을 받으면 툭, 답을 던지던 속도에도 쉼표가 붙었다. 몸으로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도 온전히 동행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 형 수건 갖고 갔어?
 
어느 날 저녁이었다. 형이 샤워하러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침대에 걸린 수건을 보더니 스무살이 말했다. 글쎄. 엎드려 무언가를 적던 누나는 고개도 안 돌리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글쎄가 뭐야. 내가 가서 물어볼게. 그가 욕실로 달려갔다. 형아, 수건 있어요? 누나는 침대에서 혼자 웃었다. 큭큭큭큭. 형아래 형아. 집에서도 막내, 사촌 중에서도 막내인 스무살은 커다랗게 다 큰 지금도 가끔 저도 모르게 형아, 하고 형들을 불렀다.
 
형아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누나가 말했다. 스무살이 남편 수건을 챙기드라. 나는 관심 없었는데 가서 물어보기까지 했어. 형이 말했다. 진짜? 시킨 게 아니었어? 스무살이 나 챙겨준 거야? 오아 감동적이다! 스무살이 말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쉬하러 가는 길에 겸사겸사 물어본 거예요. 일부러 간 거 아니에요. 형이 말했다. 아 그렇구나. 잉여로운 마음! 나도 갚아주고 싶다. 나중에 뭐 남아돌면 스무살에게 제일 먼저 줄게. 모두 키득키득 댔다. 그 날은 길에서 강도를 만난 날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키득키득 댔다. 서로 마음의 주름을 펴 주듯이.
 
다음 날이었다. 소웨토(Soweto) 여행을 위해 여행사에 운전과 가이드를 부탁했었다. 그녀와 약속한 시간이 삼십분도 남지 않았으나 스무살과 형은 침대에서 나온 몰골 그대로 식탁에 앉아 지긋이 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준비를 마친 누나는 경악했다. 씻지도 않았어? 왜이렇게들만만디야이십오분남았어빨리먹어! 속사포처럼 다그치는 누나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슬로우모션에 가까운 속도로 빵을 입에 가져가며, 스무살이 말했다.
 
- 여기 아프리카야. 왜 그렇게 급해? 아직도 그런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다니, 좀 당황스럽다. 응?
 
그리고 실제의 디스트릭트 나인(District 9)과 아파르트헤이트 뮤지엄에서 하루를 보낸 그 밤, 스무살이 말했다.
 
- 모르겠어요 형. 들어오기 전에는 조벅이 그냥 무서웠어요. 사람들이 하도 무서운 곳이라고 하니까. 그러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근데 그게 꼭 그 사람들이 나빠서 그런 걸까요? 흑인이어서, 조벅이어서, 그래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마지막 날엔 스무살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희망봉 트래킹을 마쳤는데, 국립공원 사무실에서 가는 택시를 불러 줄 수 없다고 했다. 내려가는 길목 내내 히치하이킹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차를 세우지 않았다. 낭패였다. 둘씩 짝을 지어 거리를 두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기로 했다. 기차역까지는 차로도 20분이 족히 걸리는 거리였고, 국립공원 입구는 인적이 드문 산 속에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러다가 기차를 놓치고 발이 묶이는 게 아닐까 점점 조바심칠 무렵, 교통편을 해결해 온 것은 스무살이었다. 저 멀리 길가의 수공예품 장수를 구워삶아 택시 흥정을 해 온 거였다. 순식간에 어떻게 말을 잘 했던지 그는 스무살과 함께 온 우리를 마치 친구처럼 반기며 악수를 청했다. 배낭여행 한 달 반만에, 녀석은 히치하이킹으로 위기에 처한 누나와 형들을 구원했다.
 
스무살이다. 닿는 세계를 모두 흡수하는 스펀지 스무살. 스무살을 보내던 새벽, 그리고 보내고 온 새벽에 누나는 혼자 깨 잠을 설쳤다. 언제나 내겐 아가였던 내 막내 사촌 동생 스무살, 더 이상 아가일 수 없는 그를 이제 정말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괜히 가슴 저 깊은 곳이 쿡쿡 쑤셨다. 여행이 줄 수 있는 여러 가치 중 하나가 ‘살던 맥락의 전환’일 텐데. 이 여행으로 입시지상주의 한국의 평범한 입시생의 세계가 잠시나마 전환을 맛보았기를, 하여, 살던 사회의 협박과 회유의 패러다임 그대로 이십대를 확장하지 않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 스무살의 앞길에, 이 여행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Abby 

다시, 남아공 북쪽을 향해
 
우리도 떠날 채비를 했다. 애초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가장 가보기 원했던 곳은 서쪽이었다. 도매금으로 ‘아프리카’라고 칭하기에 무리가 있을 만큼 서쪽과 동쪽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동쪽은 끊임없이 서구의 손길이 닿아 꾸준히 개발되고 알려져 왔지만, 서쪽은 그렇지 않다. 끊이지 않는 내전, 빈곤과 범죄의 문제도 훨씬 심각하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우리의 방문을 허락해 주신 한국인 활동가는 그 곳에서 아들을 잃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자원활동까지 다 엮어놓고도, 우리는 결국 서쪽으로 가지 못했다. 어디에 가든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이 알려주지 않는 현지의 교통편이 있기 마련인데, 아프리카에서는 누구도 비행편 외에 서쪽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서쪽으로 육로로 간 적이 있다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유일한 교통인 비행의 삯은, 대륙 내의 이동임에도 한국행 항공료의 두 배를 훌쩍 넘었다. 아쉽지만 여행이 막바지인 우리 통장 잔고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대신, 곧바로 남아공의 행정수도인 프레토리아(Pretoria)에서 보름간의 자원 활동 기회가 생겼다. 남아공이라는 나라를 좀 더 가까이서 깊이 배우는 기회가 되리라.
 
조벅에서부터 타고 내려왔던 쇼숄로자 메일 기차에, 이번엔 반대 방향을 향해 다시 몸을 실었다. 여행 중 때때로 몇 주를 여럿이 왁자지껄하다 단 둘이 남으면 늘 오묘한 기분이 끼쳤다. 아늑하고 오붓하기도 하지만, 가슴이 시리도록 허전하기도 했다. 결국은 이 지구상(?)에 우리에겐 서로밖에 없는가 하는 실감과, 몸 부비고 사는 우리 둘조차도 타인이기에 결국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깊은 고독. 그래서 둘 다 한동안은 말이 없이 각자 마음을 정리하곤 했다. 장이 눈을 감았다. 객차에 길게 누워 머리맡 차창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눈을 주었다. 북쪽에서는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Ab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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