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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로드트립> 16. 남아공③ 야만의 시대는 가고, 불평등은 남다 
 
애비(Abby)와 장(Jang)-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으로 서른이 되던 해 여름에 함께 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 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편집자 주]

남아공 흑인 권리항쟁의 기폭제가 된 헥터 피터슨의 죽음

▲ 평화 시위 중 경찰이 쏜 총에 사망한 소년 헥터 피터슨 (출처: 위키피디아)    
 
열 세살 헥터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집단 흑인 주거촌, 아니, 빈민촌이라고 불러도 좋은 소웨토(SOWETO)에서 나고 자랐다. 정부는 타운십(Township)이라는 이름으로 흑인들이 거주할 지역을 곳곳에 지정했고, 소웨토는 그 중 인구 400만이 넘는 남아공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타운십이었다. 소웨토라는 이름은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남서쪽의(SOuth WEst) 흑인거주지(TOwnship)라는 뜻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가자 형들, 누나들, 친구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오늘은 수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형들이 노래를 부르며 학교 밖으로 행진했다. 늘 엄마도, 할아버지도 부르는 익숙한 노래였다. 언제부턴가 학교에서는 부르면 안 되는 노래라고 했으나 그 날은 예외였다. 학교 밖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학교의 형 누나들도 수업을 하지 않는 날인 것 같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걸었다. 노래를 하기도 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그러던 한순간, 어디선가 경찰들이 나타났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형 누나들은 더 크게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 경찰에게 돌을 던졌다. 언제나처럼 경찰이 사람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형들도 경찰을 때렸다. 경찰들이 데려온 개가 사납게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경찰은 곧이어 최루탄을 쏘았고, 참을 수 없이 쓰라린 얼굴에서 눈물 콧물이 흘렀다. 헥터는 겁에 질렸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 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탕! 탕! 하는 쇳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멀리서 달려오는 누나가 보였다. 마쿠보(Makhubo) 형도 함께였다. 누나, 하고 불렀다고 생각한 순간 다리가 꺾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76년 6월, 열세 살 소년 헥터가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사망한 것은 학생들의 평화 시위 중이었다. 백인들의 토착어인 아프리칸스(Afrikaans)와 영어만으로 수업을 하라는 정부 방침이 발표된 직후였다. 소웨토의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부족어를 말살하려는 백인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다. 평화로운 시위는 경찰의 등장으로 양상이 달라졌다. 경찰들은 진압을 위해 비무장 상태의 학생들에게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했다. 수백 명이 죽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잡혔다. 경찰은 이후 무장한 경찰과 군대, 각종 군장비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소웨토를 포위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이한열이나 김주열의 죽음이 그랬듯, 헥터 피터슨의 죽음은 흑인 권리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총에 맞은 소년 헥터 피터슨을 안고 달리는 또 다른 소년과 헥터의 누나가 담긴 사진은 소웨토 항쟁 뿐 아니라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 시절의 상징이 되었다. 헥터의 사진은 국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독불장군으로 차별 정책을 밀어붙여 온 남아공 정부에 대한 전 세계의 거센 분노를 일으켰다. 강압적인 정부 의 공포 정치로 입을 다물고 있던 남아공 내 의식 있는 백인들 또한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웨토 항쟁 이후에도, 무려 근 20년 동안이나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고 다친 후에야 비로소 아파르트헤이트는 끝이 났다.
 
흑인들의 게토와 백인들의 부촌 사이
 
     세상에, 미쳤군요. 살아 돌아와서 기뻐요! 세상에, 이런 세상에, 무모한 사람들 같으니!
 
오늘은 그 아파르트헤이트를 생각할 수 있는 현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어제의 강도 사건에 대해 수선스럽고도 따뜻한 미소로 농담을 건넨 아줌마 아그네스(Agnes)는 하루 종일 우리를 안내해 줄 가이드다. 영국식 억양이 남아 있는 남아공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영국에서 건너와 남아공에서 아그네스를 낳고 길렀고, 그녀도 영국 태생의 남자를 만나 결혼했으며, 아이들도 영국에서 공부 중인 영국계 남아공 사람이었다.
 
- 우리도 한낮엔 도심에 혼자 가지 않아요. 차 안에 있어도, 차를 부수고 강도질을 할 수 있는 곳이 시내예요. 게다가 숙소가 여빌(Yeoville)이라니! 이 지역에 머물고 있다기에 깜짝 놀랐어요. 거긴 우범 지역이에요, 위험한 곳이라고요. 샌튼(Santon)처럼, 북쪽의 안전한 곳으로 왔어야 해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오늘이라도 얘기해요.
 
그랬구나. 그것이 우리가 머무는 곳 근처에서 백인을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던 이유였다. 매니저 페이션스만 늘 자리를 지켰을 뿐, 숙소 주인이라는 백인 여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점도 떠올랐다. 아그네스가 말한 샌튼(Santon)은 백인들의 부촌이라고 들었다. 마치 남쪽의 타운십처럼, 북쪽엔 반대로 부촌이 몇 지역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타운십이 강제로 구역지어진 흑인들의 게토(ghetto)라면, 백인들의 부촌은 자신들 스스로가 모여 걸어 잠근 성이라는 점이 달랐다. 우리가 여빌에 숙소를 잡은 이유라야, 둘러볼 것 많은 시내에서 가깝고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이미 어제가 된 역사라지만, 아그네스와의 대화에서 다시금 확인한 것은 오늘의 흑인과 백인이 물과 기름처럼 전혀 섞이지 않고 산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공포의 강’이 세차게 흘렀다. 이전엔 흑인에서 백인 쪽으로만 흐르던 물길이 이제는 양방의 소용돌이가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 그녀는 흑인들이 모이는 지역을 ‘위험한 곳’으로 연신 지칭하면서도 남아공의 사람들은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 사실 문제는, 보어인들이예요. 우리가 아니죠. 그들은 늘 문제를 일으켜요. 여전히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예요.
 
보어인은 네덜란드 계열의 백인들이다.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도망 온 기독교인들로, 대부분 농부였기에 농부라는 뜻의 네덜란드어 ‘보어(Boer)‘인으로 스스로를 불렀다. 그러다 20세기 초 아프리카 진출에 박차를 가하던 영국인들과 본격적인 갈등을 빚으면서, 자신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정통성 있는 주민임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프리카너(Afrikaner)로 부르기도 했다.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보어인과 노예 제도 철폐를 주장한 영국인들은 남아공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사사건건 대립하며 날을 세웠다. 그 갈등의 감정과 골이 여전히 깊어 보였다.

▲ 백인에게 전기를, 흑인에게 폐기물을 남기던 옛 화력 발전소  
 
현재 남아공 내의 갈등은 ‘백인과 흑인’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띤다. 네덜란드계와 영국계로 백인들이 갈등하는 한편, 흑인들이라고 일치단결한 것은 아니었다. 대륙의 다른 나라로부터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흑인들 사이에서도 극에 달해 있었다. 몇 년 전엔 흑인들 사이에서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유혈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끝났지만, 제노포비아(Xenophobia, 외국인 또는 이민족 집단을 혐오, 배척이나 증오하는 것)는 더 촘촘하고 질기게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피해자는 너무도 빠르게 자리를 바꾸어 가해자가 되었다.
 
- 저게 뭐예요?
 
스무살이 물었다. 얘기하느라 바깥을 볼 새 없던 모두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심을 벗어나면 고층은커녕 서너층의 건물도 사라져 끝없이 나타나는 평지 저 쪽에 알록달록한 그림을 입은 커다란 기둥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두 탑 사이엔 번지점프대까지 설치되었다. 아그네스는 지금은 가동하지 않는 화력 발전소라고 설명했다. 백인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던 발전소의 폐기물이 고스란히 소웨토 지역으로 흘러갔단다. 한 쪽의 희생으로 한 쪽이 동력을 얻던 착취와 억압의 상징이, 이제는 다이내믹한 남아공의 면면이 그려진 오브제로 변신했다. 조벅에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렇듯 도처에 생생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끝없이 늘어선 깡통집, 만델라가 나고 자란 ‘소웨토’

▲ 수도관이 다 드러난 소웨토의 진흙길과 양 쪽에 늘어선 깡통집들     © Abby 
 
소웨토에 도착했다. 수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이건만, 소웨토에는 백인 지역에 흔히 있는 쇼핑센터나 칼텍스 등의 큰 주유소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다만 끝없이 늘어선 깡통집이 풍경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찾은 이 지역이 소웨토에서도 가장 열악한 지역이라고, 아그네스가 귀띔해 주었다. 구불구불한 함석을 얼기설기 이어 붙여 벽과 지붕을 삼은 집들은 하나같이 낮고 좁았고, 틈 없이 붙어 있었다. 한 번 화재가 나면 몇백 채씩 걷잡을 수 없이 사그라지기가 일쑤라고 했다.
 
약 50가구당 간이화장실 한 개, 수돗가 한 개인 이 지역에 배수 시설이라고 제대로 갖춰졌을 리 없어, 마을의 진흙길은 언제나 질척하다. 민영화된 전기를 구입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전봇대로부터 불법으로 길게 전선을 내려 집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하나의 전봇대에서 주변의 집들로 각각 늘여진 방사형의 전선들은 마치 우주와 교신하는 비밀 수신 장치처럼 보였다.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 <디스트릭트 나인>이 마치 실화인 듯 이 곳 사람들은 모두 외계인이 아닐까. 이 열악한 환경에선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이라야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간이 화장실이 50가구에 하나 꼴로 설치되어 있다.     © Abby 
 
소웨토에서 나고 자란 한 청년의 안내에 따라 어느 여인의 집으로 들어섰다. 아기를 안은 여인이,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소웨토를 찾는다는 아그네스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집안엔 문도 따로 없이 대충 나뉜 공간의 한쪽 구석에 주워온 듯한 침대가, 다른 한 쪽에 소파가 대충 놓여 있었다. 먹고 자는 곳이 한데 뒤엉켜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공간, 아기가 쉴 곳도 없는 공간이었다. 함석은 여름 볕에 손을 델만큼 달궈지고, 겨울바람에는 실내외 온도가 별 차이 없을 만큼 차가웠다. 소웨토 대부분의 집은 이런 모습이라고 했다. 2012년의 모습이 이럴진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는  대체 어떻게 살고 있었던 걸까.
 
누군가는 지루하고 똑같은 풍경의 소웨토에서는 한 시간도 길디길다고 했었다. 그러나 느린 우리에게는 반나절도 숨이 가빴다. 누군가의 집에 들르고 학교를 방문하고 이곳에서 나고 자란 만델라의 집에 남은 기록을 눈에 담는 동안 숨도 쉬지 않고 핥았으나 겉도 채 맛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애초 계획은 소웨토 안의 숙소에서 일박을 하며 곳곳을 천천히 둘러보는 일정이었으나, 어제의 강도 사건 이후 다소 위축된 일행은 자타가 공인하는 슬럼가인 소웨토에서의 숙박을 부담스러워했다. 아쉬운 마음을 품고 소웨토를 떠나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파르트헤이트 뮤지엄이 말하는 ‘진실과 화해’

▲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출입구를 재현한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입구 (출처: 박물관 홈페이지)  
 
아그네스가 티켓을 건네주었다. 장과 내게는 “백인(Whites)” 입장권이, 스무살과 킴에게는 “비(非)백인(Non-whites)” 입장권이 주어졌다. 복불복으로 주어지는 티켓에 따라 별도의 출입문을 통해 입장하게 되어 있었다. 체험은 힘이 세서, 직접 백인-비백인으로 나뉘어 다른 통로로 발을 들이는 것은 눈으로 보기만 하며 생각하던 것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을 불러 온다. 입구를 지나고, 우리와 헤어졌던 두 사람의 ‘비백인’을 만나 본격적인 전시관으로 향하는 오르막에 성별, 나이, 인종이 다양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담은 패널들이 서 있었다. 모든 인간은 함께 한 길을 가는 동반자라는 뜻일까.
 
아파르트헤이트 뮤지엄은 그 간 경험한 모든 분야의 전시관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탁월했다. 전후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 풍부한 사진과 동영상 자료들(특히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만든 우스꽝스러운 프로파간다 클립들!)은 입체적으로 시대와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옛 간판 등을 사용해 구현해 놓은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의 옛 세상은 마치 우리가 그 시대의 어느 거리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때론 바로 어제처럼 느껴지는 90년대, 내가 중학생이었던 그 시절 이런 세상이 있었다니. 같이 앉아서도 안 되고, 같은 물건을 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으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거리의 계단이 안방인 듯 엎드려 손걸레질을 해야 했던 세상.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세상이 넬슨 만델라와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같은 평화의 사람들을 낳았다. 그들의 위업은 야만의 시대를 끝냈다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만델라 취임 이후 투투 주교가 위원장이 된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의 기록을 보면, 27년간 투옥된 정치인과 비폭력 투쟁을 주도한 주교가 택한 과거사 정리의 핵심은 복수와 처벌에 있지 않았다.
 
정부와 위원회는 진실을 정확히 밝히는 조건으로 인권 침해 행위를 고백하고 사죄한 가해자들을 사면했다. 피해자들 역시 자신의 사연을 고백하고 용서했고, 정부는 적절한 보상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명예를 회복해 주고자 했다. 청문회 내용이 매체를 통해 생중계되는 동안, 수십 년간 침묵했던 악랄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치유의 물꼬가 트였다. 무려 7년간 온 나라가 다 같이 과거를 직시하고 정리했다. 그 모든 내용은 위원회의 보고서로 역사에 남았다. 인류사에 남을만한 모범적인 과거사 정리이고 화해였다.

▲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고발한 사진들. 당시 이 모든 사진은 전시 및 출판금지물이었다. © Abby 
 
마지막 전시관의 문을 나서자 <치유의 공간(Place of Healing)>이라는 이름의 너른 정원에 이르렀다. 박물관을 둘러보다 몇 차례나 울컥이는 감정을 추스르기는 처음이었다. 깊은 고민과 다짐이 느껴지는 단단한 전시는, 남아공의 야만과 치유의 역사가 남들의 일, 다른 나라 일이 아닌 내가 속한 인류의 일로 다가오게 했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참고해 하나의 역사를 촘촘히 엮어 가는 법이므로, 끝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긴’ 선례를 남긴 이 나라의 힘이 고마웠다.
 
그러나 아침에 찾은 오늘날 소웨토의 풍경은, 정치적으로 선언된 평등과 법적으로 엄격하게 보장된 권리가 극심한 경제적 교육적 불평등에 대한 대책 없이는 온전해지기 힘들다는 점 또한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것은 만델라와 투투 이후의 세대에 주어진 숙제이리라.
 
그리고 그런 불평등이 가져오는 계층 간의 분열, 점점 심각해지는 제노포비아로 인한 갈등은 정확히 내 나라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남아공의 근대사가 남의 일 같지 않았듯, 오늘날의 숙제 또한 공히 우리 앞에도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상 한 번도 제대로 화해나 일치를 이루어 본 일이 없는, 과거를 정리하지 못한 내 나라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한낱 여행자에게 주어진 질문치고는, 가슴이 뻐근하도록 무거운 숙제다. (Abby)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신문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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