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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로드트립> 16. 남아프리카 공화국②
애비(Abby)와 장(Jang)-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으로 서른이 되던 해 여름에 함께 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 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편집자 주]
가만. 월드컵이 불과 일 년 전이었잖아. 그 정도 국제 행사를 치르고 나면 치안도 좋아지는 것 아니야? 그러게, 그것도 주로 조벅(요하네스버그)에서 경기가 있었다는데. 숙소에서 부른 택시를 기다리며 장, 스무살, 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무살의 카메라를 바로 지난 밤 잃어버리고도, 우리는 남아공의 치안이 얼마나 열악한지, 심각한 범죄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에 관한 경고를 좀처럼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택시가 도착했다. ‘택시’라고는 하지만, 주변의 이웃 중 적당한 차를 가진 몇몇 사람이 숙소와 연계해 택시 역할을 하는 듯했다. 우리를 태우러 온 마샤(Marsha)라는 이름의 친절한 여자는 “언제라도 내게 전화를 하라”며 전화번호를 건넸다. 모두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말라고들 하니, 오늘은 이렇게 시내까지 움직인 후 도보로 움직일 수 있는 반경 내에서 시간을 보내고 적당한 시간에 다시 마샤에게 픽업을 요청할 예정이다.
정치범을 가두던 감옥 위에 세워진 헌법재판소
▲ 헌법재판소 본관 건물 앞의 현판. 감옥에 갇힌 수인들이 바닥과 벽에 판 글씨를 재현해 디자인된 서체다. © Abby
이윽고 ‘헌법재판소(Constitution Hill)’에 도착했다. 입구로부터 곳곳에 다양한 남아공 현대 작가들의 조각과 설치 작품이 놓인 이 언덕(Hill)은 거대한 갤러리 같지만, 실은 오래도록 정치범들을 가두던 악명 높은 감옥 올드 포트(Old Fort Prison)였다. 언덕의 아래쪽에는 그 감옥을 구역 별 그대로 보존한 박물관이 남아 있다. 90년대 중반 제정된 새 헌법에 걸맞은 새 재판소에 대한 각계의 고민 끝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이곳이 부지로 선정되었다. 언덕 위쪽 중앙에 놓인, 언뜻 보면 미술관 같은 근사한 건물은, 감옥의 일부를 다시 활용해 지은 헌법재판소 본관이다.
딱딱한 법원이 ‘미술관처럼’ 보인 것은 건물의 첫인상 덕분이다. 전면에는 영어를 비롯한 남아공의 11개 공식 언어로 ‘헌법 재판소’ 라는 사인이 붙어 있었다. 둥근 글자는 남아공의 유명 디자이너 가스 워크(Garth Walker)가 올드 포트 감옥의 죄수들이 바닥과 벽에 긁고 쓰고 파낸 글을 3천장 이상의 사진으로 찍은 후 탄생시킨 서체라고 했다. 빨주노초파남보의 컬러는 넬슨 만델라가 인종, 성별, 계층을 아우르기를 염원한 무지개 국가론을 상징한 것이리라.
<우리, 남아프리카의 인민은
과거의 불의(injustice)를 인정합니다.
이 땅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 온 사람들을 기립니다.
우리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키기 위해 일해 온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남아프리카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며 이 땅에 살아온 모든 이들의 것임을 믿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 서문 중-
남아공의 헌법은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 이후 96년 제정되었다. 오랜 흑백 간 갈등과 아픔의 종지부를 찍으며 수년간 각계각층의 의견 수렴과 협의를 통해 꼼꼼히 새긴 이 헌법은 국가의 이익이나 국민의 의무보다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개념을 법리화하는 데 중점을 두어, 현재 전 세계가 참고할 만한 가장 모범적인 헌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법원 내부로 들어가는 거대한 목조 대문은 ‘인간의 존엄, 평등, 삶의 질’ 등을 기본으로 한 헌법 조항들을 부조로 새긴 거대한 조각품이다. 간단한 보안 검사를 거친 후 누구나 입장이 가능하다. 로비에는 흑백 분리 정책 시절부터 헌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남아공 내 인권의 역사가 연대기별로 잘 전시된 로비 안쪽으로는 그 날도 여러 건의 헌법 소원 재판이 진행 중인 재판정이 있었다.
‘불의’의 현장에서 탄생한 ‘위대한 영혼’
▲ 감옥 <넘버 4>의 흑인 죄수 방. 발과 머리를 엇갈려 눕게 해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겨 넣었던 장면을 사람 크기의 담요로 재현했다. © Abby
언덕 아래쪽의 감옥으로 향했다. 헌법 서문에 적인 그 ‘불의’의 현장이다. 다소 예민한 나는 감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워지곤 했다.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는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한 원혼들이 있으리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의 끝이 짐작의 범위를 넘어설 땐 더욱 경악스럽다. 이곳은 급기야 감방 별 인원 수, 죄수복, 담요, 음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백인, 흑인, 유색인 등급으로 세세히 분류되어 있었다. 흑인들은 여기서도 감옥 안의 감옥을, 지옥 중의 지옥을 살았으리라는 증거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넘버 4’라고 불린 이 감옥에 갇히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저녁 생선을 사러 나가다 통행증이 없다고 끌려온 사람, 백인 구역인 줄 모르고 발을 들였다가 잡힌 사람,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백인이 잡아 가두니까 항변하지 못하고 갇힌 사람 등등. 어느 죄수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 시절 “할머니는 일상적인 외출을 하는 가족에게도 매번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작별 인사를 했”고, 가족들끼리는 “말없이 내가 들어오지 않으면 <넘버 4> 에서 나를 찾으라”고 의례히 이야기했을 정도다.
감옥엔 이름 없는 갑남을녀에 더해 정치적 명망가들의 흔적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정치가로서 간디의 삶, 그 ‘비폭력 저항’의 역사가 <넘버 4>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처음 알았다. 그가 수감되었다는 감옥의 한 구역이 ‘마하트마 간디 특별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감옥의 자료에 따르면, 그가 독립 운동을 처음 구체적으로 다짐한 것은 남아공 생활 중의 차별 때문이었다. “남아공에서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고, 남아공에 대한 나의 애정과 염려는 인도에 못지않다”는 말을 남겼을 만큼 그에게 남아공에서의 시간과 투옥의 경험은 생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이 끔찍한 공간으로부터 ‘위대한 영혼(마하트마)’이 탄생했다는 역설조차, 역사를 움직이는 섭리일까.
▲ 올드 포트 감옥에 갇혔던 주요 정치범들. 상단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젊은 날의 간디. © Abby
한낮의 번화한 도심, 왜 백인들은 없을까
점심을 먹고 근처의 국립 갤러리를 둘러본 후, 칼튼 센터로 향했다. 조벅의 다운타운 한가운데 있는 50층 높이의 칼튼 센터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했다. 조벅이 한 눈에 들어온다는 꼭대기 전망대의 이름은 그에 걸맞은 “아프리카의 정상(top of Africa)”이다. 장도 나도 어딜 가도 전망대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왔지만, 이곳은 좀 다를 것 같았다. 주변에 다른 고층 건물도 거의 없으니, 시내 뿐 아니라 점차 건물이 낮아지다 사라지는 아주 먼 곳, 영화 <디스트릭트 나인>의 배경인 조벅 외곽에 늘어선 깡통집의 양철 지붕들까지 시야에 놓고 비교해 볼 수 있으리라.
한낮의 다운타운은 번화했다. 대로 양 편에 즐비하게 늘어선 옷가게들이 문을 열고 손님을 불렀다. 도로 중앙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말하자면 종로나 명동만큼이나 번잡한 큰 길이었다. 다만 어디에도 백인은 보이지 않았다. 물건을 파는 이도 사는 이도, 버스를 타는 이도 태우는 이도 모두 흑인이었다. 큰 도시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차이나타운을 지날 때에도 역시 흑인 외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남아공에 들어온 이래 아직 단 한 명의 백인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
칼튼 센터까지 한 블럭을 남긴 마지막 사거리에서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로 올라서는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유난히 신경을 긁었다. 어디론가 다급히 소리치는 남자의 소리였다. 저 소린 뭔가 느낌이 이상해, 생각하는 찰나 목소리의 주인공이 뛰어오더니 우리 앞을 막아섰다. 헤이, 어디 가? 멈춰. 따라와. 이 길이 아니야. 저 쪽이야.
아니야, 우린 저 쪽… 하고 순진하게 대꾸하며 발을 옮기는 찰나 상황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남자가 우리를 힘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행인인 줄 알았던 주변의 네댓 명이 올무를 조이듯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 중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는 남자를 장이 막아섰다. 그런 장을 밀치며 가방과 카메라를 잡아당기는 또 다른 남자에게 발길질을 하며 덤비던 나는 팔꿈치에 얼굴을 맞았다. 칼이 있으면 찔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보단 내 남편 내 동생을 건드리면 내가 널 찌를 거야 하는 무서운 살기가 올라왔다. 주변에 어깨가 부딪치도록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모두가 마네킹인 것 같았다.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 Stop!! hey, get back! Help us! Help us!
역시 용감한 이들은 여자라, 길 건너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쇼핑백을 휘두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 경찰을 불렀다. 남자들이 달아나고,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 한 대가 뒤쫓는 것이 보였다. 장과 스무살과 서로를 살폈다. 다친 데 없이 멀쩡하다. 그러다 질린 얼굴로 선 킴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이 없었다. 저 쪽이야, 저 쪽! 하고 아주머니들이 사거리 저 편을 가리키자 그가 정신없이 그들을 쫓아 뛰었다.
본능이 행동을 지배한 순간, 누굴 탓하랴
따라서 뛰려는 장군과 스무살을 막았다. 가지 마. 스무살이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킴 형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다녀올게, 둘은 여기 있어. 형 찾아올게. 하는 장군을 다시 막으며 소리쳤다. 가지 마! 조금 기다려 보고 안 오면 경찰부터 부르자.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혔다. 미안합니다 킴, 내 남편 내 동생마저 그리로 가게 둘 순 없어요. 얼얼한 잇몸을 혀로 훑자 비릿하게 핏내 나는 침이 고였다.
그 순간 길 건너에서 킴이 나타났다. 아직도 하얗게 질린 채였다. 건너가 다시 넷이 만났다. 가방엔 카메라와 돈 약간이 있었다고 했다. 휴우.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제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경찰을 불러! 경찰이 도와줄 거야!
이 봐 치나, 너희들 쿵푸 못 해? 후아, 후! 이렇게! 그렇게 당하는 게 어딨어?
저건 다 짐바브웨 잠비아 놈들이야. 남아공 사람들이 아니라고.
▲ 얼결에 하게 된 "요하네스버그 중앙 경찰서" 관광(?). 입구부터 겹겹의 창살로 둘려 있다. © Abby
주변의 남자들이 갑자기 앞 다투어 소리 높여 참견을 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강도를 당했다는 사실보다, 영원같이 느껴졌던 그 짧은 시간 아무도 우리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는 게 더 끔찍했다. 물론 아무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떨어뜨린 책을 찾으러 길 건너에 돌아가자, 책을 갖고 있던 가게 주인은 극도로 긴장한 채 주변을 살핀 후에야 가게 안으로 장을 불러 책을 건넸다고 했다. 누구도 휘말리고 싶지 않아 했다. 떨리던 심장이 저 뱃속으로 착 가라앉아버린 듯 착잡해졌다. 사거리 모퉁이의 큰 옷가게 안에 서서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가게의 활기에 괜스레 심사가 뒤틀렸다. 도착한 경찰에게 분풀이가 쏟아졌다.
어떻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수가 있지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요!
총이나 칼을 들이댈 수도 있으니까요. 조직 폭력배일 수도 있어요. 외국인을 돕다 다치거나 보복당하면 누가 책임을 지나요. 아무도 나서지 않아요. 당신들이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에요.
하긴, 내가 누굴 탓하고 원망할까. 타자라 기차에서 만난 킴과 동행한 지 열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마비되고 본능이 행동을 지배한 순간에, 내게 그의 안위와 내 가족의 안위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를 따라가 내 남편 내 동생이 다치는 게 두려웠다. 침착해, 경찰부터 불러.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비겁했다. 그런데 낯모르는 외국인이 당하는 강도 따위에 함께 저항해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다니. 이 이중성이야말로 악이로구나.
그래서였을 것이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로 갈 거냐 묻는 경찰에게 굳이 중앙 경찰서로 데려다 달라고 해 사건 접수를 한 것은. 물건을 잃은 킴만 당사자가 되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우리 모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을 잡아 눈앞에 둔다 해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무언가 해야 했다. 무언가 하도록 돕고 싶었다. 좀 전의 내 행동이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미안한 마음을 티낼 수조차 없이 미안했다.
‘불의’는 과거에만 있지 않다
조서 쓰는 킴을 기다리는 중에, 장이 나를 잡아채던 남자를 거칠게 몸으로 막던 게 생각났다. 그에게 말했다. 장군, 고마워. 감동적이었어. 그가 자상한 미소를 띠고 답했다. 그 잠깐의 순간에 지켜야 할 게 차례로 생각났어. 아까 출금한 돈. 카메라. 그리고 우리 월리(아이패드). 월리 네 가방에 있잖아. 모두 웃음이 터졌다. 스무살과 셋이 경찰서 철창을 부여잡은 채 숨이 멎도록,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눈물 끝에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계속, 웃음 끝을 부여잡았다.
- 걱정 말아요.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닌데. (Don't worry. Life is going on.)
▲ 헌법재판소 안에 걸려있던 한 현대 화가의 작품. 만델라가 꿈꾼 '무지개 국가'는 이런 축제와 같은 모습이었을까? © Abby
저녁거리를 사러 나가는 길이었다. 식당을 찾아 거리를 걷고 싶지는 않았고, 배달 음식 같은 것은 있을 리 없었다. 굶을 순 없으니 저녁을 위해 장을 봐야 했다. 호스텔의 매니저 페이션스가 괜찮겠어요? 하고 우리를 염려했다. 걱정 말라는 대답에, 맞아. 라이프 고우즈 온! 하며 그녀가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러나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장의 손을 꼭 잡고, 필요한 지폐 몇 장만을 주머니에 꾸깃꾸깃 찔러 넣은 채 길을 나섰다. 스무살과 킴은 집에서 쉬게 했다. 미리 생각한 저녁 메뉴는 커리였다. 야채만 넣으려던 커리에 넣을 고기를 샀다. 과일도 몇 가지 신선한 야채도 몇 가지 안주도 몇 가지, 비싸서 눈길 주지 않던 하이네켄도 몇 병 샀다. 황당한 일 당한 후에는 위로가 필요한 법, 모름지기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것만한 위로는 없는 법이다.
마트의 사람들도, 거리의 과일 행상들도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나는, 어제 가슴에 꼭 안았던 맥주병을 오늘은 거꾸로 그러쥐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헌법은 저 높은 언덕 꼭대기에서 우리들을 감동시켰건만, 언덕 아래 세상에서는 전혀 다른 순간들이 우리를 맞았다. 강도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외국인 노동자 탓을 했다. 외국인 노동자의 짓이라고 했다. 그 말과 눈빛에서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된 외국인 노동자들이 받을 멸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지나 이 나라가 과거로 정의한 그 ‘불의’는, 오늘날도 더 약하고 없는 사람들을 향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내 가족의 안위가 먼저인 수많은 ‘나’의 이중성이, 그 쳇바퀴를 더 공고히 돌리고 있으리라. 만델라가 꿈꾸던 무지개의 나라, 모두가 아름답게 공존하기를 염원한 그 곳은 정녕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일 뿐일까. (Abby)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블로그> 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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