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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로드트립> 17. 남아공④ 케이프타운으로 27시간 기차여행

애비(Abby)와 장(Jang)-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으로 서른이 되던 해 여름에 함께 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 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제국주의자의 야망이 남긴 호화열차 ‘블루트레인’  
 
19세기 영국 출신 남아프리카 광산 재벌 세실 로즈(Cecil Rodes)는, 영국이 지배하는 대 아프리카 제국을 꿈꾸던 제국주의자였다. 그 꿈을 위해 로즈가 추진한 일생의 과업은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 카이로까지를 잇는 아프리카 종단 철로를 건설해, 유럽으로부터 아프리카 땅 끝까지를 한 핏줄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격변하던 세계정세 속에서 그 원대한 프로젝트는 미완으로 끝났으나, 철로의 남쪽 시작인 남아공에는 호화 열차인 블루 트레인(Blue Train)이 남았다. 조벅에서 한 시간 거리인 북쪽의 행정 수도 프레토리아로부터 남서쪽 케이프타운까지 열차가 대각선으로 나라를 가로지르는 거리는 1600킬로미터, 27시간이 소요된다.
 
상상해 보자면 그 시절 블루 트레인은 기차 계의 ‘타이타닉 호’ 였으리라. 백인만을 위한 열차임은 불문가지, 그 중에서도 최상류층을 위한 최고급 객실, 정장 차림이 아니면 입장이 불가한 레스토랑의 샹들리에 아래서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는 음식과 와인, 도서관, 응접실, 와인바까지 갖춘 호텔이자 사교장이다. 최대 수용 인원은 고작 7-80여명, 두세 사람에 한 명 꼴로 시중을 드는 집사가 배정된다. (집사는 모두 흑인이었으리라는 사실도 불문가지!) ‘선택 받은 자들’만을 위한 이 열차에서, 부유한 유럽의 귀족과 관료들은 이렇게 아프리카를 종주하는 상상을 하며, 원대하고 아름다운(?) 로즈의 철로 건설 야망에 무한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2차 세계 대전 후 여러 사정으로 운행이 중지되었던 열차는 재정비 후 90년대 후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세계적 명사들의 이용으로 유명세를 탄 후, 돈만 있으면 그들과 한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눌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섞인 이 호화 열차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구가했다. 현재 블루 트레인의 가장 저렴한 운임은 11,600랜드, 한화로 150만원이다.

▲ 블루트레인이 지나는 곳 중 하나인 덤불 섞인 남아공 중부의 이 사막 지역을 카루(Karoo)라 하고, 카루를 관통하는 이 철로를 트랜스 카루(Trans-Karoo)라고 부른다.     © Abby 
 
그러나 블루 트레인이 유명한 이유가 단순히 호화로운 서비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 열차 서비스의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27시간동안 펼쳐지는 몹시 아름다운 풍경 덕이었다. 북쪽의 척박한 광산 지역, 덤불 사막인 카루(Karoo)지역,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과 포도밭, 희망봉과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이 보이는 아름다운 케이프타운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지나는 열차 여행은 이 넓은 땅의 아름다움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여,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은 남부 아프리카 여행 중에 놓치지 말아야 할 하이라이트 첫 번째로 이 철로를 꼽는다. 고맙게도 현재는 블루 트레인 이외에도 쇼숄로자 메일(Shosholoza Meyl)사가 운영하는 일반 열차가 같은 경로를 운행한다. 열차는 침대칸인 프리미어 클래스와 투어리스트 클래스, 일반 좌석인 3등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3등석은 외국인에게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택한 투어리스트 클래스는 객차 한 칸에 네 명이 탑승하는 검박한 열차였다. 아무렴 어떠랴, 아름다운 풍경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모습을 보여줄 텐데!
 
요하네스버그에서 얻은 것들을 되돌아보며

▲ 블루 트레인과 거의 같은 코스를 달리는 쇼숄로자 메일 열차.    ©Abby  
 
열차가 출발했다. 쿠궁 쿠궁, 쿠궁 쿠궁, 심장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울리는 낮은 파열음에 킴과 스무살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장은 동영상 강의를 꺼내들었다. 주경야독 혹은 주행야독, 한국에 돌아가면 하고 싶다는 일을 준비하기 위해 그는 해가 바뀌고부터 부쩍 틈나는 대로 공부에 빠져들곤 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나는 노트를 폈다. 아프리카에 들어온 지 벌써 45일, 우리 둘이 여행하던 지난날과는 달리 아프리카에선 빠르게 많은 곳을 지나오느라 차분히 무언가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볼펜이 끼워진 페이지에, 지난 밤 스무살과 함께 기도한 후 남긴 메모가 눈에 띄었다.
 
“하나님이 조벅의 고통을 기억해 주시기를.”
 
조벅은 매력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야만스러운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처와 그 싸맨 자리를 과장도 숨김도 없이 담담히 보여주었던 곳. 한편으론 채 아물지 못하고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진액이 찐득하게 묻어나던 곳. 식민 시대나 아파르트헤이트는 입에 올리는 것이 새삼스러운 과거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세계를 나누어 살고 있었다. 흑인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도심이 열리자, 이번엔 백인들이 그 곳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흑인 거주촌인 소웨토보다 더 위험한 곳이 도심이라고 가이드인 아그네스는 말했고,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대낮 강도를 당했다(그녀는 명랑하게 웃으며, '살아 돌아와 기쁘다'고 했다). “당했”다고 발음할 때마다 맞아서 멍든 턱과 잇몸이 욱신거리는, 다행히 일행의 카메라와 현금만을 빼앗기고 끝났을 뿐 누구도 크게 다치지 않은 가벼운 강도 상해 사건이었다.
 
한편, 사실상 이름만 알 뿐이었던 ‘넬슨 만델라’에 대해 배우게 된 것도 조벅에서의 큰 수확이었다. 폭력을 당해본 사람은 안다. 당연한 복수심을 억누르고 폭력의 고리를 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더군다나 수십 년간 쌓인 그 원한과 분노가 집단적인 것일 때, 그를 위로하고 설득해 화해와 용서를 이루어내는 일은 아무 지도자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강하게 스스로를 지켜내고, 바깥으로부터의 신뢰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측근들의 평가를 보면, 만델라는 말과 삶에 표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진실함이 만델라 리더십의 원동력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어쩌면 그 성품은, 감옥으로부터 길러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그마치 27년, 한 생애의 가장 뜨거운 시기를 송두리째 감옥에 저당 잡힌 채 맛보았을 분노와 좌절을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 기차가 고장으로 선 사이 힘겨루기를 하는 장과 스무살    © Abby 
 
그러나 만델라는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정직, 겸손, 단순함, 신실함, 관대함 등을 배우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 감옥’이라고 술회했다. 출소를 앞두고 언론들이 앞 다투어 만델라의 현재 얼굴을 예상해 그래픽 작업을 했을 만큼 27년간 외부에 공개된 일이 거의 없는 ‘감옥살이’ 동안, 그는 끝내 간수들의 존경과 협조를 받아내고, 동료들과 함께 젊은 정치범들을 위한 교육 코스를 개설해 교도소를 '대학'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했다. 그 지독한 폭력의 공간에서 내면 깊은 곳을 마주한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깊은 감동을 준다. 내겐 어거스틴이 그랬고, 신영복 교수가 그랬다.
 
여기까지 적은 순간 갑자기 기차가 섰다. 역이 아닌 어느 들판 한가운데다. 조금 전 세실 로즈가 광산업을 시작한 다이아몬드 채굴 지역인 ‘킴벌리 역’에 섰던 것을 기억했다. 웅성웅성 소란이 인 끝에, 차장이 다가와 전차의 전기 회로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블루 트레인도 관광하느라 중간 기착지에 한 시간을 머문다는데, 우리도 그런 셈이로구나! 빙긋 웃으며 다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바람을 쐬고, 수풀로 들어가 볼 일을 해결하고, 이 곳 저 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공부하던 무거운 머리, 덜 깬 잠이 묵직한 어깨를 바깥 공기에 털어버렸다.
 
‘멀리 보렴, 아주 멀리’
 
저 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보면, 끝이 없이 펼쳐져 시야의 끝에 볼록하게 걸쳐지는 지평선이 자주 등장했다. 그 땅 끝의 경계는 언제나 코앞의 테이블에만 고정된 내 눈을 들어 가장 먼 데를 응시하게 했다. “멀리 보렴. 아주 멀리.” 하고 부드럽게 권하듯. 문득, 지금의 우리들이 멀리 보며 꿈꿀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돌아가 우리들이 하려는 일들이 그럴까. 이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 근데, 왜 같은 값인데 기차를 타? 빠르지도 않잖아.
 
열차가 다시 출발하자, 스무살이 말했다. 이제 막 12년의 한국형 기본 교육을 마친 이 청년은,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돈과 시간의 함수'로 치환하곤 했다. 나는 가끔 메인 스트림이 주입하고 싶어 하는 그 나쁜 물이 이미 스무살한테 제대로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비아 어디쯤에선가 내가 장에게 푸념을 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었다. 그건 심란할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이제 틀을 깨기 시작하는 거지.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가 여행하며 본격적으로 스무살한테 더 나쁜 물을 들이는 거야! 이번에도 장은 웃으며 스무살의 말을 받았다.
 
     그런가? 일단, 나랑 누나는 기차를 가장 좋아해. 너는 기차 타면서 뭐가 좋았어?
     나는, 노을과 일출!
 
스무살에게 던진 질문을 내가 가로챘다. 어디 그 뿐이랴. 요람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칙칙폭폭 소리, 낡은 객차의 침대, 과속이나 추월 없는 기차 속을 흐르는 기차만의 시간, 넓은 들판에 모인 소떼들과 드문드문 씩씩하게 선 나무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 거기서 창밖으로 지폐 몇 장을 내밀고 사 먹는 간식들, 뛰어오는 아이들, 묘지들, 집들, 창문을 열고 맞는 바람과 뒤로 흘러가는 구름, 붉디붉은 흙길, 작은 역, 플랫폼, 뜨고 지는 해에 따라 시시각각 빛을 달리 하는 그 모든 풍경들. 장과 내가 만담을 하듯 기차 예찬을 펼쳤다. 이런 순간 스무살의 표정은 묘해진다. 반쯤은 설복 당했고, 반쯤은 ‘그래도 낭비고 비효율이잖아!’ 하고 반박하고 싶은 그런 얼굴.
 
그래. 아까의 지평선이 질문한 그 ‘멀리 보아야 할 것’엔, 무엇보다 지금 우리와 동행중인 스무살의 삶에 새겨질 이 시간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동행해 줄 수 있지만 여행은 결국 각자의 몫’이라 말은 하면서도, 나는 어린 내 동생에게 무언가를 더 보여 주어야만 할 것 같아 조바심쳤다. 우리가 너무 그를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건 아닌지 뒤늦게 후회가 된다. 좀 더 많이 대화하고, 이야기를 나눌 땐 좀 더 많은 여백을 가지고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 아프리카라고 해서 황량하기만 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남쪽으로 올수록 풍경은 그림 같아진다.  © Abby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덩이를 음미하며
 
2층에 있던 킴이 카드를 들고 내려왔다. 매번 장거리 이동 때마다 시도했으나 누구도 정확한 룰을 기억하지 못해 실패했던 카드 게임 ‘훌라’를 오늘 드디어 정복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웃음도 고함도 커졌다. 함께 게임에 몰두하는 것만큼 즐겁고 빠르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없으리라. 시나브로 해가 지고 배가 고파질 때까지, 식당 칸의 점원이 저녁 식사 주문을 받으러 객실을 찾아올 때까지 서로 벌점을 주고받으며 낄낄댔다.
 
어두운 밤의 기차 안은 더욱 오붓하다. 객실당 네 자리인 덕에 우리 일행만 오롯이 독립된 객실을 하나를 쓸 수 있어 아늑하고, 각각의 침대에 독서등이 달려 있어 불을 끈 뒤에도 각자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어 좋다. 모두들 책과 노트를 들고 침낭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푸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빛에 눈을 떴다. 뷰포트 웨스트(Beaufort West)라는 어느 작은 역이다. 밤에도 잠결에 이 역의 이름을 본 것 같은데, 우리를 푹 재우려는 배려였는지 기차는 밤새 다시 이 역에 머물러 이번엔 문제가 생긴 급수 탱크를 손 봤단다. 새벽녘에 깨었다가 하늘이 잔뜩 흐려 뜨는 해를 보지 못하고 다시 잠이 들었건만, 비가 오려나 싶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곧 눈에 보일 만큼 맑고 파랗게 높아졌다.
 
- 파이브 랜드! 파이브 랜드!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손수레 가득 싱싱한 포도를 실은 남자들이 객실 창가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커다란 청포도 한 송이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 5랜드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이렇게 크고 싱싱한 포도가 고작 천 원이라니! 고장으로 가다 서다 하면서도, 마침내 남쪽 지방에 도착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남아공은 세계적인 와인 산지가 아니던가. 남쪽엔 자주 끝도 없는 포도밭이 펼쳐진다고 했었다. 이 근처 어딘가에도 밭이 있는 모양이었다.

▲ 남아공은 세계적인 와인 생산국이다. 남쪽 지역엔 이름난 와이너리가 많아, 포도밭의 풍경이 자주 길게 이어진다.   © Abby 
 
곧 열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식당 칸에서 배달해 준 따뜻한 커피를 들고 응시한 창밖엔 마치 어제와는 다른 나라인 듯 풍경이 달라졌다. 과연 드넓은 평원과 포도밭이 끝없이 우리 뒤로 물러났고, 저 멀리엔 구름을 인 산들이 환상처럼 펼쳐졌다. 이미 도착했어야 하는 일정과 달리 아직 한참을 더 달려야 했으나, 한나절쯤의 연착이 별다른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과 마음은 장기 여행자들만의 특권! 바로 어제 효율 운운하던 스무살도, 오늘은 밤새 자는 동안 이 아까운 풍경이 지나가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연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땡볕 아래 마지막 콜라를 홀짝홀짝 아껴 마시듯, 창밖의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덩이를 음미하며 케이프타운으로 향하고 있었다. 쿠궁 쿠궁, 쿠궁 쿠궁, 설레는 심장 소리 같은 기차의 리듬에 다 함께 몸을 맡긴 채, 모두가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드는 여행의 이 순간을 못내 벅차하면서.  (abby)

* 차가운 시대 희망의 불을 밝혀온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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