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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로드트립> 12. 빅토리아 폭포
애비(Abby)와 장(Jang)-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으로 서른이 되던 해 여름에 함께 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 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리빙스턴, 위대한 탐험가의 빛과 그늘
▲ 국립공원 내의 리빙스턴 동상과 그 앞에 선 스무살 © Abby
밤 열 시가 넘은 늦은 밤, 리빙스턴(Livingstone)에 도착했다. 대륙의 허리께인 두 나라 잠비아(Zambia)와 짐바브웨(Zimbabwe) 사이의 이 작은 마을 근처에는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인 ‘빅토리아 폭포(Victoria Falls)’를 가까이에 두고 있다. 타자라 열차에서 만난 한국인 킴과 미니가 합세해서 우리 일행은 모두 다섯이 되었다. 각자 뒤통수를 가리는 높이의 백팩을 메고 사위가 괴괴한 아프리카 시골 도시의 밤길을 걷자니, 마치 탐험가 팀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리빙스턴’은 위대한 탐험가의 이름을 따라 붙인 지명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영국 출신의 선교사다. 1813년에 태어난 그는 1840년 선배 선교사를 따라 처음 아프리카에 발을 디뎠다. 그 후 30년간 아프리카 동남부를 종횡무진 탐험하고, 원주민의 문화를 연구하고, 기독교를 전파하고, 그 과정을 본국에 알렸다. 그는 끈기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었고, 특히 잔지바르 섬의 노예무역 실태에 충격을 받고 그 상황을 서구 사회에 낱낱이 고발해 노예무역을 종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리빙스턴에게는 ‘선구자’, ‘탐험가’,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그러나 찬란한 공만큼 과도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기독교화하는 데 소명을 두었고, ‘미개한 검은 대륙’에 보다 많은 유럽인이 여행하고 정착하여 우월한 문명을 전하는 것이 가장 적확한 해법이라 여겼다. 그가 그렇게 인식하지도 이르지도 않았으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서구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할 지리적 토대를 닦았다는 데 있었다. 실제로 리빙스턴의 탐험으로 길이 열린 지역은 이후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여행자가 마주하는 위대한 탐험가의 ‘과’ 중 하나는 발견의 결과들이다. 기도하는 자세로 생을 마감할 만큼 신심 깊었던 선교사도 서구인으로서의 정복적 관점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걸까. 억겁의 세월을 품고 거기 있어 온 자연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말하는 자신감과 대대로 그 풍광을 불러온 토착어가 있음에도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오만함이 나는 어쩐지 불편하다. 초월적인 존재 앞에 인생의 작음을 깨닫고 겸허히 마음을 다잡게 되는 그 순간,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신이 아니라 자신이거나 자신의 주군인 것도 아이러니다. 20세기 초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땅을 찾은 서구 선교사들이 깊은 산 속 봉우리에 감명받아 지리산 토끼봉을 ‘언더우드 피크’라고 일렀다면 어땠을까.
빅토리아 폭포도 마찬가지였다. 리빙스턴은 대륙의 중앙을 휘감아 인도양으로 향하는 ‘위대한 강’ 잠베지(Zambezi)를 따라 탐험하던 중, 저 앞에서 산 하나가 타들어 가는듯한 규모의 알 수 없는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장관을 발견하고 배를 멈췄다. 대륙이 쪼개진 듯 길게 파인 절벽으로 한순간 빨려든 강줄기가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그 장관은, 현지 사람들이 ‘천둥의 물보라(Mosi-oa-Tunya)’라고 부르며 경외하는 장엄한 폭포였다. 그는 이 절경을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소개하는 대신, 리빙스턴은 자신을 최초의 발견자로 칭하고 이 폭포를 자신의 주군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정하는 뜻에서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했다.
빅토리아 폭포를 향해
▲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국경 구실을 하는 다리. 이 다리 중앙에서 번지점프 사고가 일어났다.
며칠간 ‘천둥의 물보라’에 푹 젖기로 했다. 하루는 폭포의 옆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잠비아 쪽에서, 하루는 폭포를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짐바브웨 쪽에서 시간을 보내고, 하루는 폭포 근처 상류에서부터 래프팅하며 협곡을 따라 잠베지 강을 타고 내려간다. 잠비아와 짐바브웨를 잇는 다리에서 폭포를 바라보며 뛰는 번지점프도 근사한 레저라 했지만 몇 주 전 점퍼의 발목을 묶은 케이블이 끊어지는 사고가 난 후로 전면 중단되었다고 했다. 놀랍게도 사고의 당사자였던 이십 대 초반의 여성 점퍼는 발목이 묶인 채로 헤엄쳐 무사히 급류를 빠져나왔다. 온몸에 찰과상을 입기는 했으나 별다른 부상 없이 살아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다행한 소식이었다.
이튿날 아침, 잠비아의 모시 오아 툰야(Mosi-oa-Tunya) 국립공원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우기가 한창이라, 가이드북이 강조한 대로 겉옷 안에 수영복을 입고 우비를 챙겼다. 우기의 절정에는 꼭대기로부터 400미터 높이까지 수증기가 치솟고, 50킬로미터 밖에서도 뭉게뭉게 피어오른 물보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폭포의 낙차는 세계에서 가장 커 108미터에 이르고, 폭포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는 1700미터에 달한다. 아프리카의 길고 깊은 상처, 대륙의 그 틈으로부터 뇌성을 울리며 솟아오르는 압도적인 풍경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기념품 가게들을 지나 숲길을 따라 걸었다. 국립공원은 폭포 주변에 1.5km 정도의 산책로를 걸으며 몇 군데 전망대에서 폭포를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아직 우비를 입지는 않은 채였지만, 공원 초입인데도 조금씩 이슬비가 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채로운 것은 공원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우비를 입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폭우 맞은 생쥐처럼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예 폭포 아래에서 냉수마찰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이슬비가 점점 소나기의 양상을 띠기 시작해 우리도 곧 우비를 뒤집어써야 했다. 그리고 갇힌 짐승의 포효 소리 같기도 하고 천둥소리 같기도 한 우르르릉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폭포 가까이에 있는 산책로에 진입했을 때, 스콜처럼 굵고 강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잠비아 쪽에서 본 빅토리아 폭포의 풍경. 속옷까지 쫄딱 젖은 일행들 ©Abby
곧 말을 잊게 하는 위용의 폭포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일부조차 시야에 다 담을 수도 없는 웅장한 광경이었다. 요요히 흐르던 강에서 갑자기 낭떠러지를 만난 물줄기가 우아하게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다가 빠르게 바닥에 내리꽂히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코끼리 떼가 떨어진대도 가볍게 바스러뜨릴 것 같은 소용돌이는 다시 넓고 깊은 급류가 되어 빠르게 흘러갔다. 낙하 전과 후의 물은 같은 물일 텐데,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넓고 깊은 절벽이 막막하게 우리 앞에 펼쳐졌다. 사납고 거칠었으나, 빨려들듯이 한순간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할 만큼 매혹적인, 눈을 뗄 수 없이 위엄 있는 풍경이었다.
- 아이 야아. 너무하잖아, 이러지 마 나 삼십 달러나 냈단 말이야!
스무살이 투정하듯 던진 말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바로 눈 앞 폭포의 바닥을 보고야 말겠다고 울타리 아래로 고개를 숙였던 녀석이 포기를 선언하며 한 말이었다. 물이 가득 찬 세면대에서 막 고개를 든 사람처럼, 스무살의 얼굴에선 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니까 왜 덤볐어. 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나기는 생전 처음 본다, 그치?
장이 씨익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곳의 물에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수압 높은 샤워기를 사방에서 틀어놓은 듯 물세례가 쏟아졌다. 입구에서 만난 다른 여행객의 말이 맞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 우비를 안 입은 이, 일 달러짜리 우비를 입은 이, 군용 우비를 입은 이 모두 결국 우비 채로 수영장에 빠진 것처럼 푹 젖는 일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잠베지 강의 급류에 휩쓸려 간 것은
▲ 지옥의 래프팅을 끝낸 장, 애비, 스무살 ©Abby
다음 날의 래프팅은 순전히 스무살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 둘만 다닐 땐 어지간해선 백 달러를 훌쩍 넘는 이런 액티비티를 하지 않았던 데다, 순발력이고 근력이고 운동 신경 무디기가 나무늘보 수준인 나는 ‘돈 내고 하루 종일 하는 고생’은 질색이었다. 그러나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머릿수가 모자라는 상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구명조끼를 입고 고무보트 한쪽에 걸터앉아 노를 잡았다.
‘위대한 강’ 잠베지의 물길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기의 잠베지는 래프팅에서 말하는 급류의 단계인 레벨 1부터 레벨 6까지를 모두 넘나든다고 했다. 강이라 해도 천둥소리 내는 물보라가 만들어내는 급류에선 해일 같은 파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맞으며 깨달았다. 그토록 원하던 팔뚝의 말 근육이 절로 만들어질 정도로 노를 저었다. 얼마나 강을 내려왔을까, 잠시 잔잔해진 물길에 숨을 돌리며 저 앞의 레벨 4짜리 급류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가쁜 숨을 쉬던 스무살이 난데없이 보트 안쪽의 커다란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했어. 이게 뭐야? 여기 왜 있는 거지?
말릴 새도 없이 녀석이 버튼을 뽑았다. 그리고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열린 보트의 공기주입구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일이 터진 일이 초간, 유유히 머리 위를 맴돌며 까악까악 우는 까마귀를 제외한 인간 모두가 숨도 못 쉬고 멍청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탄 응급구조요원이 몸을 날려 간신히 다시 보트를 틀어막은 순간 급류가 보트를 덮쳤다.
공기가 빠져 한층 말랑말랑해진 보트는 더욱 격렬하게 물결에 반응했다. 대체 번지 점프하다 발이 묶인 채 이 물길 속으로 떨어졌다는 스물두 살 여인네는 어떻게 맨몸으로 살아나간 걸까. 그녀를 만나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나저나 래프팅이 끝나고 저 녀석을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곧 그 생각마저 잊었다. ‘일단 이 급류를 무사히 지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래프팅 끝난 후인 먼 미래의 복수심(?) 따위를 모두 녹여버렸다. 복수심만이 아니었다. 여행하며 때로 지나치게 많이 고이는 생각들까지도, 생각할 겨를 없이 몸을 움직인 몇 시간의 노 젓기로 강물에 씻긴 것일까. 래프팅을 마치고 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물론, 래프팅의 후유증인 몸살은 일주일짜리였지만.
어때 스무살, 호연지기가 좀 길러졌나?
저 아래 내려가서 폭포를 좀 맞아야 이십대를 여는 기운을 좀 받을 텐데, 그렇지 않아?
마지막 날 들른 짐바브웨 국립공원의 폭포를 떠나며 형 누나가 앞 다투어 던진 말에 스무살이 짐짓 이두박근을 모아 보였다. 시원하게 함께 웃었다.
▲ 가장 위험한 지점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스무살과 오른쪽 아래 24시간 무지개. ©Abby
폭포에 머문 사흘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여행의 스트레스가 한결 누그러졌다. 아프리카 여행은 힘겨운 파도타기의 연속이다. 그러나 때때로 펼쳐지는 이 대륙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진하게 우리 안에 스며 다음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눈이 시리도록 끝없이 펼쳐지는 삼백육십도 지평선과 돔처럼 열린 둥근 하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을 골고루 끌어안은 채 대지에 녹아드는 노을과 세상의 온갖 시름을 시원하게 씻어내는 저 천둥의 물보라. 아프리카의 자연을 마더 네이처(mother nature)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기차의 침대칸에 누워 다음 나라 짐바브웨의 깊숙한 곳으로 움직였다. 며칠간 폭포의 위용 속에 머문 탓인지, 밤새 기차 소리와 폭포 소리가 뒤섞여 내가 누운 이곳이 기차인지 다시 그 거대한 폭포 건너편인지 알 수 없이 몽롱한 꿈속을 헤맸다. 아,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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