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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오프로드, 고난의 댄싱버스
<애비와 장의 아프리카 로드트립>3. 케냐: 모얄레에서 나이로비로
애비(Abby)와 장(Jang)- 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졸업, 취직, 결혼 등 한국 사회에서 주어진 테두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되 서른이 되면 모든 것을 멈추고 여행을 떠나자, 연애시절 얘기했습니다. 만으로 서른이 되던 해 여름에 함께 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 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닥터를 불러줄까?”
▲ 케냐의 황량한 국경마을 모얄레. ©Abby
밤 9시, 다시 장의 체온을 쟀다. 38도 5부. 해열제가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터운 이불 밖으로 뜨끈뜨끈한 몸이 느껴졌다. 체온계를 탓하듯 탈탈 털어 눈금을 떨어뜨린 후 구급함에 넣었다. 이곳은 케냐의 국경지대 모얄레(Moyale), 믿을만한 의사가 머물 리 없는 곳이다. 여행의 초반 기억 하나가 튀어오른다. 장은 뎅기열에 걸렸었다. 그리고 너무 늦게 병원에 가는 바람에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불안으로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다시 열병은 아니겠지.
직전, 에티오피아 딜라(Dila)에서 국경 모얄레까지의 열 시간은 기억에 남을 만한 고행이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티켓을 끊지 않은 주제에 웃돈도 충분치 않은 승객을 중간에 태울 수 없다는 버스 차장에게 사정사정해 버스를 얻어 탔다. 대신 버스 통로에 찌그러진 석유통을 놓고 앉은 채였다. 그 와중에도 피로는 몰려와 통로에 박힌 쇠기둥을 잡고 조느라 혹이 나도록 머리를 박으며 열 시간을 달렸으니, 몸에 탈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아프면 좋을 텐데, 하는 공연한 생각이 든다. 같은 생각일 그의 마음이 더 커서 저렇게 내 몫까지 아픈 것은 아닐까 쓸데없이 마음이 먹먹하기까지 하다. 아픈 모양도 성격이라, 나라면 요란히 엄살 부리며 확 앓아치울 것을 그라서 말없이 오래 끙끙 앓는 것만 같다.
호텔 접수처에 내려가 사정을 설명하고 얼음을 얻을 수 있을지 물었다. 창구를 지키던 남자는 우물우물 음식을 씹던 입으로, “닥터를 불러줄까?” 했다. 차가운 물이나 얼음이면 충분하다고 답하니 아래층 레스토랑에 가 있으라며 귀찮은 듯 손짓을 했다. 장사를 한 적은 있는 걸까 싶도록 스산하게 불이 꺼진 레스토랑에 앉아 십 분을 기다려도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저 없이 냉동실 문을 열고 얼음 한 판을 통째로 뒤집어 와르르 수건에 쏟았다. 안 준다고 손 놓고 있을 여유가 없다.
얼음을 추슬러 수건을 여미는 순간 그가 나타났다. “뭐가 필요하다고?” 다시 성의 없이 묻는 그에게 태연히 얼음이나 찬 물을 부탁했다. 그는 저기, 하며 밥 먹기 전 손을 씻도록 마련된 구석의 세면대를 가리켰다. 수도를 돌리니 미지근한 물이 쿨럭이며 쏟아졌다. 얼음은 없는지 다시 묻자, 그는 대답 없이 건들건들 고개를 저었다. 그래, 거짓은 아니다. 얼음은 이미 내가 털었으니까.
이튿날 아침 다시 열을 쟀다. 체온계를 팔에 끼우고 기다리는 10분, 어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토록 간절할까. 결과는 37.5도, 잔뜩 움츠렸던 마음을 놓아도 좋은 숫자다. 그러나 바로 출발해야 할 지 하루 더 쉬며 컨디션을 회복해야 할 지 우리 둘 다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아침을 먹고 장이 좀 더 쉬는 사이 일단 버스 정류장에 나가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버스? 내일만 없는 게 아니라 모레도 없어!
매표소인 한 평 남짓한 슬레이트 점방 근처는 표를 사려는 사람들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뒤엉켜 아침부터 아수라장이었다. 붐비는 사람들을 헤치고 창구로 다가가 표를 파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나이로비로 가는 버스 몇 시예요?
지금, 저기 저 버스, 십오 분 뒤에 출발해요!
알아요, 하지만 내 친구가 아파요. 오늘은 버스가 더 없지요?
없어요.
내일 버스는 몇 시예요?
내일도 없어요.
네? 하지만 어제는 버스가 매일 있다고…
그러자, 옆에서 빙글거리며 웃던 호객꾼 하나가 소리쳤다. “없어! 내일만 없는 게 아니라 모레도 없어! 이 차를 놓치면 사흘 후에 버스가 있다구!”
띠잉. 대체 아프리카에선 뭘 믿어야 하는 걸까. 어제 비자를 발급하던 국경사무소 관리는 교통편을 묻는 우리에게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사실상 매일 버스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한 번 더 확인해 두자며 점방의 이 남자를 찾아왔을 때 그 역시 ‘차가 매일 있다’고 했었다. 어째서 날이 바뀌니 말도 바뀐 걸까.
그러나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이로비까지는 평균 스물 네 시간, 사흘 후의 버스를 타고 나흘 뒤 도착하면 한국에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나이로비로 날아오는 사촌 동생 ‘스무살’을 마중할 수 없게 된다. 혹여 장의 열이 다시 오를 경우에도 나이로비에서라면 병원이 있다. 버스 대신 남북을 오가며 가축과 물자를 나르는 트럭 ‘로리’를 잡아탈 수도 있겠으나, 이런 컨디션으로 생전 처음 높디높은 트럭 위에 매달려 비포장도로를 스물 네 시간 달리겠다는 건 불구나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버스 대신 남북을 오가며 가축과 물자를 나르는 트럭 '로리'. 덜컹이는 길에서 떨어지면 목숨을 잃는다 . ©Abby
차를 잡아 달라 부탁하곤 숨이 턱에 차게 달렸다. 방문을 벌컥 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배낭에 짐을 우겨넣고 멘 후 다시 뛰었다. 장은 잘 때 입은 옷 그대로인 채였다. 장이 버스에 배낭을 싣는 동안 다시 점방으로 뛰었다. 밀리는 사람 틈으로 간신히 얻은 티켓을 쥐고 버스에 다가가며 제발 뒷좌석만은 걸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버스는 트럭의 앞에 객차를 붙여 만든 형태로, 끌려가는 객차의 맨 뒤는 달구지 끝에 앉은 듯 내내 털털 통통 튈 게 분명했다. 버스에 오르며 고개를 들자 절반만 이루어진 기도가 나를 맞았다. 제일 뒤에서 두 번째 좌석에 앉은 장이 손을 흔든다. 다른 좌석이 없는지 차장에게 물었더니, 마지막 순간에 와 자리를 잡은 게 행운인 줄 알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래, 10분만 늦었어도 놓쳤을 차였다.
- 이 봐, 돈 줘, 사백 실링(약 5,500원)이야!
창 밖에서 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소리 질렀다. 장이 우리 짐을 지붕에 올린 남자라고 했다. 손에 쥐고 있던 이백실링을 창밖으로 건넸다. 그러나 그는 떠날 생각을 않는다.
- 안 돼, 너희 짐 싣느라 우리 셋이 일했다구. 배낭 하나에 이백 실링, 적어도 사백 실링은 내야 해. 더 줘. 모자라.
저 앞에서 한 백인 남자가 버스에 오르며, “이놈들아, 나는 벌써 삼백을 냈어. 뭘 더 내라는 거야!” 하고 분에 겨워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렇구나, 혼자서도 삼백을 냈구나. 그러나 그 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배낭 하나당 100실링, 1달러가 넘는 팁이면 충분했다. 장이 창밖을 향해 "정말 그것뿐이야 친구, 고마워!" 하고 외쳤다. 그는 부루퉁한 눈으로, “고마워? 그럼 돈을 줘어.” 하고 계속 징징댄다. 이런 실랑이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먹고 자고 싸는 일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물이 없다. 물이 없이 장거리 버스를 탈 수는 없다. 특히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먼 길에선 중간에 어디서 물을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물을 사러 나가면 밖의 남자에게 딱 잡힐 것 같았다. 어쩔 줄 모르는 우리를 보며 옆에 앉은 소년이 키득키득 웃는다. 우리도 실소한다. 장이 이름을 물었다. “하함지예요. 물 내가 사다줄까요?” 하기에, “고맙지만 괜찮아!” 하고 정면 돌파를 택했다. 차에서 내려 좌우 살피지 않은 채 하함지가 알려준 가게로 곧장 걸었다.
- 친구, 나 너한테 좋은 일했다?
이번엔 다른 청년 하나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가온다. “내가 네 가방이 떨어지지 않게 잘 묶었어.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좋은 일 해 주라.” 푸훗, 터지는 웃음을 참고 짧게 말했다. “네 친구한테 가서 받아. 내가 돈 벌써 줬어.” 그는 짐짓 억울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냐, 걔네는 옮겼고 나는 묶었어!” 잠시 서서 그를 보곤 “정말? 고마워!” 하고 잽싸게 버스에 올라탔다. 드디어 출발이다. 소문난 ‘지옥의 길’에서의 스물 네 시간.
무장 강도 출몰하는 위험천만 오프로드
▲ 끝없는 오프로드, 모얄레에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Nairobi)로 가는 길 © Abby
국경인 케냐 모얄레에서 수도 나이로비(Nairobi)까지 800km에 이르는 북부 지역은 점점 사막화되고 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이 죽음의 땅에 발붙이고 살아온 부족들이 택한 길은 ‘전쟁’이다. 가축과 물이 있는 땅을 뺏고 빼앗기며 벌이는 부족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소말리아 등 이웃한 내전 국으로부터 총기들이 불법으로 대량 반입된 후 양상은 더욱 심각해져, 2005년 한 마을에서 스무 명의 어린아이를 포함한 마흔 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상 몰살이었다.
그 후 엄격히 강화된 정부의 개입으로 내전이 잠잠해지자, 이번엔 무장 강도로 돌변한 사람들이 인적 드문 이 길을 지나는 차를 습격했다. 특히나 외국인은 좋은 표적이라고 했다. 나이로비에서 뵙기로 한 활동가는 메일에 ‘차가 정차하는 마르사빗과 이시올로에서는 절대 내리지 말고 차 안에 있으라’고 당부했다. 포장은커녕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아 위성사진으로 보아도 광활하게 험한 산과 사막 위를 손끝으로 스친 듯 희미한 선이 보일 뿐인 이 길은 여러 모로 악명 높은 오프로드였다.
출발 삼십 분 만에, 섣달 그믐날 잠을 이기지 못한 사람처럼 장의 눈썹이 하얗게 변했다. 나는 탄광에 들어갔다 나온 듯 얼굴이 온통 거메졌다. 버스는 구름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춤을 췄다. 쿵쾅쿵쾅 쿠당탕탕 격렬한 16비트 네버엔딩 디스코. 바퀴가 땅에 닿는 모든 순간이 비트다. 클럽 못지않은 파열음에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대화도 불가능한 이 댄싱 버스에서 예상대로 가장 신나는 플로어는 맨 뒤의 두 줄, 우리 둘을 포함한 자리였다. 사람들은 격렬한 점프 후에 일제히 두 외국인의 표정을 살폈다. 한국의 산길도 이보단 부드러울 상상 밖의 요동에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안 나온다. 모두 함께 낄낄 웃었다. 밖에서 보면 버스의 뒷부분은 언제나 절반쯤 떠 있으리라. 쉴 새 없이 튀어오르는 이 버스의 스태미나가 놀랍다. 정강이를, 무릎을, 팔을, 코를, 머리를 찧으며 쿠당. 쿠당. 쿵-쾅쾅.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검문을 위해 버스가 멈췄다. 나도 모르게 혀로 아랫니를 쓸었다. 내내 앙 물고 온 어금니가 얼얼했다. 위험 지역인 만큼 한 시간 간격으로 체크 포인트가 나타나고, 검문소마다 어김없이 무장 군인이 모든 승객의 신분증을 꼼꼼하게 검사했다. 오직 그 시간동안만 버스가 이 광기어린 댄스를 멈췄으니, 매번 여권을 꺼내야 하는 번거로운 검문이 차라리 고마웠다. 그리고 검문은 우리가 퉁쳐서 ‘아프리카’로 인식한 지역이 ‘케냐’와 ‘에티오피아’로 구분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케냐의 군인들은 나이로비로 넘어가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대체로 거칠게 다뤘다. 마치 우리나라 관리들이 외국인 노동자를 다루듯이.
그 사이 우리는 전열을 정비해야 했다. 엉덩이 붙일 방석도 등받이도 통으로 붙은 좁디좁은 좌석에 어깨를 꼭 붙이고 앉은 운명공동체 장과 열다섯 살 소년 하함지와 나. 셋이 나란히 일어나 삼분의 일은 복도 쪽으로 밀려 나간 시트를 쑥쑥 밀어 넣었다. 부러져 누워 버린 등받이도 다시 세웠다. 의자는 해체 상태라, 맨 안쪽의 가련한 내 엉덩이는 줄곧 절반쯤 허공에 떠 있고 등은 기댈 곳이 없었다.
나도 나지만 뒷자리의 남자는 수시로 앞에서 눕는 등받이 때문에 다리가 꼭 물려 버렸다. 허리를 숙여 발도 살폈다. 이 버스는 차체도 반 해체 상태, 구석에 발을 붙이면 버스가 점프할 때마다 벽과 바닥이 입을 열어 발날을 꼭 깨물고 다물었다. 어깨를 움직이고 목과 팔을 돌렸다. 그러다 하함지와 눈이 마주쳤다. “대체 이건…” 하다 “푸후-” 하고 웃음이 샜다. 하함지도 웃는다. “이 길, 처음이에요?” 소리쳤다. “당연하지!” 하니 녀석이 씨익 웃었다. “그냥 즐겨요!”
버스가 다시 춤춘다.
▲ 유리창이 통째로 날아간 버스 ©Abby
천장까지 튕겨지다 못한 맨 뒷좌석의 남자들이 복도에 한 줄로 주르륵 섰다. 양 팔을 들어 짐칸을 잡고 몸을 지탱하자, 플로어는 더욱 흥겨워졌다. 장이 옆에서 예! 오! 와오! 하고 리듬을 붙였다. 숫제 한 손은 앞좌석을 굳게 잡고 한 손은 들어 까딱였다. 그 모습에 박장대소하느라 몸을 놓쳤다. 그리고 쿵쾅! 버스가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웅덩이를 밟은 순간 머리가 앞뒤로 심하게 바운스되었다. 잠시 눈앞이 캄캄했다. 아, 이번 건 너무 아프다. 장도 말했다. "나 지금 꼬리뼈에 전기 제대로 올랐어."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우리들의 척추는 소중하니까.
순간, 하함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몸을 길게 빼더니 흥분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보며 "지금 봤어요?" 했다. "무슨 일이야?" 하니, "유리창이 창틀째 날아갔어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오.마이.갓. 셋 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 말았다. 그새 조금 노련해진 몸은 이번엔 박장대소 중에도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거친 여행길이 내어 준 아름다운 풍경들
다시 버스가 멈춰 섰다. 언제 출발했는지, 언제 퍼졌는지 모를 다른 버스를 발견한 탓이다. 전화하면 달려오는 보험 서비스는 달나라의 이야기고 찾아갈 정비소조차 있을 리 없는 이런 길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고장을 살펴야 한다.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왔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처음 본 이들끼리도 마치 오랜 친구처럼 금방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신기한 광경을 연출하곤 했다. 우리들도 버스의 그늘에 털퍼덕 주저앉아 몸을 풀었다. 곧 영어를 할 줄 아는 젊은 청년들과 히잡을 쓴 일곱 명의 여자 아이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여학생들은 나이로비에서 유학 중인 아디스아바바의 엘리트 여고생들로, 한 달에 두 번 집에 가기 위해 이 길을 오간다고 했다. 그 중 통역을 맡은 아미나(Amina)는 힘들지 않으냐는 물음에 ‘뒷좌석만 아니면 된다’는 답으로 모두 박장대소하게 했다. 누군가는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로 여기는 험한 길이, 누군가의 삶에서는 일상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여행을 몹시 궁금해 했다. 우리들은 아디스아바바와 나이로비 밖으로는 아무데도 가 본 적이 없어요. 하는 천진한 아이들의 표정에 대고 재미있게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해 주면 좋으련만, 생선 가시처럼 걸린 미안한 마음에 그렇구나, 하곤 좀처럼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꺄아아아아!
▲ 나이로비에서 유학 중인 여고생들 ©Abby
정적을 깬 것은 우리들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넘겨보던 미미(Mimi)와 바이얀(Bayan)이었다. “무슨 일이야?” 하고 바라보니 아이들이 “이것 봐! 이것 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카메라를 들여다 본 다른 아이들 또한 그 흥분에 동참했다. “이 사람을 만났어요? 어디서요?” 하며 우리에게 보인 사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와사의 슈퍼스타, 아비다.
“이 사람을… 아니?” 하는 장의 물음에 이구동성 “당연하죠!” 하는 답이 돌아왔다. “너무 좋아해요! 최고예요!” 하고 이어지는 찬사에 아연해진 것은 장과 나 뿐이었다. 우리는 둥그레진 눈으로 마주보고 웃었다. 그는 정말로, 슈퍼 스타였던 것일까.
끝없는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에야 버스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한 무리의 소들이 먼지 일으키며 들판을 가로질렀다.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흙집 앞의 사람들은 깡총깡총 뛰며 버스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작은 호숫가에 모여 섰던 황새 한 떼가 그림처럼 버스 위로 후드드득 날아올랐다.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이었다.
고난이 견딜만한 것은 끝이 있기 때문이니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고 또 지나 사위가 컴컴해진 후에도 버스는 저주에 걸린 빨간 구두의 소녀처럼 춤을 멈추지 못했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 열 네 시간을 달려왔으나 앞으로 열 두 시간을 더 달려야 한다. 누가 저 구두를 좀 벗겨 줄 수는 없을까.
그러던 한 순간 버스가 부드러워졌다. 사람들이 모두 우와오ㅡ 하고 함께 탄성을 질렀다. 마치 어느 CF에서 부드러운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문 군중이 동시에 내는 소리 같았다. 풋, 그 와중에 또 웃음이 난다. 이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추임새를 맞추는 걸까. 그나저나 우리 드디어 포장도로에 들어선 건……. 쿠쿵! 다시 머리가 앞뒤로 크게 꺾였다. 제길, 방심했다. 포장도로가 아니라 포장된 어느 다리를 건넜을 뿐이었다. 통증에 눈을 감았다. 부디 살아서 나이로비에 도착하기를.
그러나 고난이 견딜만한 것은 결국 끝이 있기 때문이리라. 버스 출발 스물일곱시간 뒤, 우리는 드디어 어느 기독교 활동가들의 나이로비 본부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하는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무리는 아니었다. 엔진오일을 온통 뒤집어쓴 듯한 비릿한 냄새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땟국이 진 몰골에 우리도 소파에 몸을 대기가 죄송할 지경이었다. 경미한 교통사고를 수차례 당한 것 같은 몸은 따뜻한 물이 닿자 긴장을 풀고 녹아버렸다. 둘 다 깊이, 오래 잠을 잤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부터 순간순간 몹시 거침없고 격렬했던 일흔 다섯 시간이 밤새 꿈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일어나 맞이한 아침 밥상엔 감격스럽게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이 놓여 있었다. 1월 1일, 새로운 해가 떴다. (Ab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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