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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나들이(26) 경제개발의 어두운 진실 들여다보기
언젠가 도서관에서 우리 동네의 어제와 오늘을 담은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고층 아파트만 즐비한 터라, 평평한 논밭뿐인 예전 풍경이 참으로 생소했다. 도시로 변모한 이곳은 ‘서울-수도권’이라는 거대도시권으로 편입된 상태다.
‘서울-수도권’에서 살아가는 인구는 이미 2천만을 넘어섰고, 하나의 ‘초거대도시’처럼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인구를 품고 초거대도시로 진입한 곳은 서울만이 아니라 도쿄, 멕시코시티, 뉴욕 등 여럿이다. 특히 봄베이, 자카르타, 다카 같은 아시아 거대도시들의 성장은 눈여겨 볼만하다. 도시는 몸집을 불리기 위해 시골 인구를 흡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접 도시들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농촌 속으로 파고들어 도시와 시골의 경계까지 흐려놓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늘어나는 도시인구의 대부분이 개발도상국 거대도시의 인구라고 한다. 도대체 제 3세계의 도시들은 왜 이토록 비대해지고 있는 걸까?
신자유주의 경제개발이 낳은 “성장 없는 도시화”
▲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 2007)> 표지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 2007)>에서 마이크 데이비스는 전 세계적인 도시화, 특히 개발도상국의 도시화를 산업화와 단절된 ‘성장 없는 도시화’로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성장은 빈곤과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8, 90년대에 제 3세계 도시들은 물가상승, 실업증가, 실질임금하락에 직면해 위기를 맞지만,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시인구가 늘어날수록 도시빈민의 수도 늘어나고, 오히려 도시빈곤의 확산속도가 도시성장의 속도를 추월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성장 없는 도시화’가 신자유주의적 경제개발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70년대 초, 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선진국이 경기침체에 빠지자 국제 상업은행들은 개발도상국에 대출을 늘려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70년대 말, 2차 석유파동으로 선진국이 다시 경기침체에 빠져 국제금리를 올리자 비효율적으로 경제를 운영해온 개발도상국은 외채 상환부담이 늘어난다.
80년대에 들어와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은 위기에 몰린 채무국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면서 구조조정정책(SAP)을 편다. 즉, 채무국이 경쟁적인 시장경제 기반을 마련해 세계경제에 통합될 수 있도록, 융자를 제공하고 감독해서 채무국의 경제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적 부문은 축소되고 국영기업이 민영화되어 도시 기반시설이 약화되었다. 중산층은 몰락하고 기존 도시인의 빈곤은 가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자유화, 금융 감독으로 인한 정부 보조금 삭감 등은 시골에서 더 이상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사람들을 도시로 떠밀어 도시빈민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빈곤과 불평등을 양산하는 거대도시
신자유주의 경제개발의 혜택은 모두의 것이 아니다. 일부의 부자들을 위해 다수가, 중산층까지도 빈민으로 전락하는 상황이니 확실히 불평등하다. 선진국의 도시에서는 빈민촌거주자가 6%에 불과하지만, 저개발국가의 빈민촌거주자는 무려 78.2%에 이르며, 전 세계 도시인구의 3분의 1이 빈민촌거주자라고 한다. 게다가 지구상의 빈민촌은 날로 커지고 있는 추세다. 빈민촌에 거주하지 않는 도시빈민의 존재도 감안한다면, 사실 도시주민의 절반이 빈민이며, 그 중 절반은 절대빈곤계층으로 생명이 위태롭다.
그럼에도 도시는 여전히 부자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공간이다. 정책도 조세제도도 교통체계도 부유층에게 유리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제 3세계의 감시자로 자청한 국제통화기금 역시 화장실과 같은 공공시설에 이용료를 부과하면서도 부자들의 과시적 재산에 대한 투명하고 정확한 세금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혹시 제 3세계 도시의 주택사업에 보조금이 제공된다 하더라도 그 혜택이 빈민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다. 도시 중산층과 부유층이 가로채기 때문이다.
급속도로 늘고 있는 도시빈민들은 살 집 하나 제대로 얻기 어렵다. 그들은 낡아빠진 집, 열악한 비공식 임대주택을 빌리거나 허름한 단칸 셋방, 간이숙소에 몸을 의지한다. 그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스쿼팅(매매권, 소유권 없이 토지를 불법적으로 점유하는 것)이나 노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깨끗한 물도, 하수도도, 화장실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온갖 해충, 질병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한다.
게다가 스쿼터들은 ‘습지, 경사면, 범람원, 오염된 산업지대’와 같이 쓸모없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땅을 점유해 살고 있다. 때문에 지진, 산사태와 같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화학공장이나 송유관의 폭발사고와 같은 인공재해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언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삶을 산다.
이렇게 생존하기도 힘든 빈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빈자와 부자의 불평등이 심각해지면 심각해질수록 부자들은 자기들만의 게토를 만들어간다. 캘리포니아의 ‘비버리힐스’, 홍콩의 ‘팜스프링’, 중구의 ‘롱비치’, 상파울루의 ‘알파빌’과 같은 폐쇄형 주택단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부자들의 생명, 신체, 재산을 지켜줄 ‘요새’이니, 아무나 출입할 수 없고, 주변은 경비가 삼엄하다. 심지어 전기담장을 설치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거대도시에서는 이처럼 차별적인 공간분리를 당연시하는 형편인데, 부자와 빈자의 게토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꾸리찌바 시의 노력은 예외적인 만큼 대단하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성공적인 구조조정의 사례로 제시하는, 멕시코나 칠레와 같은 국가들의 경제성장도 빈곤과 불평등을 '가린 것'에 불과하다. 중국, 인도도 도시 불평등을 감수하면서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룬다. 그러나 무한 경쟁에 기반을 둔 경제성장이 빈민, 그 중에서도 미성년자와 여성을 얼마나 극단적인 빈곤으로 내모는지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장기시장에 자신의 신장을 팔지 않으면 생계를 꾸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인도 여성들의 이야기, 충격적이지 않는가.
‘열악한’ 주거조차 불안정한 도시빈민의 삶
▲ 재개발로 강제철거 위기에 놓인 '작은 용산' 두리반. 거대자본의 힘 앞에서 세입자들은 너무도 쉽게 삶의 터전을 잃고 있다. © 박김형준
안타까운 것은 도시빈민에게는 그 열악한 주거조차 안정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늘 퇴거와 재정착 상태에 놓여 있는 단기 체류민”일 수밖에 없기에 도시빈민을 ‘유목민’이라 일컬을 만하다.
세계 곳곳에서 이들은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다양한 이유로 내쫓긴다. 강변산책로,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고속도로와 초호화단지를 건설하기 위해, 마천루와 쇼핑몰을 짓기 위해, 땅값이 비싼 곳을 개발하기 위해 강제로 내쫓긴다. 또 세계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 -예를 들어 국빈방문, 스포츠행사, 국제회의, 미녀선발대회 등-을 위한 도시 미관 정비는 강제철거의 또 다른 이유다. 우리나라 서울이 88년 올림픽행사를 위해 72만 명의 삶의 터전을 박탈한 일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강제철거 사례로 꼽힌다.
강제철거로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땅주인, 주택소유자, 외국인 투자자, 자가용 통근자 등 중·상류계층이다. 스쿼터, 노숙자, 가난한 세입자들은 사적 이익 실현에 방해가 된다고 ‘인간방해물’로, 감시나 통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정치적 불순분자, 범죄세력으로 간주된다. 빈민들을 제거하기 위해 경찰, 군대와 같은 공권력이 동원되며, ‘전쟁’이라는 단어도 공공연히 사용된다. 심지어 ‘방화’까지도 수단으로 동원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온갖 극단적인 처방을 동원하더라도, 도시가 끊임없이 빈곤을 양산하는 한, 그것을 가릴 수는 없다. 도시빈민은 경제개발의 그림자, 어두운 진실일 뿐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부자와 빈자의 골을 파고 다수의 사람을 가난으로 내모는 도시화는 살만 한 도시, 지속가능한 도시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신자유주의의 경제개발을 지향하는 세계화에 휩쓸려가는 한, 지속불가능한 거대도시화 이외에 다른 선택은 불가능할 것 같다. 우리 도시가 아바나나 꾸리찌바와 같은 지속가능한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세계화의 흐름 속으로 너무 깊숙이 빨려 들어간 것은 아닌지, 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거대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파트만 가득한 도시가 너무나 갑갑하다. (일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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