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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6) *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코스타리카의 우리 마을 광장에서는 가끔 노래마당이 열리곤 했습니다. 심사나 경쟁은 없이 미리 참가신청만 하면 누구나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청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직업가수들이 와서 ‘베사메무초’ 같이 잘 알려진 대중가요를 부르는 날도, 댄서들이 와서 피아졸라의 음악에 맞춰 탱고를 추는 날도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 학생 중 누구는 코스타리카를 떠나면서 여기에 나와 마지막 추억을 만들었고, 누구는 생일을 맞이하여 여기에서 모두 함께 부르는 생일축하노래로 너무나 큰 깜짝 축하를 받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열린 음악회’에 간 날에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까지 불며 열창하는 이 노래를 듣자 라틴 아메리카 에 온 실감이 절로 났습니다.
 
메르세데스 소사, <단지 신에게 청합니다>

▲ 우측 사진: 메르세데스 소사     © 출처: 위키피디아 
 
이 노래에 혼을 불어 넣어 세계에 알린 장본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1935~2009), 그녀는 아르헨티나 출신입니다.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매번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소사의 삶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 우석균, ‘메르세데스 소사, 떠나간 인류의 목소리’
http://greenbee.co.kr/blog/884)
 
‘Sólo le pido a Dios(단지 신에게 청합니다)’, 소사가 부른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지 신에게 청합니다
제가 고통에 둔감해지지 않게 하소서
내 할일을 다하지 못한 채 홀로 공허하게 죽음이 나를 찾지 않게 하소서
 
단지 신에게 청합니다
제가 불의에 둔감해지지 않게 하소서
발톱이 나의 운명을 할퀴고, 또 다른 뺨마저 할퀴지는 말게 하소서
 
단지 신에게 청합니다
제가 전쟁에 둔감해지지 않게 하소서
전쟁은 거대한 괴물이고 강력한 장벽이며 가난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짓밟습니다
 
단지 신에게 청합니다
제가 거짓에 둔감해지지 않게 하소서
한 명의 배신자가 우리들 모두보다 강하더라도
우리들이 그에 쉽게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단지 신에게 청합니다
제가 미래에 둔감해지지 않게 하소서
절망에 빠진 이들과 추방된 이들이
새로운 땅을 일구며 살 수 있게 하소서
 
*한국어 가사 출처:
http://cafe.naver.com/yoonsenae
 
아르헨티나, 다시는 절대로 안 된다
 
▲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실종자들  © photo by Pepe Robles  출처: 위키피디아
 

 
아르헨티나는 대량 실종과 살인, 고문 등 군부독재의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현대사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나라들도 많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일은 그 중에서도 지독히 끔찍한 편에 속합니다.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군부통치기간에 수많은 반대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강제실종’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인권단체들의 추산에 따르면 희생자는 30,000명에 달합니다).
 
사라진 사람들 중의 일부는 엄청난 고문의 흔적이 남은 시체로 돌아왔지만 산 채로 바다에 버려진 경우에는 유해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사라졌을 뿐이다.” 기자회견에서 쿠데타의 주범 비델라 장군은 단지 이렇게만 말했다고 합니다.
 
사라진 사람들 중에는 임신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그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은 팔려가서 입양되어 자라다가 나중에야 진실을 알게 되어 진짜 가족을 찾아 나서고 양부모를 고발하기도 합니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나서 설립된 실종진상조사위원회는 1984년에  신원이 확인된 실종자 9,000명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Nunca Más(다시는 절대로 안 된다)’라는 제목의 이 조사보고서는 50,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과거의 독재자와 살인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알리시아 코싸메, <물 아래의 발걸음>
 
아르헨티나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인상을 얻을 수 있었던 만남의 기회가 코스타리카에서 생겼습니다.
 
우리 학교에 아르헨티나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같은 과가 아니고 같은 수업을 듣거나 모임에서 만날 기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얼굴과 이름만 알 뿐이라서 아는 사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열린 한 간담회에서 그 아르헨티나 친구와 함께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간담회의 주인공과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그녀의 엄마가 초청 연사로 온 것입니다.
 
▲ 알리시아 코싸메     © 출처: 위키피디아 

 
그날의 연사인 알리시아 코싸메(Alicia Kozameh, 1953~)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현재는 미국에서 거주하며 대학에서 강의하고 소설을 쓰는 작가입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로사리오에서 태어났습니다. 로사리오는 혁명가 체 게바라의 고향으로 실제 알리시아의 가족은 체의 가족과 친분이 있다고 합니다.
 
22세였던 1975년에 알리시아는 반정부 좌익 학생운동조직에 관여한 점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어 3년 반 가량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1980년에 망명길에 올라 미국과 멕시코에서 지내다가, 아르헨티나에서 군부독재가 끝나고 선거로 선출된 정부가 수립된 후인 1984년에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망명 시절부터 작품을 썼지만 고국으로 돌아와 감옥체험을 소재로 하여 198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Pasos bajo el agua(물 아래의 발걸음)’으로 알리시아는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 소설은 영어와 독일어로도 번역되었으며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됩니다.
 
이 작품의 출간은 알리시아를 작가로 인정받게 해주었지만, 결국 다시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만듭니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경찰의 위력이 거셌는지 이 소설로 인해 협박을 받게 된 그녀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결국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위키피디아에 나온 내용인데 협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작품 활동 외에도 알리시아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같은 국제 인권단체의 초청으로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과거 아르헨티나 군부독재가 저지른 인권탄압의 실상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활동을 펼쳐왔다고 합니다.
 
균열의 순간과 내전의 추억
  
▲ 불법고문과 감금이 이뤄지던 이 경찰서 건물은 현재 추모센터가 되었다. 로사리오, 아르헨티나, 2006     ©photo by Pablo D. Flores  출처: 위키피디아 
 

 
그날의 간담회에서도 그녀는 본인이 감옥에서 겪은 체험에 대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세계 최초로 해낸 것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의 예를 들자면 아르헨티나는 세계 최초로 전기를 고문에 이용한 국가입니다.”
 
주제는 무거웠으나 분위기는 친밀한 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딸이 그 자리에서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엄마와 학우들이 대화하는 광경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면서도 알리시아는 이 말로써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이사벨 아옌데보다 낫다는 말도 들었지요.”칠레 출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여성 작가 이사벨 아옌데(Isabel Allende, 1942~) 역시 현재는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툭, 하고 갈라지듯 균열이 발생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알리시아, 당신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적 좌파운동에 참여했었는데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군요.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알리시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습니다. 자연히 간담회장에는 일순간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정작 알리시아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실은 거의 침묵에 가까웠습니다. 큰 눈이 더욱 커지던 그 표정만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학생들 중 일부는 뭣 하러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 질문한 친구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그 질문을 던진 친구는 구 유고 슬라비아 연방에 속했다가 독립한 크로아티아 출신입니다. 1990년대에 유고 슬라비아가 분리되어 해체되는 과정에서 민족 간의 대립과 반목으로 인한 내전이 일어나‘인종 청소’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집단학살과 강간이 자행되어 국제 사회를 경악시킨 바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릅니다. 당연하다는 듯 외국인 학생들끼리 으레 묻는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너 어디에서 왔니(where are you from)?” “크로아티아 출신이야(I am from Croatia).” 마치 더 쏟아질 질문을 미리 봉쇄라도 하듯 그는 시선을 피하며“차차 서로 더 소개하게 되겠지”라는 말만 덧붙이고는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 자라기는 했지만 내전이 일어나자 조국을 떠나 일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후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코스타리카로 공부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수업시간이면 항상 그는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민족국가는 시대착오적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나는 크로아티아 출신일 뿐 크로아티아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말라(I am from Croatia, but I am not a Croatian)”고 말하곤 했습니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그의 이런 거리두기는 ‘내전의 추억’ -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된, 관념적이고 이념적인 비판의식을 넘어서는 지극히 생생한 감각의 결과인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의 말대로 차차 알게 되면서 첫 만남 때 왜 더 이상의 대화를 피했는지 이해가 좀 되었습니다. 그는 국적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어 천편일률적으로 이어지곤 하는 소속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례적인 문답이 달갑지 않았던 게 틀림없었습니다.
 
무심코 던지곤 하던 국가적 정체성과 공동체에 대한 질문 - “너 어디에서 왔니” 즉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이란 질문과 “너희 나라는 어떤 나라니”와 같은 질문이 경우에 따라서는 질문 받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고 심하게는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그가 알리시아에게 던진 질문은 원래 사회주의 연방국가에 속했던 고국을 떠나 자본주의의 대표 격인 미국에서 살게 된 자신의 혼란과 갈등을 반영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아요.”
 
간담회가 끝나고 알리시아는 우리 학생들과 함께 화기애애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알리시아, 행복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누군가가 그녀를 위로하듯 이 말을 던졌습니다.
 
알리시아는 그 말을 한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민감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행복하진 않아요.” 이 말이야말로 아까 크로아티아 친구가 한 그 질문에 대한 진짜 답변처럼 들렸습니다.  (공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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