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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4) *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중남미의 ‘낙태’- 현실과 전망⑤
 
“'생명’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믿지만, 그것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부인하고 나아가 억압하는 기제로 쓰인다면 이에 찬성할 수는 없지. 근데 사실 입장을 딱 잘라 말하기가 참 어렵다. 생명을 보호한다며 임신중절에는 그리 반대하지만 다른 뭇 생명과 생태계의 파괴에는 둔감한 쪽도 불편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만을 주장해 생명을 등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쪽도 불편하거든.”
 
성당에 자주 나가지는 않지만 가톨릭 신자에 가까운 한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교가 있건 아니건 간에 임신중절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으리라 추측됩니다.
 
임신중절이 일단 수태된 ‘생명’을 제거하는 일이라면 이는 살인과 마찬가지 아니냐는 질문, 이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 질문의 의미와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판례가 마침 이미 오래 전에 나와 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
 
1973년 1월 22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중대한 판결을 했습니다. 텍사스 주 달라스 카운티에 사는 여성 제인 로(가명)가 변호인 사라 웨딩턴과 린다 커피를 통해 달라스 카운티 법무장관 헨리 웨이드를 상대로 제기한 이른바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이 사건 판결문에 나타난 사실관계에 따르면, 임신한 비혼여성 로는 병원에서 안전하게 자격 있는 의사로부터 인공임신중절시술을 받고자 했으나, 텍사스 주 법이 요구하는 임신중절 허용 요건(“임신 지속이 산모의 생명을 위협할 경우”)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받아 합법적으로 임신중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로는 텍사스 주 법이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사생활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자신과 유사한 상황에 처한 모든 다른 여성들을 위해 텍사스 주 형법 상의 낙태죄는 위헌이라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진 설명: 1973년 1월 '로 대 웨이드'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  © 출처: Rube Reality  (rubereality.com)]

낙태죄를 제정한 이유
 
이 사건을 판결하기 위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낙태죄의 연혁을 살펴봅니다. 서양에서 임신중절 규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서 19세기 후반에야 임신중절을 형벌로 처벌하기 시작하는데, 낙태죄 제정의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임신중절 규제는 ‘부정한’ 성행위를 규제하려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고, 둘째 낙태죄가  제정되던 당시에는  임신중절시술이 의학적으로 여성들에게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여성의 건강 보호를 위해 처벌 규정을 마련했으며, 셋째 출생 이전의 생명에 대한 국가의 보호 법익이 발생했기 때문에 낙태죄가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와 관련하여 낙태죄의 정당화를 위하여 일부 논자는 인간의 생명은 임신 되자마자 성립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출생 이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꼭 인간의 생명이 임신 되는 즉시 성립한다는 이론을 택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생명은 언제 성립하는가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15세기 © 출처: 위키피디아

생명의 성립 시점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실용적이고 조심스런 태도로 접근합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필요는 없다. 의학, 철학, 신학이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사법부가 해답을 내놓을 위치에 있지 못하다.”

 
확고한 해답을 추구하는 대신 법원은 생명의 성립 시점에 관한 이론과 역사를 검토합니다.
 
판결문의 설명에 따르면, 19세기에 들어서서 임신이 이루어지는 즉시 생명이 성립한다는 입장이  가톨릭 교회의 공식 견해로  확립되기 전까지는 출생이 되어야 비로소 생명이 시작되는 것으로 봐서, 임신중절은 개인과 가족의 양심에 맡겨야 할 문제라는 견해가 오랜 기간 동안 우세했다고 합니다.
 
원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임신 과정에서 생명이 발달하는 단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별하는 입장이, 유럽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내내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지지를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는 즉시 ‘영혼’이 주입되므로 그 즉시 생명이 성립한다고 여기는 입장이 힘을 얻어, 현재의 가톨릭 교회의 공식 견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임신 즉시 생명이 성립한다는 입장에는 난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배아에 관한 새로운 데이터는 임신이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고, 사후피임약, 배아이식, 인공수정, 인공자궁 같은 새로운 의학적 기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법원은 일반적으로 법이 출생 전의 태아에게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정도 언급합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우리는 생명에 대한 한 가지 이론을 채택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잠재적인 생명’의 보호와 생존가능성
 
생명이 임신 즉시 성립한다는 이론을 거부한 미국 연방대법원은 출생 이전의 생명을 생명 일반과 구별하여 “잠재적인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국가가 여성의 임신에 개입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이해관계에 대해 논의합니다.
 
법원은 “임신한 여성의 건강”과 “잠재적인 인간 생명의 보호”에 대해 국가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는 임신한 여성의 사생활에 개입하고 그 결과 여성의 권리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임신 지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자신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임신하고 있는 잠재적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제한됩니다.
 
“국가는 임신한 여성의 건강을 보전하고 보호하는 데에 중요하고 정당한 이해관계가 있다. 또한 국가는 잠재적인 인간 생명을 보호하는 데에도 중요하고 정당한 이해관계가 있다. 이 이해 관계들은 분리되어 있는 개별적인 것들로서 여성의 출산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더욱 본격화되고 어느 시점이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서, 법원은 여성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임신 전체 기간 중 삼분의 일이 지난 기간까지 즉 첫 삼분기가 끝날 때를 제시합니다. 이 시점까지는 인공임신중절로 인한 사망률이 정상출산으로 인한 사망률보다 낮기 때문이라고 의학적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잠재적 생명 보호에 관하여는 태아의 “생존가능성”이 기준으로 제시됩니다. 이 때 생존가능성이란, 엄마의 자궁 밖에서 실질적으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인공적인 도움을 받는 경우도 포함)을 의미합니다. 대개 약 임신 7개월(28주째)부터 태아의 생존가능성이 발생한다고 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더 일찍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임신시기에 따라 차별화된 임신중절 규제
 
(1) 대략적으로 임신의 첫 삼분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임신중절의 결정과 실행은 임신한 여성을 담당하는 의사의 의학적인 결정에 맡겨야 한다.

 
(2) 임신의 첫 삼분기가 끝난 후에는, 산모의 건강에 대한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국가는 적절한 방식으로 임신중절절차를 규제할 수 있다.
 
(3) 생존가능성이 발생한 후부터는 국가는 잠재적인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의 보호를 위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임신중절을 규제하고 심지어 금지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은 위와 같이 논의를 종합하였습니다. 그리고 텍사스 주의 법은 임신 시기를 구분하지 않고 임신중절 자체를 금지하고서 산모의 생명을 구한다는 단 한 가지 합법화 사유만을 정하고 있으므로, 이는 헌법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은 태아의 생존가능성이 발생하기 전에는 원칙적으로 여성의 임신중절은 금지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판결이 현실적인 위력을 가지는 미국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임신중절 합법화 지지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 판결문을 쓴 해리 블랙먼 판사는 병원 변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어 의학지식이 풍부했습니다. 또, 이 사건 외에도 차별철폐조처를 지지하고 동성애도 사생활의 권리에 포함된다는 내용의 의견들을 내는 등 진보적 성향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얼마 전 우리 나라의 헌법재판소는 인간배아를 연구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생명윤리법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 판결에서 “현재 자연과학적 인식 수준에서 독립된 인간과 배아 간의 개체적 연속성을 확정하기 어렵고, 현 과학기술 수준에서는 모태에 수용될 때 독립적 인간 성장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 또 착상 전 배아가 인간으로 인식된다는 사회적 승인도 존재한다 보기 어렵다”며 배아의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임신중절에 관해 판단하게 된다면 우리 헌법재판소가 과연 어떤 판결을 내릴지 궁금해집니다.
 
▲사진 설명: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 기념행사, 미국 워싱턴 디씨. 2007 © 출처: National Abortion Federation (prochoice.org)

“임신의 공포와 임신중절의 죄책감”
 

프리다 칼로 "헨리 포드 병원" 1932 © 출처: Frida Kahlo Foundation (frida-kahlo-foundation.org)

“그런데 그게 내 문제가 되었던 때, 전에 남자친구가 있을 때를 떠올리면 임신의 '공포'는 정말 대단했던 것 같아. 당시에 난 임신이 되면 중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 후의 죄책감을 평생 어찌 감당할 지 생각도 하기 싫었거든.”

 
친구는 또한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아마 많은 여성들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죄책감’이란 단어의 의미는 엄밀히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한 여성이 자신이 임신한 ‘잠재적 생명’을 낳을 수 없게 되어 개인적으로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일과, 사회가 그녀를 ‘죄인’으로 호명하기 때문에 형벌과 죄책감이 주어지는 일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년 봄 코스타리카에서 부활절 행렬과 미사를 구경하던 때를 다시 떠올려봅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바로 그 순간 코스타리카를 포함하여 많은 중남미 여성들이 성당의 제단 앞에 앉아 임신중절의 ‘죄’를 고해하고 용서를 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보면 이제 와서 마음 한 구석이 싸해집니다.
 
그리고 이 달 초 우리 나라의 일간지에서 “낙태, 유산으로 인한 혼령”을 달래는 재를 절에서 지낸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아마 한국의 절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죄업’을 멸해 달라고 기도 드렸을 것입니다.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죄를 사해 달라고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간구하는 것도 개인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합니다. 개인의 삶의 방식은 제각각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가 있기에 죄인이 생기고 죄책감이 생깁니다. 죄가 없으면 죄인도 죄책감도 없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임신을 하게 되지만 다 낳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전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 사회가 수많은 여성들을 계속 죄인으로 만든다면 그 사회가 과연 어떤 사회인지 그것부터 의심하십시오. 죄인이라고 불러도 대답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 중남미 ‘낙태’ 연재 마칩니다.) www.ildaro.com
 

[낙태 관련 기사]  만약 남성이 임신한다면: 브라질  |  로시타의 임신과 파문: 코스타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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