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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9) 버자이너 다이얼로그 
 
*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코스타리카로 떠나기 전, 멀리 오래 떠나 있는 만큼 필요한 몇 가지 건강검진과 예방 접종을 하면서 자궁경부암 검사도 받았습니다. 큰 이상은 없었지만 6개월 후에 다시 검사를 받는 게 좋겠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6개월 후라면 코스타리카에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건데, 외국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받을 생각을 하니 신경이 쓰였습니다. 산부인과 진료라는 것 자체가 사실 외국 아니라 국내에서 받아도 그다지 맘 편히 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코스타리카의 한국인 여성 산부인과 의사
 

▲ 코스타리카의 산부인과에 걸려있던 살바도르 달리의 <창가에 선 여인> (1925) 

코스타리카에 도착하고 나서 6개월이 흐르고 재검사를 받아야 할 시기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냥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까지 검사를 미룰까 하다가 결국 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좀 나가니 제법 큰 종합병원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 산부인과 의사 명단을 쭉 훑어보고 있는데, 앗, "KIM"이란 성이 보입니다. 이름도 분명 한국 여성의 이름입니다. 직원에게 그 이름을 가리키며 한국인이냐고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입니다. 이 머나먼 나라에 와서 한국인 여성 산부인과 의사를 우연히 찾게 되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의자에 앉아 있던 그분이 뜻하지 않게 한국 말 인사를 들었다는 듯이 순간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이윽고 “네, 안녕하세요?”라는 우리 말 인사로 저를 맞이합니다.
 
‘거기’를 처음 본 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검사를 받고 나서 일주일 후에 결과가 나왔는데, 자궁경부에 이상 세포가 발견되어 간단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냉동 요법으로 이상 세포를 얼려 버리는 치료라고 합니다. “간단히 치료할 수 있으니 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치료를 받기 위해 시술대로 올라갑니다. 좁은 어깨에 살짝 닿을 듯 말 듯, 검은 단발머리를 한 그녀가 제 자궁경부의 이상세포를 냉동시킬 준비를 합니다. 언제 코스타리카로 왔느냐는 질문을 던지니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이민 왔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녀의 등 뒤에는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 그림 속에서 창가에 선 한 여인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서, 치료받는 동안 저는 그 여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자, 다 끝났어요. 치료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실래요?”그녀가 거울을 가지고 옵니다. 다소 민망해져서 바로 거울이 보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입술을 조금 움직이며 약간 웃고는 그녀는 제가 거울을 볼 때까지 기다립니다. “거기 다른 데에 비해 하얀 데가 보이죠? 치료로 얼린 부분이에요.”
 
그날 처음으로 저는 거울로 제 자신의 ‘거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코스타리카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보다
 
▲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포스터(히로시마, 일본, 2008) © Nicky Fernandes     

<버자이너 모놀로그(원제: The Vagina Monologues)>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되어 꽤 알려져 있는 연극이라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연극을 볼 기회는 코스타리카에서 생겼습니다. 학교 친구들이 특별공연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학교에서 보는 친구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저를 공연장으로 이끌었습니다.
 
다른 많은 친구들도 설레는 표정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들 곱게 차려입고 말입니다. 저도 제가 갖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색깔이 밝고 예뻐 보이는 것에 손이 갔습니다. 화사해진 학교에는 축제의 활기 같은 것이 흘러넘칩니다.
 
그날의 공연장인 학교 중앙 대회의실 입구에는 특별히 제작한 초콜릿도 팔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입술 같지만 바로 여성의 ‘거기’모양으로 만든 ‘버자이너 초콜릿’입니다. 저도 하나 사서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조금씩 혀로 핥아 녹여 먹습니다.
 
출연진들이 전부 빨강색과 검정색으로 차려입고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 일인극으로 시작한 이 연극은 나중에는 삼인극으로 공연했다는데, 친구들은 여러 명이 대거 등장하는 형식으로 공연할 모양입니다.
 
그녀들의 ‘버자이너’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자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그녀들이 전부 무대에 올라갑니다.
 
출연자들의 다수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백인 친구들입니다. 드문드문 아프리카 지역 친구들이 보이고 아시아 지역 친구는 단 한 명, 중동 출신은 아무도 안 보입니다.
케냐에서 온 K가 보입니다. 평소엔 늘 진중한 태도로 묵묵히 공부에 열중하던 그녀가 무대 위에서 쑥스러운 미소를 짓자 객석의 우리들은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합니다.
 
S도 보입니다. 수단에서 온 그녀는 제가 사는 집 바로 앞집에서 살다가 이사 간 친구인데, 고양이 같은 눈에는 호기심이 늘 반짝반짝, 항상 활달하고 장난기가 넘쳐흐릅니다. 언젠가는 학교에서 물 뿌리는 장난을 치다가 물 맞은 친구가 정색을 하고 화를 낼 뻔도 했답니다.
 
▲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특별공연한 학교 친구들.
   

가자 침공 항의 시위에 참가하러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가는 길에 거리에서 아이처럼 딸기를 따 먹다 주인으로부터 한 소리 들은 E도 저기에 있습니다. 혼자 잘 다니는 외롭지만 도도한 길고양이 같은 그녀는 에티오피아 출신입니다.

 
브라질에서 온 B도 보입니다.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큰 그녀 앞에서 언젠가 브라질 축구보다 아르헨티나 축구가 좋다고 했다가 표정이 싹 변해서 살짝 식겁한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 중 유일한 아시아 사람인 J는 일본의 오키나와 출신입니다. 그녀에게“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너희 천황이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처벌받았어야 된다고 생각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괜찮아, 상관없어, 난 오키나와 사람이야, 우리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이라는 국가를 좋아하지 않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녀들은 각자 자국의 언어로 ‘버자이너’를 외칩니다. 빙글빙글 돌다가 제각기 그녀들은 수줍게, 즐겁게, 신나게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보지 또는 조개  
 
누군가 물어 옵니다. “한국말로 ‘버자이너’를 뭐라고 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가 바로 대답을 해 주자 근처에 있던 다른 한국인 친구가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달리 말합니다.
 
“아휴,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그렇지, ‘조개’, ‘조개’라고 해.”물어본 친구는 누구 말이 맞는지 의아한 듯 눈을 둥그렇게 뜹니다.
 
“내 보지는 조개, 튤립꽃, 그리고 운명. 내가 떠나기 시작할 때 나는 도착하지. 내 보지, 나의 보지, 나 자신.”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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