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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20) 버자이너 다이얼로그②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된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들어가는 말’을 보면 지은이 이브 엔슬러(Eve Ensler, 미국, 1953~)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린 소녀시절 강간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 보지에 행해지는 모든 것을 경험해보았지만 나는 내가 강간당한 그 이후 결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내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이브의 ‘버자이너 모놀로그’  
 

▲ 200명이 넘는 다양한 여성들을 인터뷰해 쓴 희곡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자 이브 엔슬러.     ©  Scott Gries 
 
‘옮긴이의 말’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이브는 어린 시절 친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벨트로 때리고 구타하는 등의 폭력도 당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늘상 학대를 당하면 누구나 자기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고 말한 이브는 알코올중독자였고, 결혼과 이혼을 겪습니다.
 
한편 연극에 몸담으며 희곡을 쓰고 사회운동단체에 참여하여 계속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던 이브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성공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 연극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한 친구와 폐경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그 친구가 자신의 성기에 대해서 얼마나 끔찍한 증오와 경멸, 혐오감을 갖고 얘기하는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후 다른 여성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본 이브는 “처음에는 모두 불편해하고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못 견디는 것을 발견했다”고 술회합니다.
 
그리하여 200명이 넘는 다양한 여성들을 인터뷰한 결과를 토대로 창작한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다양한‘버자이너’ 이야기를 담은 독백들로 구성되어 있고, 징검다리가 놓이듯 사이마다 진행발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늘 재앙을 불러일으키던 그곳”

 
▲ 아동학대 반대 캠페인 포스터


코스타리카에서 본 친구들의 공연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일본인 아니, ‘오키나와 사람’ J가 연기한 미국 남부지방 출신 흑인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성기를 ‘짬지(원작의 미국 속어‘coochi snorcher'를 우리 말 역자는 이렇게 옮겼습니다)’라고 부르면서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까지의 기억을 풀어놓습니다.
 
만지지 말라고 소리치던 엄마의 모습, 열 살 난 남자아이가 주먹으로 다리 사이를 쳤던 일, 침대 위에서 뛰면서 놀다가 침대 모서리에 가랑이를 크게 다쳐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꿰맨 경험, 아버지의 친구가 성폭행하려 하자 아버지가 총질을 하여 피범벅이 되었던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기억들의 결과, 이 여성에게 ‘거기’는 “아주 나쁜 곳”이고 “아프고 잔소리를 불러일으키고, 주먹으로 맞고, 침범당하고, 피를 부르는 불행의 장소”일 뿐입니다.
 
“난 내 다리 사이로 고속도로를 상상하곤 했어요. 난 간다, 이 재앙지대로부터 멀리 자유롭게 떠난다고요.”
 
검은 스카프를 드리운 J는 무대 위를 오가며 손을 내밀고 어깨를 움찔거립니다.  작은 체구를 지닌 그녀가 연기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 여자아이가 영문도 알 수 없이 뜻하지 않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소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윽고 기억은 가장 내밀한 장면을 불러냅니다. 이웃에 사는 스물네 살 멋쟁이 언니는 열여섯 살 그녀에게 키스하고 집에 불러 보드카를 마시게 하고는 예쁜 잠옷을 입혀 그녀가 몰랐던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언니는 내게 모든 걸 다 해줬어요. 특히 내 짬지, 그전에는 늘 재앙을 불러일으키던 그곳에, 그런데 그곳이 와아, 난 뜨거워지고 흥분됐어요. 매혹적인 언니는 나의 짬지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줬어요. 언니는 내가 언니 앞에서 기쁨에 젖도록 했고 내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을 가르쳐주었어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구원”  
 
▲ 우리나라에 번역된 <버자이너 모놀로그>(북하우스, 2009)


열여섯 살에 겪은 특별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 부분은 원래 오리지널 공연에서는 ‘열세 살’이었다가 미성년자에게 술을 먹이고 성행위하는 내용으로 논란이 되자 나이를 높여 고친 것이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대사가 심한 비판을 받아 수정되었다고 하는데 고치기 전의 원래 대사는 이랬다고 합니다.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건 강간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지요. 나는 열세 살이었고 언니는 스물네 살이었으니까. 글쎄, 그걸 꼭 강간이라고 표현해야 한다면 난 차라리 좋은 강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때까지 온갖 재앙의 원천이었던 내 짬지를 천국으로 안내한 강간이었으니까요.”
 
비판이 제기되자 결국 지은이 이브 엔슬러는 열세 살은 열여섯 살로 바꾸고 문제의 대사로부터 ‘강간’이 언급된 부분은 전부 삭제한 뒤 이렇게 고칩니다.
 
“나중에 깨달았어요, 언니는 나에게 놀랍고 예기치 않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politically incorrect) 구원이었다는 걸. 그때까지 온갖 재앙의 원천이었던 내 짬지를 천국으로 안내했으니까요.”
 
(우리 말 번역서는 수정 전 원본을 옮긴 모양인지 나이는 열세 살로 되어 있고 ‘강간’이 언급된 오리지널 대사가 나와 있습니다. 새로운 대사는 수정본의 영어원문을 참조하였습니다.)
 
책에 있는 이 에피소드의 도입부를 보면 이 짬지 이야기의 사연과 배경이 나옵니다. 
지은이 이브 엔슬러는 성폭력피해자, 알코올중독자, 마약중독자 등에 대한 다양한 치료프로그램을 함께 하면서 10년 간 백 명이 넘는 여성들을 인터뷰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여성들 중 단 두 명을 빼고는 다 성폭행피해자였고, 어렸을 때 당한 여성들 대부분 아버지나 오빠 같은 매우 가까운 근친들이 가해자였다고 하니, 이브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자매’들을 만난 셈입니다.
 
짬지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브가 쉼터에서 만난 여성인데, 이 여성은 쉼터에서 어떤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어 새로운 “아름다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브는 바로 이 여성들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기사를 찾아보니 이브 엔슬러가 한 어느 인터뷰에 이 내용이 언급됩니다. 그녀가 밝히기를 이 이야기는 실화로서 “그게 강간이었다면 좋은 강간”이란 말은 실제 주인공인 쉼터에서 만난 그 여성이 직접 한 말이었다고 합니다.
 
‘창작자로서의 자아와 성폭력에 반대하는 액티비스트로서의 자아 사이에서 엄청나게 갈등하면서 2년에 걸쳐 토론한 결과 결국 고치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브는 “잘한 일인지 확신이 없다”고 덧붙입니다.
 
“상처받고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는 여성들”
 
새로운 대사는 비판을 의식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래서인지 원래의 대사와 비교할 때 과하게 압축적이고 계몽적인 느낌을 주어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을 수용하여 고치더라도 달리 고쳤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른 수많은 성폭행 사례를 접했을 터이고, 더욱이 본인이 아동성폭행피해자인 이브가 하필 왜 이 이야기에 주목하고 자신의 연극에 넣었을까요? 그리고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이 이야기는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파장을 던졌을까요?
 
결론을 바로 내리는 대신, 이 짬지 이야기를 바치는 그녀의 글을 인용하면서, 의문은 일단 의문으로 남겨 두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를 그녀들의 경이로운 영혼에 바칩니다. 우리가 보지는 못하지만 상처받고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이어진 글 보기] 우리들의 버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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