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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① 말레이시아의 아프간 난민 아이들을 위한 힐라학교 둘째 빈이네 반 아이들. 여자아이들은 히잡을 쓰고 학교에 온다. 가운데 줄 맨 오른쪽이 빈이. 학교까지 따라온 동생 때문에 수업에 못 들어간 자흐라
힐라학교(Hilla School & Community)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난민 아이들의 학교인데, 몇 년 전 평화수업 공부를 하면서 인연을 맺은 평화단체 ‘개척자들’(The Frontiers)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프가니스탄은 좀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게 되는 나라 아닌가. 3년 전 한국인 납치 피살사건으로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탈레반이며, 여론의 호된 뭇매 속에서도 번번이 강행되는 파병 문제들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라크, 소말리아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한국인 여행 금지국이다.
이곳 쿠알라룸푸르 외곽으로 흘러든 아프간 사람들 역시, 자국의 오랜 정치적 혼란과 전쟁을 피해 나라 밖으로 힘겹게 떠도는 중이었다.
가족을 따라 난민이 된 아프간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불법체류 중이기 때문이란다. UN 어린이 권리 조약에 명시된 ‘교육받을 권리’도 가난한 난민 아이들에게는 먼 산의 빈 메아리였다.
힐라학교는 주택가 골목 맨 귀퉁이 조그만 마당이 딸린 가정집을 빌려 쓰고 있었다. 일곱 살짜리 꼬맹이부터 제법 어른 태가 나는 열여덟 살 언니 오빠까지 오십 여명의 아프간 아이들이 자원봉사자 선생님들과 오전 수업만을 한다고 했다.
열한 살, 열세 살, 열다섯 살이던 우리 딸들도 힐라학교 최초의 외국인 학생이 되어 매일 아침 걸어서 학교에 가게 되었다. 나도 보조 교사랍시고 같이 등교하여 이 수업 저 수업 부산스레 드나들었는데, 주로 뒷자리에 앉아 선생님 몰래 아프간 아이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우리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친구는 열네 살 먹은 쌍둥이 고브라와 자이납이었다. 언니 고브라는 아주 영리하여 학교 책 대출일도 도맡아 하고, 영어를 잘 못하는 아프간 엄마들이 학교에 오시면 중간에서 통역 일도 척척 해내었다. 하지만 나는 동생 자이납과 더 친했다.
자기는 언니보다 예쁘지도 않고 영어실력도 안 좋다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 웃곤 했지만, 주근깨가 귀여운 자이납은 천성이 밝고 호기심이 많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프간 말과 한국말을 가르쳐주며 같이 놀았다. 아프간 말로 ‘고맙다’는 ‘타샤꼬르’였고 ‘하나, 둘 셋’은 ‘옉, 도, 쎄’였다.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줄 때 옉, 도, 쎄~! 하고 외치면 아이들이 더 크게 웃어서 나는 그 말을 두고두고 좋아했다. 학교이름 ‘힐라’가 아프간 말로 ‘희망’이란 뜻이라고 처음 알려준 것도 생각해보니 자이납이었다.
그 즈음 아프간 난민들 사이에서는 은밀히 배를 구해 인도네시아로 밀입국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UN을 통해 제 3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워진 탓에, 인도네시아를 거쳐 호주로 넘어가는 뱃길을 알선해주는 밀입국 브로커들이 횡행하였고, 사람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살 길을 도모하려 하였다.
하지만 단속의 눈을 피해 배 밑바닥에 짐짝처럼 실려 몇 날 며칠을 가야하며, 운이 나쁘면 배가 뒤집혀 나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또 해안에서 인도네시아 경찰에게 체포되면 수감되어 강제 송환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속이 먹먹해졌다.
난민으로 태어나 살아온 이 아이들이 어린 몸으로 감당해내야 하는 삶의 무게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보내는 아이들과 떠나는 아이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아이들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세상이 사실은 좁디 좁은 우물 속에 지나지 않았음을 가슴 아프게 깨달았다. 아이들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 속에서 지금껏 버텨왔고, 내가 알지 못하는 더 힘겨운 세상 속으로 다시 떠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놀지만 말고 미리 사진이나 좀 찍어둘 것을, 나중에 보니 같이 찍은 사진 한 장도 없이 우리는 덜컥 자이납과 헤어졌다. 뭐라도 한 마디 위로나 용기를, 아니 그저 우리의 마음과 우정에 대해서라도 따뜻하게 한 마디 해줄 것을, 어쩌자고 그렇게 울기만 하다가 아이를 대뜸 보내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이 정말 속상하고 또 슬프다. (진형민)
[필자의 다른 글] 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그 앞 이야기 | 아주 특별한 위로, 아잔(ad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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