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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오미드의 첫사랑
 
*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② 
 

아이들 데리러 힐라학교에 온 아프간 엄마들. 하자라인들은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하여 더 친근한 마음이 든다.

힐라학교 아이들 대부분은 하자라 족이었다. 아프가니스탄 내 소수 인종인 하자라에게는 다수파 지배 계급이었던 파쉬툰이나 타지크 족에게 오랜 세월 핍박당해온 아픈 역사가 있다. 그들은 생김새가 좀 달랐다.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쌍꺼풀 없는 눈과 낮은 코 그리고 둥그스름한 얼굴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깊숙한 눈매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아리안계 파쉬툰들은 하자라를 제 집 머슴으로 부려가며 사회 최하층민으로 몰아쳐갔고, 이슬람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몇 차례 대량학살을 감행하여 수천에 달하는 하자라 인들을 피의 제물로 삼기도 하였다.
 
오미드의 할머니가 그토록 고국을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아직 끝나지 않은 종족 간의 싸움판 속에서 아들과 손자들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미드(Omid)는 큰딸 승현이와 같은 반 동갑내기 친구였다. 동생 하밋(Hamit)과 짝을 이뤄 온갖 개구쟁이 짓을 도맡아 하고 나이 많은 형들에게도 지지 않고 대들기 일쑤여서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는데, 이 녀석이 멀리 한국에서 온 여자아이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승현이는 여행 기간 내내 써니(Sunny)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오미드는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매일 아침 써니를 툭툭 치며 “Today is sunny?”하였다. 새침데기 써니는 “아니, 구름 꼈거든(No, cloudy).”하거나 “아니, 무지 덥거든(No, very hot).”하고는 얼른 여자친구들 틈 속으로 달려가버렸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앞에 나와서 해볼 사람?” 할 때마다 오미드가 “써니~! 써니~!” 해대는 통에 써니는 번번이 얼굴이 빨개졌고, 그래서 갈수록 오미드에게 좀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오미드가 자꾸 써니 모자를 휙 벗겨 달아나는 바람에 마음이 상한 써니가 크게 한번 눈물을 쏟기도 하였다.
 

큰딸 써니에게 사랑고백한 개구쟁이 오미드

수업 때마다 맨 뒤 내 옆자리에 앉는 오미드에게 ‘좀 점잖게 굴면 써니가 더 좋아할 거야’ 라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었지만, 초등학생처럼 짓궂게 관심을 구하는 것도 통과의례처럼 녀석이 한번은 거쳐 가야 할 과정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모센(Mohsen)은 남자아이들 중 덩치가 크고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결혼한 누나와 누나네 아기까지 모두 한 집에 사는 때문인지,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눈치였다. 하루는 이란 식당에 웨이터 자리가 나서 인터뷰하러 갈 거라고 좋아했는데, 다음 날 영 기운이 없이 학교에 나타났다. 잘 안됐나 보다 싶어 가만히 말을 붙이니 억울해 죽겠단 얼굴로 얘기를 쏟아놓는다.
 
새벽 2시까지 꼬박 일을 하고 나서 받는 월급이 600링깃(1링깃은 약 350원,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21만원 정도), 그런데 똑같은 일을 하는 말레이 사람이 받는 돈은 1500링깃이라는 것이다. “나는 영어도 하고 이란 말도 할 줄 아는데…” 말끝을 흐리는 모센 옆에서 나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불법체류자인 아프간 사람들은 이 땅에서 누구나 그렇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이 몸을 혹사당해도 함부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기 힘들고, 고용주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야금야금 그 노동력을 훔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막 기지개를 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에게도 예외의 삶은 없었다.
 
세디게(Sedigheh)는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에게 맞서는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이슬람 문화가 그렇듯 남녀가 유별한 큰 아이들은 교실에서도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고, 간혹 티격태격할 일이 생겨도 잠깐 궁시렁댈 뿐 대놓고 드잡이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세디게는 달랐다. 분한 일이 생기면 큰 소리로 맞대거리를 하거나 예사로 발차기를 날렸다. 오미드와 서로 멱살을 잡고 뒹굴다가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선생님에게 걸려 된통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그런 세디게를 학교 밖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시내 구경을 하자며 딸아이들과 버스를 타고 멀리 나선 길이었다. 처음에 좀 긴가민가하였던 건 히잡을 벗어버린 세디게의 머리가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들은 학교에 올 때마다 히잡을 꼭꼭 다잡아 썼고, 학교 옷인 반팔 티셔츠 안에 기어이 긴 팔 옷을 껴입고 와서는 푹푹 땀을 흘렸다. 남들 앞에서는 얼굴과 손을 제외한 온 몸을 가려야 하는 것이 그녀들이 지켜야 할 교리였다.
 
그런데 쇼핑몰 안을 부지런히 오가던 세디게는 긴 머리를 하나로 깡충 묶고 청바지에 반팔 옷만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예쁘고 신기했지만, 어쩐지 아이가 무안해할 것 같아 그냥 모른 척 지나가기로 하였다.
 
힐라학교를 떠나기 며칠 전 세디게가 이제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필리핀으로 간다 했더니, 아이가 뜬금없이 “난 외국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아프간 남자들은 정말 싫어” 했다.
 

힐라학교 교장선생님 에녹과 아이들

아이가 정말로 싫은 것이 아프간 남자들인지, 자신을 옥죄는 어른들의 규칙인지, 들끓는 자본의 욕망 속에 혼자 버려진 듯한 외로움인지, 나는 알기 어려웠다.
 

이란 난민촌에서 태어나 아프가니스탄 땅에 발 한 번 디뎌보지 못한 아프간 소녀 세디게. 혹시 그 아이는 백마 탄 왕자님인 ‘외국사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꿈꿀 것이 아무 것도 없노라고 그예 소리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우리는 두 달 동안 힐라학교의 식구로 살았다. 아침마다 서둘러 학교로 뛰어갔고, 영어와 아프간 말이 뒤엉켜 오가는 수업시간들이 정신 없이 지나가면 길가에까지 탁자를 늘어놓은 동네 식당에서 느리게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가끔 힐라 아이들이 집에 놀러 와 같이 매운 라면을 끓여먹었고, 감질나게 비는 오다 말다 하였으며, 매일같이 무더운 바람이 불었다.
 
힐라학교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날, 머리를 단정히 빗고 나타난 오미드가 써니에게 편지 한 통을 내밀고는 후다닥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보니 ‘한국으로 너를 꼭 만나러 가겠다, 네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너를 정말 사랑한다, 보고 싶을 거다’ 라고 구구절절이 적혀있었다. 하트모양의 목걸이도 함께였다.
 
오미드의 첫사랑인 깍쟁이 우리 딸은 애절한 편지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고, 목걸이 예쁘다며 대롱대롱 목에 걸고 다녔다.
 
다시 짐을 싸며, 그새 늘어난 보따리 속에 도대체 무엇이 쌓였나 들여다본다.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허겁지겁 여행을 떠나오며 학교를 등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학교는 세상 어디에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배움을 내 것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괜찮은 거였다. (진형민)

[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힐라 아이들이 울던 날  | 아주 특별한 위로, 아잔(ad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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