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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09. 7. 26. 09:00

한스 애빙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이 책은 예술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이 쓴 예술계의 경제구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경제학의 논리로, 예술계의 구조적 폐해에 대해 지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예술가로서, 예술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매혹시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경제학적 시선은 사물과 사건의 효용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예술의 투자 대비 효용에 대해 애초부터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예술계의 경제는 특수성을 띤다. 신성화되어 경제논리를 은폐하는 분야가 예술이라는 점에서, 경제학적 시선으로 예술계를 검토해 보려는 저자의 시도는 신선하고 흥미롭다.
 
경제학자가 본 예술경제의 패러독스

예술계는 정치적 공정성이 조금도 작동하지 않는 동네다. 오로지 1등만이 존재하는 무한경쟁에 가깝다. ‘토마토를 100박스 담은 사람은 99박스를 담은 사람보다 1%를 더 많이 받는다. 육상선수 A가 육상선수 B보다 1% 빠르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A는 1%만큼 상금을 받는 게 아니라 모든 상금을 혼자 차지한다. 즉, A는 B보다 무한대만큼 돈을 많이 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러한 승자독식 구조로 인해, 아주 부유한 한 명의 예술가와 매우 가난한 다수의 예술가가 존재하게 된다. 이 불공정한 구조를 개선할 방법은 불행히도 없다. 대중들에게 승자독식 구조를 완화하기 위해 A작가와 B작가, C작가의 소설을 모두 고르게 한 권씩 사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우리가 인기가요의 차트를 보면서, 그것이 경쟁구도이기 때문에 서열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게 현명한 일일까. 오히려 강요된 평등은 획일화와 다르지 않게 된다. 스포츠처럼 장(場)이 내포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한스 애빙은 더 나아가, 예술가가 가난한 것은 예술가 과잉현상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승자독식이 가져오는 장밋빛 환상에 이끌려서 젊은 예술가들이 과잉 공급되고, 그 결과 마이너스 수익을 창출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대거 생산된다. 실질적인 임금구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업계의 특성상, 예술가 지망생은 자신의 창작행위가 벌어들일 마이너스 수익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로 행운만을 과시하며 발을 디디게 된다. 더 나아가 예술학교의 설립과 국가의 지원은 예술가 과잉 공급의 구조적 문제를 은폐한다.
 
저자는 서유럽과 미국의 예를 들며, 국가의 예술가 지원사업이 역설적으로 예술가 과잉 공급의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예술이 그만큼의 국고를 통해 지원해야 할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혹은, 그 지원이 과연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 예술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당위 명제를 잠깐 접어두고 생각해 본다면, 대답은 회의적이다. 100만원을 장애인에게 지원하는 것과 예술가들에게 지원하는 것 중 보다 효율적인 사용은 어느 쪽일까. 애빙에 따르면 전자이다.
 
“국가가 지원을 하면 아름다운 것들을 시민들이 함께 누릴 수 있게 돼요” 라는 주장에 대해 애빙은, 클래식 마니아가 200만원에 봐야 할 좌석가격을 국가가 지원해줘 10만원에 보는 것이지 동네구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생활을 보조해 주는 것이지, 향유층을 늘리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리고 향유할 수 없는 시간과 돈이 없는 계층은, 그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지 않는 한 예술을 계속 향유하기 힘들다.
 
게다가 문화예술이 어떤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엘리트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예술의 가치를 아직 모르는 대중’이라는 관점이 내포하고 있는 계몽의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약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관점과 미적 가치를 가지고 이미 보지 않기로 선택을 한 것이라면? 모르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 알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몰라서가 아니라 알지만 선택하지 않는 것이라면? 미적 패러다임이 바뀐 거라면?
 
고전들도 그것이 발표된 당시에는 예술이 아닌 천박한 대중문화라 불렸다. 우월하고, 가치 있는 예술을 규정하고 있는 시선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걸 누구에게 교육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이에 따른 위험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 능사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술가의 공급이 드라마틱하게 줄어들면 예술가의 가난은 해결되겠지만, 특정 장르는 사멸할 것이고 최상위 계층만이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의 시나리오든지 장단점은 모두 존재한다고 애빙은 주장한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정부지원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 지원이 늘어날수록 폐해도 늘어나는 예술경제의 패러독스 자체를 지적하는 데에 있다.
 
더 나아가 예술이 정부지원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전 세계적 현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유럽, 미국뿐만 아니라 아시아도 마찬가지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현대 예술의 가장 거대한 후원자는 정부인 셈이다. 예술계의 문제는 후원자가 정부라는 것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정부라는 후원자를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정부는 목적에 따라 어떤 예술을 지원할까를 선택하게 된다. 예술의 자율성은 국가의 지원으로 보호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은밀하게 침해되기도 한다.
 
경제학자답게 저자는 시장경제에 예술을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예술가가 시장에 적응하여 자신의 상품들을 다변화해서 수입의 구조를 다각화시킬 수 있다면, 정부의 개입으로 인한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 사이로 예술가로서의 저자의 시선이 침투한다. 예술에는 신성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신성함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즉,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예술이 살아남을 거라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불행히도, 후자는 신념과 믿음, 혹은 희망에 가깝기 때문에 논리적이기보다는 비약적으로 제시되지만 말이다. 거칠게 저자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시장에 맡겨도 예술은 살아남을 거라는 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시장에 맡겨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어쩌면 살아남도록 시대가 요구하지 않는, 수명이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 대안적 삶의 가능성
 
저자의 논의를 꼼꼼히 따라간 후에 책장을 덮고 생각한다. 경제학은 시스템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즉, 경제학적 시선으로 시스템을 뛰어넘을 방법은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지형도가 그려질 뿐이다. 장 내부에서 장을 뛰어넘을 언어를 생성해낼 수는 없다. 그럼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뛰어넘기 위해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가난’이란 무엇인가. 밥을 굶지 않는다면 무엇이 가난인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가난인가, 아니면 상대적인 의미에서 인가. 밥을 먹고, 하루의 일정 시간을 창조에 쏟고, 타인과 교류하며, 넉넉한 시간 동안 충분히 쉰다. 과잉근무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이러한 삶은 선망하는 꿈에 가깝지 않은가. 예술가의 삶이 가진 ‘풍요로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결국 예술가와 가난의 문제는 시스템의 선택 문제와도 연관된다.
 
예술가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창조활동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의미보다는, 자본주의 바깥에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에 가까워 보인다. 그들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가난한 예술가들’로 묶어버릴 수도 있지만, 대안적인 삶을 모색해서 실천하고 있는 집단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의미로 읽히게 된다. 어느 쪽이 옳은가에 대한 답은 없다. 하나의 그림이 추한 노파로 보이기도 하고, 젊은 여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보는 이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19세기 이후부터, 정확히 말하면 양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정부는 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서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지원이 점차 줄어드는 방향으로 정부의 예술정책이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예술계가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강구하지 못한다면 예술의 자율성은 크게 침해 받게 될 것이다.
 
극단의 경우에는 대중과 정부, 양쪽 모두에게 외면 받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예술이 자신의 영역에 대해 스스로 신성함을 주장하며 보호받기를 요청할 때만큼 끔찍하게 이기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에서 소외되어 있으면서 노동보다 존엄하다고 주장할 때, 예술은 폭력적 권력이 된다. 문화적 우월함의 과시가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예술정책은 정부의 지원이 늘어나는 지점에 있다. 해마다 문화예술에 편성되는 예산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향후 20년 이내에 전 세계적 흐름에 따라 결국 지원이 중지되거나 삭감되는 쪽으로 정책이 변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흐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정부와 예술계와 대중들이 모두 만족하는 효율적인 대안이 존재할 것인가.
 
어느 쪽이 되었든 자본주의의 시스템 내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아마도 그 대안은 시스템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들에서 나오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예술가의 삶의 양식이 대안적 삶으로서 성립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가능할 정도의 건강함과 긍정적 에너지가 수반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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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최일노 옛날 작가가 가난했다는 것은 대중이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지금은 작가가 너무 많아 가난하다는 말이 생각나는 군요. 로렌스가 그랬나?

    예술은 저 자본의 지원이나 거부의 꿈이 만들어냈다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이 예술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 정부 지원금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원금으로 예술가가 영향을 주기는 하겠지만, 존립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을까? 지원금의 규모도 예술에 대한 그 사회의 인식 정도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고, 예술 당사자들이 자신의 조직된 힘을 얼마나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술가 다수가 그 사회 대다수 계층에 속에 있는 것 같으니, 그 사회 다수 계층이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가난하다고 판단하면 그들도 가난하고 부자면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이 경제적 측면과 전혀 무관 할 수도 없겠지만, 역시 그 사회의 문화예술적 수준이 예술가의 수준 향상 환경이나 경제 생활에 더 밀접한 것이 아닐까 싶군요.
    2014.02.16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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