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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동안 장마비가 엄청 쏟아져 내렸다. 밖에서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안에서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니 난 컴퓨터를 켰다. 그 순간, 퍽! 퍽! 귀를 날카롭게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지?’ 하며 잠시 두리번거리다 타는 냄새와 합선되는 소리에 전기스위치를 껐다. 하지만, 12살이 넘은 모니터는 결국 사용불능 상태가 되었다.
 
쉼 없는, 크고 작은 변화로 이뤄진 일상의 흐름
 
평소 컴퓨터로 일하는지라, 모니터가 망가지면서 내 일상의 리듬에 균열이 생겼다. 당장 컴퓨터로 해야 할 일들이 중단되었다. 사실, 필기구로 해도 되는 일이지만 워낙 컴퓨터에 의존해 있었던 모양이다. 일의 리듬이 깨어지니 의욕이 감퇴되고 컴퓨터가 필요하지 않는 일까지도 손을 대기가 싫어졌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내 일상은 중지된 듯했다.
 

일다 -시로의 그림

이처럼 예측하지 못한 사건 하나가 일상의 흐름을 뒤흔들어 놓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미래가 예측하고 기대하는 바대로 현실이 되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간은 불확실한 채로 우리 앞에 열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이 오늘 기대하는 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며 계획하길 멈추지 않는다. 내 속에는 분명 우여곡절 없는 일상에 대한 소망이 감춰져 있다.

 
때로는 매일매일이 별반 다르지 않게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이 반복적이라며 지루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때가 많고 삶의 활력소를 찾아 특별한 이벤트를 동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간과 더불어 흘러가는 일상은 두드러지는 큰 변화를 포함한 미세한 변화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다지 세세한 변화에 주목하지 않는다. 내 경우도 모니터가 망가지지 않았다면 작은 변화들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일상이 평소처럼 굴러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관문 앞에 새로운 광고지가 나붙고, 베란다 창틀이 오가는 차 먼지로 더러워지고 비닐 쓰레기가 쌓여가고 커튼이 바람에 날리는 등의 일들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해서 무시된다. 주름이 조금씩 생겨나고 머리카락이 자라고 가구가 낡고 책에 먼지가 쌓이며 아파트 벽면에 작은 금이 가는 등의 일들은 그 변화가 너무나 미세해서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곤 한다.
 
그러나 내 감각기관에 포착되기 못해서, 또는 내게 무의미해서 놓쳐버리거나 무시되는 작은 변화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모니터가 망가지기까지 1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마모 과정이 존재했을 텐데, 그 지속적인 변화들은 내 주의력을 끌지 못했었다.
 
언젠가 창틀의 먼지가 너무 많이 쌓여 그것이 친구의 천식을 자극하는 날이 온다면, 더 이상 그 위험한 오물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 걸레를 집어 들게 될 것이다. 또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주름이 너무 깊어 보일 때, 내 나이 듦을 직시하고 인생의 마무리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그 변화가 크건 작건, 또는 무의미하건 의미가 있건, 우리 삶은 결코 반복되지도 단조롭지도 않으며 쉴새 없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따라서 변화에 예민한 존재에게 일상은 결코 지루할 수 없다. 작은 변화에 둔감한 사람이라면, 갑작스러워 보이는 사건을 통해 지속적인 작은 변화들을 알아 볼 눈을 얻을 수도 있다. 커 보이는 변화조차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변화는 변화일 뿐, 어떻게 겪어내느냐가 관건
 
아무튼 귀찮거나 고통을 주는 사건은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변화를 선별적으로 취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그렇다면 변화에 직면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변화를 담담한 듯, 무관심한 듯 무시하려고 애쓰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더라도 예측하지 못한 변화의 흐름을 파도타기 하듯 잘 타내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모니터가 고장 난 다음 날, 함께 사는 친구의 노트북을 빌려 인터넷을 검색해 적당한 모니터를 찾아보았다. 주변에서 인터넷으로 구입하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일을 하려면 모니터가 당장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네에서 직접 사기로 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트를 찾았지만 원하는 모델을 찾을 수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맥이 빠졌다.
 
‘전자상가를 가야 하나?’ 하고 지쳐 쓰러져 있는데, 방치된 모니터가 있으니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다음 주면 내 일상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 난 컴퓨터 앞에서 다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모니터를 구매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되고 별도의 비용도 들지 않으니 모니터의 사망사건은 잘 마무리된 것 아닐까?
 
게다가 책상을 꽉 차지했던 육중한 모니터 대신에 날렵한 모니터를 갖게 돼서 일하는 공간도 한결 넓어질 테고, 예전보다 화질도 더 좋아질 거라니 상황은 더 나아진 듯하다.
 
변화는 때로 우리를 움츠리게도 하고 익숙지 않아 불편을 가져다 주지만 변화는 변화일 따름이다. 변화는 정지하지 않고 변화를 계속 낳으며 흘러가니 말이다. 나쁜 것도 흘러가고 좋은 것도 흘러갈 뿐이다. 또 불쾌하거나 불만족스럽거나 피하고 싶은 변화조차 내가 그 흐름을 어떻게 타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겪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변화 자체를 겪어나가는 동안 감정적 경험만큼이나 삶의 내용도 풍성해진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지금 난 빌린 노트북의 익숙하지 않은 자판을 두드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번 칼럼은 모니터가 망가져 탄생한 예상 밖의 수확인 셈이다. 앗,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퍼버벅!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친구가 달려와서 전한다.
“텔레비전이 죽은 것 같아.”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 일다 www.ildaro.com

*추천곡.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 작품 988. [다른 글] 좀더 불편하면 지구가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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