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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현관문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와, 책이 많네요!”하며 감탄을 터트리곤 한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책장이 떡하니 버티고 있고, 고개를 조금만 옆으로 돌려도 책장들이 줄을 서 벽을 만들고 있다. 또, 열린 방문 사이로 책 가득한 책꽂이가 시선을 잡으니, 책이 많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늘어만 가는 책
 

사라 스튜어트의 "도서관"(시공주니어)

어린 시절 난 가끔, 내 방 가득 책이 어지럽게 쌓여있고, 그 책더미 속 한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보는 내 모습을 상상을 하곤 했다. 또 사방 벽이 책꽂이인 서재가 있는 친구 집이 무척 부러웠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이나 서점의 한 구석에 박혀 책에 꽉 둘러싸인 채 그 속에서 책들을 하나하나 골라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참으로 만족스럽고 좋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책이 많은 공간을 욕망했는지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내게 책 많은 공간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렸다. 집안 곳곳에 책이 뒹굴고, 사방을 둘러보면 책이 햇살을 가로 막아 실내는 늘 어두컴컴하다. 읽다 만 책들, 읽어야 할 책들이 책상 위를 점령하고 있어 책을 펼칠 자리 찾기도 버겁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책들을 밀쳐내고 제 자리를 잡아주지 않으면 어느새 책세상이 되어버린다. 간곡하게 바라고 열심히 꿈꾸면 이루어진다더니, 내가 이토록 책을 갈망했던 걸까?
 
사실 대학시절부터 난 책에 발목잡히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될수록 복사해서 보거나 빌려서 보고, 꼭 필요한 책이 아니면 구입을 피했다. 멋진 장서를 구비하거나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으는 친구들을 볼 때면, 왜 그토록 책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책 소유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나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런 나도 유학시절, 어쩔 수 없이 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모국어처럼 익숙지 않은 외국어 때문에 책을 속도 있게 읽어내지 못하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필요한 책을 사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다. 따라서 책장의 책은 나날이 늘어났고, 내 책장을 본 외국인 친구들은 내 속도 모르고 “참 대단하다. 저 책을 다 읽었단 말이야?”하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 책들은 유학시절을 마무리할 때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왔다. 워낙 책값이 비쌌던 만큼 책을 던져버리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게다가 미처 다 읽지 못한 책들도 부지기수라, 책에 대한 미련을 쉬이 접을 수도 없었다. 그 책은 다시 내 공간을 비집어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했고, 대책마련이 필요했다.
 
쉬운 책은 가까운 전철역에 주고, 좀 아까운 책은 동네 시립도서관과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다. 관심이 있을 듯싶은 이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쓸데없다 판단되면 폐지 수거하는 날, 밖에 내다 놓았다. 될수록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흥미로워 보이는 신간은 도서관 희망도서로 주문해 검토하고 꼭 필요한 책만 구입하려고 애썼다. 책을 사더라도, 가지고 있는 책장에 꽂히는 한도 내에서 사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그래도 일이 연구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책과 자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만나는 사람 가운데 자기 논문이나 글이 실린 잡지, 출간된 책을 내게 안겨다 주는 일도 심심찮게 생겨났다. 출판사에서 한번 읽어보라며 주는 책들도 생겨났다. 게다가 한 친구는 자신이 미처 읽지 못한 철학책을 제발 읽어달라며 내게 한아름 건네주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책은 자꾸 늘어만 가고, 내 책장은 포화상태다. 그나마 아직은 책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지 않다는 것에 안도할 따름이다.
 
욕망이 투영된 책의 소유
 

함께 읽자. 사라 스튜어트의 "도서관"

책에 깔려 살까봐 염려하고 있는 중에도, 여전히 난 아끼며 남에게 주길 원치 않는 책들이 있다. 일 때문에 필요해서 가지고 있는 책들은 일을 접는 순간 모두 던져버릴 수 있겠지만, 일을 모두 접더라도 평생 곁에 두고 싶은 책이 있는 것이다. 그 책은 내 작은 욕망의 표현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작은 아버지는 평생 동안 책 속에 파묻혀 사셨다. 내 어린 시절 꿈이 현실이 된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특히 안방에는, 작은 아버지 한 분만이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을 정도의 빈 공간 밖에 없었다. 책들이 방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여 방안 가득 빼곡히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과 직장 이외의 그 어떤 외출도 하는 법이 없고, 가족과 직장동료 이외의 사람은 만나지도 않았던 작은 아버지. 직장생활을 끝내면 서점에 들러 책을 사 귀가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고, 나이가 들어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그의 감춰둔 꿈이었다.
 
그러나 작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꿈은 꿈으로 끝났다. 난 그 책들의 운명을 알고 싶지 않다. 아니, 평생토록 책 때문에 힘든 이사에다, 정리정돈, 청소 등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로 지긋지긋한 인생을 사셔야 했던 작은 어머니께서 그 책들을 어떻게 처리하셨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아무튼, 작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부터 좌절된 꿈과 욕망이 책에 투영되어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이제 책과 함께 부유하던 욕망도 그의 죽음과 함께 떠나버렸으니, 책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나, 솔직히 마음 한 켠으로는 홀가분하다.
 
실제로 책의 소유와 집착은 다양한 욕망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책들 역시 관계유지의 욕망, 아름다움의 동경, 자연 속의 삶에 대한 갈망, 지식욕, 이루지 못한 꿈 등 나의 온갖 욕망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욕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난 욕망이 과도하게 넘쳐나지 않길 바라며 필요와 욕망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책과 관련해서도 내 욕망의 수위조절을 끊임없이 해왔던 것 같다.
 
아무튼 책이 필요한 일을 하는 이상, 책을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나마 책이 늘어나는 속도를 조절하고, 짬짬이 책을 정리해서 처분하는 일을 잊지 않는 정도에서 책과의 동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내가 가진 책 모두를 나눠주고 책의 집착을 떨쳐내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꿈꾸면서.
 
그럼에도, 오늘은 어제 택배로 받은 책 꽂을 자리를 찾아야 한다. 어디다 꽂을까?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일다www.ildaro.com  [가까운 먹거리, 철 있는 음식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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