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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적 삶을 위한 ‘필요노동’, 집안일 가사노동은 누구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 (미토)
아침나절부터 집안 곳곳에 널려 있는 ‘할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현관에 흩어져 있는 신발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물건들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 청소를 하고 걸레로 훔치는 일, 빨래를 분류하고 세탁기를 돌리거나 손 세탁을 하거나 삶는 일, 빨래를 널고 걷고 정돈하는 일,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고 남은 음식물을 정돈하는 일, 음식물 쓰레기, 폐지, 플라스틱, 유리병 등 쓰레기를 분류해서 버리는 일 등.
정말 쉴새 없이 일해도 별로 표 나지 않는 일들이다. 누가 “오전에 뭘 했어?”하고 물어보면 “집안일 했지”하고 대답할 뿐, 세세하게 한 일을 열거하기조차 쉽지 않다.
놀고 있다?
그런데 그 말로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다양한 ‘집안일’이 흔히 ‘노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생각해 볼만하다. 주변에서 종종 주부들 스스로가 ‘어떤 일 하나?’는 물음에 ‘놀고 있다’고 대답해 의아해하곤 한다. 집안일 하는 자신을 ‘노는 사람’으로 일컫는 마당에야, 그 자녀들이 “우리 엄마는 놀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집안일의 가짓수와 일의 경중은 개인차가 있겠다. 모든 빨래를 손으로 하는 사람, 세탁기와 손을 적절히 사용해 빨래하는 사람, 빨래는 오직 세탁기로만 하는 사람, 심지어 건조기까지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 분명 빨래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의 차이가 존재한다. 또 유리창을 닦는 사람에게는 유리창 닦기가 집안일의 한 가지겠지만, 절대 유리창을 닦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아무튼 집안일에 대한 개개인의 생각 차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집안일 자체는 ‘일’임에 분명하다. 부지런한 전업주부였던 어머니의 하루 일과를 회고해보면,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의 일 이상으로 어머니의 집안일 노동강도가 높았던 것 같다. 별다른 취미생활도 없었고 외출하는 일도 드물었던 어머니는 그야말로 온종일 집안일에만 매달려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집안일이 ‘노는 것’으로 간주되었을까? 그것은 그 일이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집안일을 잘 해서 돈을 아낄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언젠가부터 돈을 버는 일이 아닌 일은 노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루고, 춤을 추고, 운동을 하는 등의 취미활동이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이 집안일과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된 것은 참 억지다.
집안일은 안 할수록 좋은가?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는 그 ‘별볼일 없는 일’이 아직까지도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고 있는 형편이라, 돈 잘 버는 여성이라면 가족 중 또 다른 여성(어머니, 자매, 며느리, 시어머니 등)에게 집안일을 떠넘기거나, 아니면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안일을 벗어나려 한다.
반면, 돈 못 버는 여성은 가정경제가 허락하는 한에서 편리한 가전제품을 집안에 갖춰놓거나 식당이나 세탁소 등의 서비스를 이용함으로써 몸수고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렇다 보니, 형편이 어려워 집안일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여성이 있다면, 자기 처지를 한탄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결국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남성이나, 그 일을 떠안은 여성이나, 될수록 그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즉, 돈을 지불해서라도 가사일의 사회적 서비스 혜택을 누리고, 기계일꾼이나 사람일꾼을 부려 집안일로부터 해방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성별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자립, 집안일을 타인에게 전가해선 안돼
유학시절. 혼자 밥을 챙겨먹고 살면서 난 집안일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좀더 흥미롭고 가치 있는 일, 즉 연구에 받쳐야 할 시간과 노력을 집안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하지만 남에게 미루면 귀찮은 일이 되는 것을 누군가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 누군가가 내게 그의 몫의 일을 떠넘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돈으로 손쉽게 해결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 까닭은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각자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자기 몫의 필요노동’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안일 속에서 그 필요노동을 발견했다. 우리가 비록 100% 자급자족을 할 수는 없지만,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소박한 삶에 대한 지향을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 속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도시 자체도 자립적이지 못하고 지극히 의존적인 공간이지만, 그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의존적 삶을 오히려 돈에 의해 보장받는 자립적 삶으로 착각하고 지낸다. 그래서 돈 버는 일은 생산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반면, 집안일은 돈 버는 일을 유지시켜주기 위한 그림자노동으로 전락하고, 소비는 그 일의 핵심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자립은 돈을 버는 데서 얻어지는 것도, 사람이나 도구를 돈으로 사서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데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집안일이 소비에 집중하는 그림자노동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필요노동으로서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고민과 더불어, 자기 몫의 필요노동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데서 자립적 삶이 출발해야 한다(집안일을 공유하고 분배하고자 할 때조차 자기 몫의 집안일에 대한 분명한 인식 위에서만이 가능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삶의 간소화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어쨌거나,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노동을 타인에게 전가시켜도 될 만큼 고귀하고 값진 일이 있다는 그릇된 믿음과 허위의식을 떨쳐내기 위해 난 하루 몇 시간씩 집안일을 하며 수양 중이다. *함께 읽자.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미토,2005)
이경신 ⓒ일다 www.ildaro.com [] 가사노동, 해본 사람만이 안다 [] 가사노동은 다이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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