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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노쇠로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 복지체계가 제공하는 돌봄은 방문간호와 데이케어가 있고, 이게 어려워지면 요양병원-재활병원으로, 그것도 어려워지면 요양시설로 의존하는 몸의 이동이 이루어진다. 혼자 사는지, 가족과 함께 사는지에 따라, 그리고 가족이 돌봄서비스 체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얼마큼 확보하고 있는지에 따라 의존의 양상이 달라진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의 대상이 되기 위해 등급을 받는 것조차, 정보를 갖춘 관련자들의 협업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요양원, 즉 요양시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노년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거의 대부분 당사자 본인이 아니라 보호자-돌봄자가 결정하게 된다. 삶이 지속되는 장소, 즉 ‘집’이 아니라, 삶은 멈추고 생명만이 유지될 뿐인 ‘마지막’ 거처로 상정하고 입소를 결정하는 경우, 실제로 요양시설은 삶이 가능한 집이 될 확률이 낮아진다.

 

요양시설에 있는 노년들은 인지장애의 정도와 무관하게 늘, 거의 예외 없이,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이 소망에 응답하기 어려운 보호자는 ‘죄책감’에 분열되는 마음으로 산다. 집에서 가족의 돌봄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완성한다고 믿는 문화적 관습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보호자인 가족은 극한 상황을 견디면서라도 어떻게든 집에서 돌보려고 한다. ‘아직 요양시설에 보낼 정도로 상태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라는 판단은, 요양시설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더 돌보겠다는 선택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양시설은 ‘모시는’ 장소가 아니라 ‘보내거나 맡기는’ 장소가 되어버린다.

 

“요양원은 아직도 인식이. 보살핌을 받으러 오는 게 아니라 ‘식구들이 여기다가 갖다 버린다.’ 솔직히 여기 오시는 분, 면회 오시는 분도 있긴 있어요. 근데 안오시는 분이 더 많아요.” –요양보호사 A (구립 요양시설 근무)

 

그러나, 우리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이 만난 요양보호사들이 들려주는 ‘돌봄노동’의 내용은 이러한 획일적인 관점에 다양한 균열을 내고 있었다. 이들은 가족이 아니라 돌봄 종사자이기 때문에, 가족과는 다른 입장에서 노년을 만난다.

 

인지 장애증이 있는 노년을 돌보는 가족은 돌봄의 힘겨움과 고립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도 고통을 겪는다. 직업인으로서 요양보호사들이 만나게 되는 노년은 이런저런 증상 때문에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환자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갖는 취약성에 더해 한결 더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증상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대응하며 가능한 한 ‘좋은 돌봄’으로 그 취약성에 응답하려 노력한다.

 

현재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제공하는 수가가 터무니없이 낮아서 돌봄 자체가 ‘시설화’될 지경이지만,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이들은 좋은 돌봄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돌봄을 해내고 있다. 이들을 만나면서 든 생각은, 방문요양이나 데이케어로도 돌봄 필요가 채워져서 익숙한 집에 계속 머물 수 있으면 좋고, 요양시설로 이동해야 한다면 그곳을 ‘집’으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집’은 실제이기도 하고 관념/환상이기도 하다. 요양시설에 입소해 사는 노년들은 막상 명절 때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도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코로나 재난 시 예방적 코호트로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 있던 요양시설이 많았지만, 요양보호사들이 낮과 밤을 함께 했기에 노년들은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곳을 생명 유지만을 위한 ‘단순 요양’이 아니라, 삶이 있는 집으로 만들어주는 친밀한 요양보호사들 덕분이다.

 

▲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서 2021년 요양보호사를 위한 글쓰기, 사진찍기 온라인 워크숍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물로 온라인전시회 ⌜시선: 다가가고 머무는⌟(요양보호사의 경험에서 길어올린 생각들)을 개최하였다. (출처: 옥희살롱)

 

‘딸처럼 며느리처럼’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제조업 공장의 생산 컨베이어벨트처럼 돌봄이 시계추에 따라 ‘생산’되어야 하는 곳에서, 그들은 매뉴얼을 넘어, 느낌과 온기와 교감을 힘껏 지켜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노동을 ‘우리 일이 그런 게 아니잖아요’라는 말로 정의한다.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은 ‘그럼에도, 차마, 생겨버리는 책임‘ 등으로 전개된다. ‘마음의 복잡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노년 돌봄의 최전선을 지킨다고 할 수 있는 요양보호사들을 심층 인터뷰하면서 매번 받았던 마음의 충격/감동은 바로 이들의 ‘복잡한 마음의 드라마’와 관련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좋은 돌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억제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르신들이 위험하고, 사용하면 노인 학대가 되는 상황에서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돌봄 노동자들이 다치고 지쳐서 일을 그만두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양보호사 협회장인 정찬미의 말이다. 이 불가능한 상태가 돌봄현장의 기본값이다. 그래서 ‘좋은 돌봄’을 어떻게든 가능케 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을 비워야 마음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때론 ‘여시’가 되기도 하고, 때론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하기도 하며, 때론 같이 홀라당 벗고 목욕을 하며, 그들은 노년들의 ‘삶’을 지킨다.

 

“뭐 ‘인권보호, 인권보호’ 하잖아요. 근데… 우리들은 뭐냐고요. 어디다가 하소연할 만한 데가 없어요. 막 꼬집고 머리 잡아당기고 막 욕도 심~한 욕설을 하고, 막… 그거를 수용을 해야 일을 해야겠더라고요. (…) 그걸 담고 하면 좋은 마음이 안나와요. 그건 잊어버리고. “아이고, 저는 욕하셔도 좋아요.” (웃음) (동료 요양보호사들에게는) “그러지 마~ 사람인지라 뭐 화를 안 낼 수야 없지만, 그러지 마.” 마음을 비우고 일을 해야 해, 마음을 비우고…” –요양보호사 B (요양원 근무)

 

“저는 맨날 아침만 조회시간에 쌤들한테, “우리는 여기를 들어올 때는 마음을 집에다 내놓고 와라, (웃음) 그러고 집에 가서 다시 우리는 딱 (마음을) 집어넣는다. 이렇게 해야...” 왜냐하면 지금은 정말, 예전에도 그랬지만, 어르신들을 조금만 하면 ‘인권침해’다 뭐다 해서 야단하시잖아요. ‘방임이다’ 막 이렇게 하시니까. 어쨌든 큰소리 나지 않게. 어르신들 즐겁게 하면서 딱~ 저는 이제 좀 여시를 떨죠.” -요양보호사 C (요양원 근무)

 

사회서비스원 소속으로 방문요양을 하고 있는 요양보호사 D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노년들이 가장 원하는 돌봄이 무엇인지 또렷이 알려준다.

 

“제가 생각했던 1순위부터 5순위까지 고마움 순서가 있잖아요. 그게 완~전히 빗나갔어요. 그런데 그 어르신들이 대체로 고마워한 게, 냄새 나잖아요. 몸에. 집에 냄새 나잖아요. 그런데 더럽다고 다 어디를 가도 일정 거리를 두는데, 선생님이 내 몸을 만져줬을 때. “내가 이래 말해도 될랑가 모르겠다. 선상님이 나 젖탱이 만지고, 어디 갈 때 머리 빗겨주고, 선생님 루즈로 같이 발라주고, 내 더럽다 안하고 내 몸을 만져줄 때”. 이게 제~~일 고마운 거래요. 다른 이용자도 대부분 첫째 고마운 게, “나를 선생님이랑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줄 때. (…) 왜 선상님라고 나한테 냄새가 안나고 안 더럽겠어.” 이 얘기를 모든 공통점이 이거였어요.“ -요양보호사 D (사회서비스원 근무, 방문요양)

 

필요한 것은 ‘딸처럼 며느리처럼’이 아니라 ‘전문적으로’다. 전문적으로, 그것도 ‘우리 일이 그런 게 아니잖아요’의 바로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돌봄자의 계획과 요령과 숙달된 기술, ‘마음을 비움으로써 마음을 쓰는’ 돌봄이다. 이런 돌봄은 가족이나 혈연의 고리를 벗어날 때, 다시 말해 혈연의 독박돌봄을 벗어날 때 오히려 가능하다. 혈연 가족의 경우 마음을 비우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봄이 혹은 돌봄관계가 너무나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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